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작성일 : 10-12-04 14:24 |
고요한 절망 <더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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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 종말이 왔다. 유구한 세월 동안 일궈놓은 인간의 문명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폐허가 된 건물, 곰팡이와 습기로 축축한 길, 음울하게 내려앉은 잿빛 하늘 아래 의지의 대상이라곤 상대방뿐인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녹이 슨 카트에 짐을 싣고 그들은 무작정 이동한다. 사람이 있을 만한 곳, 아직 멸망하지 않은 땅을 찾고자 가는 게 아니다. 잠시 정신을 놓는 순간 무너져버릴 삶을 앙상한 발바닥으로나마 지탱하기 위해서이다.
<더 로드>는 이들 부자의 여정을 담아내는 책이다. 그들의 여정에는 재난물에서 흔히 다루는 ‘절망-좌절-포기-희망’이라는 빤한 공식이 등장하지 않는다. 어떠한 이유로 지구가 멸망했는지, 그 과정의 설명 또한 생략되어 있다. 오직 모든 것이 ‘종결’된 시점에 놓인 두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절망엔 진폭이 없다. 기대와 바람, 설렘과 희망이 모조리 거세된 절망은 매우 고요하여 그 지독함을 더욱 생생하게 보고한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 절망할까. 삶을 이어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더 로드>에서의 절망은 그러하다고 말한다. 주인공들은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의 허리에 홀로 놓여있으며 그들이 희망에 찰 때라곤 먹을거리를 발견했을 때가 전부이다. 그러나 먹을 것에 관한 욕구는 생명이라면 기본으로 갖고 있는 본능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그를 두고 절망과 희망을 논할 수 없다. 희망의 사전적 의미 역시 ‘앞일에 대하여 어떤 기대를 가지고 바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밑바닥의 욕구를 충족하는 것을 희망으로 여기는 그들의 상황이란 얼마만큼 끔찍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끔찍함’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주인공들이 목숨을 끊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피를 나눈 관계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생존의 목표인 아버지와 아버지를 힘입어야 살 수 있는 어린 아들의 유대는 절망 속에 있기에 더한 위력을 발휘한다. 살고 살리기 위해 발버둥치는 부자의 모습은 처절하여 아름답기까지 했다.
나는 절망의 공포를 안다. ‘안다’고 감히 단정 지어 말할 수 있다. 원인도 이유도 알지 못하는 시련 속에 빠졌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과 이 괴로움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대한 두려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상황을 개진하기 위해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안 순간, 그 강제적인 체념이란 것은 숨구멍에 물이 밀려들어오는 것처럼 위협적이었고 고통스러웠다. 걱정하고 염려해준다 해서 내 몫의 고통을 그들이 나눠가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것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것은 난데, 그러한 최후의 사람인 내가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건, 그리하여 스스로를 포기하고 놓아야 한다는 건 어디에 하소연조차 할 수 없는 징그러운 공포였다. 정신이 들 때마다 나를 주관하는 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벌벌 떨긴 매한가지였다. 어떻게든 무언가를 붙들기 위해 발버둥 쳤고, 붙들었던 무언가가 나를 도와줄 수 없음에 사무치는 두려움과 고독을 느꼈으며 무수히 좌절했다. 최후의 보루(!)로 말씀에 매달리며 하루에 강의를 10개 가까이 듣는 기염을 토해냈지만 그럼에도 눈앞의 상황이 손톱만큼도 변할 생각을 않자, 신앙의 끈이 짧은 나는 또 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그 과정이 석 달 가까이 반복되니 결국 지쳐 나가 떨어져버렸고 절망 속에서 자유를 누리는 법을 이제 조금씩 터득하고 있다. 아주 느린 속도로 조금씩.
‘아름답다’라. <더 로드> 속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 아름답다고는 했지만 사실 집착처럼 추악한 것은 없다. 내 모습을 보니 그랬다. 설령 그것이 생에 대한 집착일지라도 말이다. -생이라고 해서 결코 장엄하고 숭고하며 위대한 것은 아니다. 생에 대한 집착은 여타의 집착과 다르기에 특별히 여겨주어야 한다는 건 인간 본위의 우스운 고집일 뿐이다. 집착은 다 똑같다.- 집착은 욕심을 뿌리로 한다. 욕심으로 인해 괴로운 것은 나의 뜻한 바가 하나님의 뜻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 정말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 뜻대로 잘 되어가고 있다’는 목사님의 말씀이 맞다.
비록 내 몸이 아팠을지언정 나는 내 몸의 주체와 주관자를 ‘나’라고 여기는 우를 범했다. 인간은 하나님께 속해있고, 의지 또한 종속되어 있다고 알면서도 정작 결정적인 순간이 닥치니 또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보려고 아등바등 했던 것이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겁이 나고 힘들지만 이젠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하늘로 솟았다가 땅으로 꺼질 만큼 심하게 동요하진 않는다. ‘할 만큼 했으니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안 해주시면 안 해주시는 대로 살지 뭐.’ 싶다.
<더 로드>의 아버지는 당신이 존재만으로 아들에게 구원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지금의 내게 하나님이 그렇다. 하나님 외엔 의지하고 비빌 언덕이 한 군데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을 절절히 깨달았다거나 하는 그런 얘길 하려는 게 아니다. (솔직히 그런 건 아직 모르겠고, 실은 이리 의연한 척 하고 있지만 이젠 제발 이 시련이 끝나길 초조하게 바랄 뿐이다!) 그저 당신 바라보는 것 외엔 허튼 생각 못하도록 치밀하게 손을 써놓으셨다는 것만 알 수 있다.
<더 로드> 속 폐허가 된 지구의 낙담과 상심의 고요 속에서, 오직 ‘바라볼 대상’이 있음만을 동력으로 하루하루 버텨가는 아들이 된 기분이다. 희망과 기대 같은 거 갖지 말고 그저 오늘만 어떻게든 버텨야 겠다. 그렇게 하루씩 살아내다 보면 언젠가 끝나는 날이 오겠지. 그래서 또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날을 주시겠지. 그렇게 위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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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 찾아온 행복, Love actually |
겪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