외로움의 기원
영화 <덱스터>
나를 공포에 떨게 만드는 크고 작은 것들이 있다. 욕실의 머리카락이라든가 막 피어나려고 자리를 다지는 (잔)주름, 음식물 쓰레기, 공과금 납부 영수증, 각종 벌레들 그리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에 이르기까지. 그 중, 깊은 어둠 속에 묵직하게 들어 앉아 꿈쩍도 않는 두려움 중에, 가장 너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가 있으니 바로 ‘외로움’이라 할 수 있겠다.
가족이나 교회 같은 친밀한 바운더리를 벗어나면, 항상 듣게 되는 ‘다르다’는 말. 지금은 다름을 자부심으로 안을 수 있게 되었지만 (사실 별 의식조차 않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것은 말 못할 콤플렉스이자 노이로제였다. 다름으로 인한 외로움은 ‘아무에게도 나를 이해시킬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가슴 터지는 답답함과 슬픔, 고독을 선사했으며 이는 언제나 ‘왕따’를 당하는 꿈속의 나를 통해 번번이 재현되곤 했다.
<덱스터>의 주인공 덱스터는 사이코패스다. 생물을 살해하는 것으로 욕구와 욕망을 충족하는 ‘괴물’. 진즉에 낌새를 알아 본 아버지는 그의 본성을 받아들이고 정당한 살인(?)과 후 처리법, 감정을 가진 평범한 사람처럼 살아가는 방법 등을 가르쳐준다. 그러니까 이 <덱스터>란 작품은, 전과자나 연쇄 살인범을 찾아 처치하는 주인공의 행보를 보여주는 드라마다.
덱스터의 살인은 본인에게는 만족을, 사회적으로는 비용절감을, 도덕적으로는 정의를 가져오는 일석삼조의 행위이자 사이코패스라는 생물학적 결함을 극복한 훌륭한 사례이기도 하다. 그러나 ordinary(보통의, 평범한)를 향한 덱스터의 노력은 어쩌면 죽을 때까지 계속 되어야 할 스스로를 향한 채찍질이며, 이는 동시에 그가 ordinary의 영역에 영영 발을 붙일 수 없는 이방인임을 방증하기에 참 서글프다.
어차피 고독이란 건 존재의 숙명이고 지금의 이 육체 안에 갇힌 이상 누구도 타인의 외로움을 대신 느끼거나 (조금도) 나눌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덱스터 역시 크게 다를 것 없겠지 싶다가도, 문득 괴물의 외로움은 평범한 사람이 느끼는 것보다 더 서늘하고 음울하겠지 싶어 안타까워진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채워질 수도 없을 테고 말이다. 무슨 짓을 해도 보편의 세계에서 별종일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본성에 충실해 희열을 느끼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희열은 중요하니까. 괴물에게도, 사람에게도.
<덱스터>는 외로움에 대한 정의들 중, 내가 천착하고 있는 갈래를 붙들고 세세하게 보여주어 더욱 공감이 갔다. 덱스터 자신의 정체성에서 출발한 의문은 결국 ‘동류 찾기의 실패→ 보통 사람들과 같아질 수 없다→ (또 다시) 사무치는 외로움’으로 귀결되는데… 아니, 대체 외로움이란 무엇일까. 왜 우리는 외로운 것일까? 언제가 되어야 이 지긋지긋한 외로움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창세전, 그러니까 우주와 이 세계가 지어지기도 전인 아뜩한 먼 옛날, 우리는 하나였다. 광막하고 아름다운 영원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하늘을 수놓는 미립자 같은 작은 빛이자 영원의 일부였다. 그러다 하나님이 정하신 어떤 순간에 이르러, 채 작별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뚝뚝 분리된 채 육체라는 물질 속에 담기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생겨난 그리움이, 원래 있던 곳과 본래의 상태로 회귀하고 싶은 아우성이 바로 ‘외로움’의 기원이 아닐까 한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의 요동이 가라앉았다.
이 세계가 끝나고 나면, 나의 육체의 생명이 다하고 나면 그 때엔 비로소 외롭지 않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결코 함께 맞이할 수 없는 지독하게 외롭고 고독한 그 죽음의 굽이를 지난 후에는, 영원 안에서 우리를 다정하게 맞아줄 이의 품속으로 따듯하게 녹아들 테니까.
시드는 꽃과 명멸하는 불빛에 가슴이 아픈 까닭은, 그들의 순간을 지켜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나의 외로움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애타는 노력에도 바뀌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이제는 외로움을 뜯어내어 줄, 그 자리를 평온과 충만함으로 팽팽히 채워줄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세계는 곧 우리가 사랑하는 신(神) 그 자체이며 그에게로부터 주어진 특권으로 이 땅에서도 어렴풋이나마 영원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음 또한 알고 있다.
이토록 큰 위안을 주심에 감사한다.
구원보다 더 중요한 건, 외로움을 해결하는 법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