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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역사 유적지 탐사기<4>
성경진리에 붙들린 담대한 종, 루터의 자취를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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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 (토) 츠빙글리의 도시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은 여러 동역자들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주도면밀하신 작업
탐사단은 아침 9시 제네바를 떠나 개혁자 츠빙글리가 활동한 취리히로 향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 땅위에 실현하시되 여러 동역자를 통해 이루어 가신다. 이것이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법칙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최고 연출자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이 정하신 각본에 의해 여러 배우들이 등장시키면서 드라마 전체의 그림을 실현하신다. 이처럼 성도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 각자 자기역할을 수행하되 언제나 서로가 연합하여 전체 몸
을 살려가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루터와 동시대 인물인 츠빙글리(1484~1531, 루터보다 1년 뒤 탄생)의 등장과 그의 개혁 작업이 그러하다. 하나님은 16세기에 동시 다발적으로 개혁의 사람들을 일으키시고 전체 개혁의 역사를 감당하도록 하신 것이다. 루터, 츠빙글리, 칼빈, 파렐, 부처, 낙스 등의 개혁자들은 바로 하나님의 개혁작업에 부르심을 받은 동역자들이었다. 츠빙글리는 칼빈(1509~1564)보다 25년 앞선 인물이며 루터(1483~1546) 와는 동시대 사람으로서 종교개혁의 또 다른 한축을 맡아 전개되었다.
10시 30분 경 취리히에 도착한 탐사단은 츠빙글리가 사역한 그로스뮌스터 교회당을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츠빙글리의 개혁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츠빙글리는 특히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함으로 종교개혁의 제일원칙을 확고히 했고, 특히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했다. 또한 성례전을 은총을 얻는 수단으로 간주하는 카톨릭 사상을 단호하게 거부함으로서 카톨릭의 의식주의로부터 탈피했다.
이렇듯 하나님은 칼빈의 제네바 종교개혁이 본격적으로 있기 20여년 전에 취리히에서 이미 개혁의 불씨를 준비하고 계셨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16세기 종교개혁은 사상적으로, 혹은 물리적인 여건을 통해서도 차근차근 치밀하게 준비되고 무르익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15일 오후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점심 식사 후 1: 45분에 스위스 땅을 뒤로 하고 종교개혁의 출발지인 독일을 향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오후 6시 35분에 오래된 도시, 고성들이 있는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다. 독일은 스위스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원칙적이고 강직하게 보이는, 그리고 생활방식이 검소한 독일인의 기풍이 도시 전체를 감돌고 있었다.
아! 독일은 참으로 독특하고도 신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중요한 나라이다. 개신교의 출발인 루터가 탄생한 나라이면서, 동시에 개신교의 성경의 가치를 부정하는 계몽주의의 완성자 칸트의 철학이 꽃핀 곳이기도 하다. 또한 아예 “신은 죽었다” 라는 철두철미 무신론적 사상의 대변자 니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20세기 초에는 양차세계대전을 일으킨 나라이며, 전후에는 구라파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로 새롭게 탈바꿈한 나라이기도 하다. 신학적으로는 역사비평학이라는 자유주의신학의 본산지로서 서구교회가 붕괴되는 진원지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런 독일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5월 16일 (일) 루터의 개혁현장에서
숙소에서 아침에 주일 예배모임을 가진 후 오전에 하이델베르크 시장 광장과 고성 한군데를 돌아보았다. 독일 교회에 예배를 참석해보려고 알아보니 시간이 맞지 않았다. 독일교회는 주일에 한번 예배 모임이 있을 뿐 이미 교회의 영적 기운은 쇠잔한지 오래임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시장 광장 주위에 예쁘게 생긴 조그만 호텔이 있었는데 호텔 꼭대기 간판에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이는 종교개혁의 구호)가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에서나 종교개혁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서글픔이 있었다.
점심식사 후 그 유명한 보름스(Worms) 재판이 열린 역사적인 장소로 출발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이해하는데 보름스는 매우 중요한 계기이다.
보름스 재판정에 서기까지
루터는 실제 무명의 카톨릭의 수도사였으며 그는 자신의 행위가 후대 어떤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올지를 예측하고서 개혁의 불길을 당긴 것이 아니었다. 단지 하나님은 루터로 하여금 영혼의 갈증을 가지게 했으며 그는 카톨릭의 거짓교리와 인위적 수행 속에서는 참된 평안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런 내면의 고민과 갈증을 가지고 있었던 루터는 성경 안에서 진정한 구원의 도리를 발견했고 진리의 원칙에서 빗나갔던 교황의 거짓 가르침을 담백한 방식으로 거부했던 것 뿐 이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결단, 즉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대한 거부”(!)였다.
