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거인
일본 MBS에서 현재 방영 중인 애니매이션 <진격의 거인>. 한국에서도 다양하게 패러디 되며 화제를 낳고 있다. 요즘말로 소위 ‘쩌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작가의 이 작품은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어 더욱 흥미롭다.
그 수가 얼마 남지 않은 인류는, 거인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높고 단단한 성벽을 쌓고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해 간다. 인류는 100년간 무사했고 앞으로도 지금의 평화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 근거 없이, ‘여태껏 그래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 거인들이 성벽을 부수고 쳐들어온다. 그들은 인간들이 이룩한 모든 것들을 가볍게 짓밟으며 도륙을 즐긴다. 순식간에 마을 하나가 초토화 되어 버린다.
3m부터 50m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크기를 자랑하는 거인들의 특징은 1) 인간을 잡아먹는다 2) 생식기가 없다 3) 소통이 불가능하다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4) 목 뒤 경추 부분이 약점이다 5) 대부분 지능이 낮은데, 인간 수준의 지능을 지닌 놈들도 몇 있다 6) 못생겼다 정도가 있겠다. 그러니까, 인류가 거인에 대해 수집한 정보란 고작 이 정도인 것이다. 몇 번의 멸종(!) 위기가 있었건만 속수무책이었다. ‘지피지기’를 할 수 없다는 것. 알지 못하는 대상만큼 막연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없다. 거인에 대한 부족한 정보들은 두려움이 빚어낸 각종 환상으로 채워진다. 그것이 더욱 공포를 부풀린다. 사실 거인이 본격적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장면 보다, 평화로운 일상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두렵다.
인간을 건드리지 않았던 100년간 거인은 별 탈 없이 생존해왔다. 즉, 거인은 인간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뜻이고 이는 거인들이 ‘재미’로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얘기가 된다. 누군가의 유희와 누군가의 생존. 그 지점에서 전쟁이 시작된다.
작가의 ‘약육강식’의 세계관은 ‘강자가 살아남는다’를 설파하지 않는다. 약한 자들의 살아남기 위한 전력, 투쟁의 아름다움을 세밀히 보여준다. 먹히지 않기 위한 처절함. 숨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달려드는 집념 같은 것들.
오프닝의 ‘싸우지 않으면 지금을 바꿀 수 없다. 기도로 달라지는 건 없다’라는 가사를 보면 실천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진짜 강함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진격의 거인>에서의 ‘싸울 각오’란 곧 ‘죽을 각오’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힘을 가진 상대에게 대항할 수 있는 이쪽에서의 힘은 그런 게 전부. 그러니까, ‘죽을 각오’가 아니면 지금을 바꿀 수 없다는 거다. 이 무시무시한 정신은 곧 혼의 정수랄 수 있는데 이 부분에서 상당히 일본답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본 특유의 그러한 비장미는 표현 방식에 따라 ‘오글’거리기도, 매료되기도 하는데 이 작품은 후자에 속한다.
아무튼 <진격의 거인>을 보면서 느꼈던 건, 인간들이 말하는 소위 자유의지라는 것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부분적인가에 관해서였다. 거인 때문에 성벽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즉, 활동영역이 제한되는 순간부터 이미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벽 밖으로 나가기 위한 투쟁이 자유의지의 본질인가. 나간 이후의 자유로움-그러나 언제든 궁지에 몰릴 위험이 있는-은 과연 진짜 자유인가. 그렇다면 공간적인 제약 혹은 위험요소가 없다면 자유로운가? 물리적인 종속성을 능가하는 자유는 가능한가? 그렇다면 그 자유는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나. 인간이 주체적이란 사실은 생태학적인 우위 때문에 생긴 착각은 아닌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노골적인 ‘약’의 위치로 포지셔닝 되었을 때에도 인간은 주체적일 수 있을까.
김진아 ponypony123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