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의한 나눔
성경적 봉사관
봉사(奉仕, service)의 사전적인 의미는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헌신적으로 일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봉사는 종교생활의 기본이며, 이기적인 성향에서 이타적인 행동의 정칙이다. 기독교인의 봉사생활은 예수님이 증거한 바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미학에 기반을 둔다. 기독교의 봉사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인간 내면의 아름다운 표현의 극치이다.
구약시대의 봉사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인 헌신과(레위기) 약자를 보호하라는 이웃 사랑으로 실현된다(신 10:17~19, 14:29). 신약시대의 봉사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교훈(요 13:34)에 기초하여 교회와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서 실행된다(롬 13:9, 갈 5:14, 약 1:27, 2:8). 이와 같이 기독교의 봉사는 인간 존중을 넘어 신앙심의 발로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형식이다.
Ⅰ. 봉사의 의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8:9)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역하신 그리스도의 희생과 생명의 나눔에서 시작한다. 그리스도인의 섬김과 나눔은 열방을 향한 진리의 선포이며 일생의 사명이다. 봉사는 종교를 초월한 행복의 나눔이다. 일방적인 희생이나 헌신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권인 행복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즉, 서로가 행복을 함께 나누며 즐겁게 산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는 기독교적인 연보(捐補)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연보의 원리는 평균에 가치를 둔다. 가진 자가 나눔을 통해서 약자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함으로서 평균되게 된다는 이치이다.
자본주의의 제도는 경쟁에, 사회주의는 평등에 가치를 둔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경쟁 논리에 의해서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 지고, 사회주의는 평등 논리에 의해서 사회 전반이 침체 현상을 낳는다. 그래서 국가적인 복지는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서 실행되는 강제적인 규범이며 사회 정치의 형식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양극화 현상을 포괄하는 것이 기독교적인 연보의 원리이다.
기독교의 연보 정신은 개인의 능력을 존중하는 반면 축적된 재능이나 물질을 자발적으로 나누는데 있다. 나눔의 정신은 모든 것의 주체가 창조주이며, 모든 것의 실질적인 소유주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라는데 기인한다. 인간은 인생의 출발에서부터 주도권이나 소유권이 전혀 없었고, 과정에서 역시 인간의 힘으로 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욥 1:21). 그래서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연보의 기본 정신을 갖게 된다. 기독교가 추구하는 봉사의 의미는 행복을 통한 나눔인데, 이에 대한 이치를 정리해 본다.
첫째, 은혜를 인식해서 실현되는 기쁨이다.
이는 물질의 비축 여부나 풍요에 따른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감사한 마음이다. 즉,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의 힘이 곧 행복의 척도이기 때문에 이것이 봉사의 동인이 된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400년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은혜를 깨닫게 하신 다음 성전(聖殿)의 봉사활동을 명령하셨다. 또한 약자들을 보호하고 나누라는 교훈 역시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과 해방시켜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영광과 은혜를 인류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모든 권세와 신분을 내려놓으심으로 나눔의 본을 보이셨다.
기독교 봉사의 원천은 신적 은혜에 대한 감동이 우선한다. 남을 위한 희생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식이 행복의 근원이 된다.
둘째, 행복을 공유하는 상호간의 기쁨이다.
봉사의 즐거움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베푸는 자나 수혜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가치이다. 공급자는 베풀 수 있는 여건에 감사해서 좋고, 수혜자는 베푸는 자들의 아름다운 마음에 감동할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이는 사랑하는 자나 받는 자 모두가 ‘사랑’이란 매개를 통해서 함께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가치를 연보 행위로 설명하는데, 그는 연보를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로 정의한다(고후 8:4). 그리고 이렇게 시행되는 연보에 대해서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고후 9:12)고 말한다. 이와 같이 성도를 섬기는 봉사의 직무는 쌍방 모두에게 감사와 기쁨이 됨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봉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들이 함께 기뻐하며 함께 감사하는 공동체의 아름다움이다. 인간의 자존감은 나눔을 통해서 확증되며, 함께 공유함을 통해서 확장된다.
셋째, 헌신을 감내해서 배가되는 기쁨이다.
수학적 공식은 ‘10-3=7’이지만, 봉사의 법칙은 ‘14’가 된다. 마치 사랑을 베풀면 베풀수록 더욱 넘침과 같은 원리이다. 하나님의 은혜 인식과 나눔(연보) 그리고 감사와 기쁨은 상호 연관성이 있으며, 산술적으로 계산할 수 없다. 봉사는 환경적인 여유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인생의 가치에 있다. 바울은 마게도냐 성도들의 연보를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2)고 증언한다. 나눔의 미학은 극한 환란과 가난 그리고 기쁨이 일체가 되어 형성되며, 역경과 시련과 즐거움의 조화로 탄생된다. 나눔은 환경을 초월해서 실현되고 실천을 통해서 기쁨이 배가된다.
기독교의 봉사는 환경에 제제를 받거나 종속되지 않으며 실천을 통해서 기쁨을 만끽한다. 한 알의 밀알이 썩음으로 많은 열매가 맺히듯이 희생의 수고가 기쁨을 증폭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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