그것은 구라파 역사, 아니 세계역사의 물줄기를 온전히 바꾸어 놓는 일이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성(城) 교회 정문에 라틴어로 ‘95개조’를 붙였을 때 초대장은 겸손하기 까지 했다. 루터는 이 글을 당시 마인츠 대주교인 알프레히트에게 보내는 한편, 그 글이 널리 읽히도록 하려는 뜻에서 독일어로 인쇄하여 돌렸다. 당시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 인쇄술이 실용화되고 있었다. 실상 종교개혁은 인쇄술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했다.
성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 만들어낸 면죄부 판매, 그것은 실제 개혁의 불길을 만들어준 계기였다. 루터는 면죄부 판매를 바라보면서 비진리에 대한 역겨움과 동시에 진리에의 뜨거움을 느꼈다. 루터는 인간이 자신의 행위( 베드로 성당을 짓는데 기부하는 것 따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당대 유럽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거대한 권위로서의 교황청을 일종의 사기집단으로 간주했다.
루터의 95개 조항 문서가 인쇄되어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그에 대한 열렬한 찬성과 신랄한 반론이 쏟아졌다. 로마교황청은 이 수도사에게 로마로 오라는 소환령을 내렸다. 종교재판을 걸어 화형시킬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루터는 작센 공국의 영주인 프리드리히측에 편지를 보내 독일 제후들이 독일의 신민을 이탈리아로 넘기지 않도록 요청했다. 교황청에 불만이 많았던 프리드리히는 이에 동의했다.
루터를 소환할 수 없어 권위의 실추를 느낀 교황은 타협안으로 루터를 아우구스부르크에 있는 카예탄 추기경앞으로 불러 그의 주장을 취소하도록 명령했다(1518). 루터는 카예탄을 만나러 갔으나 이단사상을 취소하라는 권고를 묵살하고 자신의 이신칭의론을 굽히지 않고서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그후 라이프찌히 논쟁에서 루터는 구원을 받기 위해 교황을 인정해야할 필요가 없다고 못박았고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가 됨을 강력히 주장함으로 교황과의 결렬은 공개적인 것이 되었다. 교황청은 루터를 파문했고 루터의 모든 저서를 불태울 것을 명령했다(1521). 이에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학생들로 하여금 교황의 교서 뿐 만 아니라 로마교회 법전을 불태우게 했다. 일개 수도사가 교황을 파문한 격이었다. 이로써 루터와 로마 사이의 모든 다리는 불타버렸다.
보름서에서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수 없습니다”
일이 이쯤되자 교황은 세속 권력의 대표자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의 도움을 청했다. 칼 5세는 1521년 1월 27일 보름스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토의하기로 하고 루터를 소환했다. 황제는 교황청의 고발에 대하여 증언하라는 초청장을 루터에게 보냈다. 루터에게 가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루터는 단호했다. “지붕위의 기왓장만큼 마귀들이 많아도 보름스에 가겠다”고 말했다. 생과 사를 건 일대 모험이었다. 탐사단이 도착한 보름스 교회당은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보름스 교회당은 제법 큰 건물이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여 생사를 건 모험을 담대하게 감행했다. 한 무명의 수도사였던 루터였지만 거대한 권위체제인 로마교황청 앞에 굴복할 수 없었다. 그의 신앙적 기개가 서려있는 장소였다.
재판정에서 선 루터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한 나는 교황과 교회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나는 달리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결 어
하나님만을 의지했던, 그리고 진리에 순수했던 루터의 확신은 거친 도전을 뚫고 나가야했던 16세기 종교개혁의 운동력이었다. 아니 루터자신의 확신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루터를 말씀으로 붙들어 간 것이었다. 개혁은 인간의 작업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였다.
독일에서의 탐사 일정은 참으로 아쉬웠다.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충분히 돌아볼 가치가 있는 곳이었지만 제한된 시간의 탐사여정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개신교를 있게 역사의 현장에서 루터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주권적 인도와 도우심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다시금 루터의 고백이 귀에 울려온다. “내가 성경에서 깨달은 진리를 철회할 수가 없습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김규욱 목사(주필) |
종교개혁 역사 탐사의 신학적 의미(결론편) |
종교개혁 역사탐사기(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