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문화

 
작성일 : 10-11-08 11:3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겪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디테일이 살아있는 영화가 좋다. 디테일은 곧 리얼리티와 직결되고 그것은 삶의 후미진 곳까지 섬세하게 짚어내어 공감대를 형성한다. 물론 디테일에 집중하다 보니 전개상 늘어지는 부분도 있다. 개인적으로 씬 하나당 그 흐름이 너무 길게 느껴져 지루했다. 근데 지루하다 느꼈던 건 내가 백 프로 몰입하려 하지 않았던 탓일 수도 있다. 보기엔 한없이 잔잔하고 정적인 이 영화는 기실 생존과 본능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충족하지 못한 채 방기된 인간의 참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엄청 끔찍한 영화란 얘기다.

  ‘왜 나는 행복해지면 안 되는 거야?’ 하고 따지듯 묻던 철없는 엄마는 아이들 넷을 버려두고 새 남자에게 떠난다. 아이들은 엄마가 보내주는 매우 불규칙적인 생활비로 끼니를 해결한다. 돈이 떨어지면 편의점의 때 지난 김밥을 얻고 엄마의 옛날 남자들에게 구걸하며 껌 대신 종이를 씹어 먹기도 한다. 그럼에도 경찰서나 복지관에 전화할 수 없는 이유는, 자칫하다간 남매가 흩어져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초반엔 돈을 좀 보내주던 엄마는 아이들의 존재를 잊은 듯 소식이 없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막내가 의자에서 떨어져 죽지만 고작 열두 살로 가장의 역할을 해왔던 맏이에게 제대로 된 일처리는 무리다. 아이들은 트렁크에 막내의 시체를 실어 땅에 파묻는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아무도 모른 채로.

  낮에 보길 잘 했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심리적으로 충격을 주는 영화가 두렵다. 먹거리를 구하기 위해 터덜터덜 돌아다니던 맏이의 눈빛은, 돈이 있을 때와 없을 때가 너무도 확연히 달라 자본주의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당당할 때의 그 소년은 무척 예뻤지만, 주머니가 빈 소년은 어딘가 추레하고 구질구질해 보여 짜증이 났다. 유통기한이 갓 지난 삼각김밥 껍질과 빈 컵라면 용기가 널브러져 썩은 내를 풍기던 더러운 식탁. 아이들은 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나중에는 공중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공원의 수돗가 물을 식수로 활용하기도 했다. 아이들의 삶은 하나도 남김없이 제도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다시 발을 들이기에 그들은 너무 어렸고 무지했으며 상처 투성이었다. 

  굶주리는 아이들을 보며 먹던 계란찜과 호박무침, 김치찌개에 내가 호사를 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확실히 인간은 잔인하다. 자기보다 못한 삶을 보며 연민하는 표정을 짓지만 속으로는 언제나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야’하고 안도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지금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적인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비교를 한다 치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여러모로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반드시 비교 대상에 견주어야 현 상황을 깨달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우매함이 그렇다. 나는 그런 식으로 만족하게 되는 스스로의 모습이 어딘가 궁색하고 한편으론 약삭빠르게 느껴져서 슬프다. 어느 한 구석 완전함이라곤 없는 인간의 실체를 깨달을 때마다 아름답기만 했던 세상이 추하게 보이기도 한다.

  올해는 정신적인 만족을 추구할 수 있었던 대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던 시기였다. 그래서 풍족하게 지내는 사람들을 보며 혼자 적의와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게 한심하셨는지 육체적인 시련을 내리셨다. 8주째 다리를 쓰지 못하고 집에 갇혀 있다 보니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아도, 그저 삼시 세끼 뱃속에 뭔가 집어넣을 수 있다는 것에 몸서리 쳐지게 감사가 되었고 아무에게도 누 끼치지 않고 내 힘으로 내 몫 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도 알았다. 내가 걷거나 쪼그려 앉는 것 하나도 내 힘으로 해왔던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와 더불어 요즘은 거의 한 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쌓여가는 책을 보면서 저 역시도 내가 의지만 갖는다고 됐던 게 아니구나 하고 배웠다. 그러나 평정을 잃고 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하루에도 몇 번씩 된다. 그럴 땐 하나님을 원망하고 욕하면서 편리한 결론도 내렸다. 이런 시련을 주시는 이유는 나를 특별히 사랑해서가 아니라, 특별히 미워해서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시험을 여러 번 겪으면서 터득했던 지혜는 그것엔 반드시 벗어날 ‘때’가 있고, 시험으로 인한 깨달음은 겪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헌데 정작 그 지혜는 시험에 ‘제대로’ 든 순간엔 무용지물이니 원통할 노릇이다. -물론 내 신앙 수준이 아직 이 정도라 그렇겠지마는- 그렇게 머리가 나쁜 나에게 하나님은 이런 무시무시한 영화를 투하하셔서도 날카롭게 섭리하신다. 삶, 육체의 건강, 의식주, 가족, 욕구, 생명, 사회적 관계… 이런 것들에 대해 생생하게 되새김질 해볼 수 있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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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절망 <더 로드>
‘진짜’라는 하나의 확신,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