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이슬람 (2)
중동국가와의 교류증대로 급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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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전도는 문화적 경계 혹은 장벽을 넘어가는 것이다. 복음 전파자와 수용자 간의 간격에 따라 E0, E1, E2, E3, 네 가지로 나누고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 그 둘이 가지고 있는 역사인식으로 인해 그 문화적 간격(cultural distance)은 크다. 필자는 그 간격이 크기 때문에 ‘E4’라고 주장한다. 그 간격을 넘기 위해 이슬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다. 필자는 “이슬람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군(軍) 이맘의 선교 활동
한국 군목제도와 같이 터키군에는 이맘(Immam)이 종군하고 있었다. 1955년 제6터키 여단의 이맘 압둘 가푸르 카리 이스마일 오울루가 한국인을 대상으로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전의 이슬람은 하나의 종교라기 보다는 사상과 문화로써 개인적 접촉에 의해서 소개되었다. 그러나 터키군의 참전으로 종교로서 이슬람을 알리게 되었고, 다른 나라의 무슬림과의 접촉을 원하던 한국 무슬림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특히 이슬람에사 강조하는 공동체(움마, Ummah)와 형제애는 금요일의 합동 모임을 통해서 강화될수 있었다. 이 당시 한국 무슬림이었던 김진규는 터키군의 통역관이었던 그의 사촌 신백현의 도움으로 1953년 말 시작되었다. 이 모임은 교리 강좌와 이슬람 선교의 차원으로 발전하여, 1955년 9월 15일 서울 농협대학 강당에서 70여명의 무슬림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 이슬람 협회’가 발족 된다. 회장에 김진규, 부회장겸 사무국장에 윤두영이 선출되었다.
이 협회의 발족을 계기로 이슬람이 조직적인 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1956년 4월에는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는 불우 청소년을 대상으로 ‘청진학원’을 열어 무료로 중등교육과 이슬람 교리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학생들 중 일부가 이슬람을 수용하였다. 1956년 10월 압둘 가푸르에 이어 군(軍) 이맘 쥬베이르 코치가 부임 이후에도 이슬람을 알리는 활동이 계속되었다. 터키군의 지원으로 이문동에 막사 형태의 마스지드(Masjid, 회교사원)이 만들어졌는데, 첨탑(미네렛, mineret)도 함께 세웠다. 그 당시 이슬람 입교자수는 208명이었다고 한다.
한국 이슬람 중앙연합회 출범
1960년대에 들어 한국의 무슬림들은 국내에서 이슬람을 알리는 활동을 계속하는 동시에 해외 이슬람 단체들과의 접촉도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이들은 한국의 이슬람 현황을 알리기 위해 이슬람 국가들을 돌아보았으며 이슬람 국가들에서도 한국 이슬람의 실태 파악을 위해 직접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한국 무슬림 최초의 하지(Hadji, 성지 순례자)가 나왔으며, 이슬람을 체계적으로 배우고자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로의 연수 길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후 1965년 4월에는 오늘날 한국 무슬림 공동체 기구가 되어있는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Korea Muslim Federation, KMF)의 모태가 되는 '한국 이슬람 중앙 연합회'가 공식 출범하였다. 이 연합회는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임시 성원과 사무실을 마련, 국내에서의 이슬람 선교와 해외의 이슬람 단체들과 교류에 힘썼으며, 1967년 3월 문공부로부터 '재단법인 한국 이슬람교'의 설립을 인가받아 한국 무슬림을 대표하는 공식적인 기구로서 법적 지위를 얻었다. 현재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KMF)는 한남동(이태원) 중앙성원에 본부를 두고 이슬람 선교를 위한 각종 이슬란 관련 홍보 책자 발간, 이슬람 교리 및 문화 강좌, 세미나 개최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성원(마스지드 Masjid)의 건립과 지속적 선교
한국에서 무슬림의 활동이 이슬람 세계에 알려지게 되자 이슬람 국가들과 단체들의 한국 무슬림과 한국 사회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게 되었다. 동시에 아랍 및 이슬람 세계와의 관계를 정부도 인식하게 되었고 1970년 당시 한국 무슬림에게는 필연적 사업이었던 이슬람 성원 건립이 박 정희 대통령의 중앙 성원 건립 부지 기증과 함께 현실화되었다.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에 1500평 규모의 성원 건립 부지가 확보되자 이슬람 국가와 단체의 재정지원으로 한국 최초로 아랍 건축양식으로 이슬람 성원이 건립되게 되었다. 1976년 5월 이슬람 국가의 장관 및 국회의원을 포함한 약 50여명의 종교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원 개원식이 거행되었다.
이슬람 성원 건립은 무슬림의 예배 장소로서 뿐만 아니라 이슬람과 아랍 세계를 알려는 한국인들과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의 무슬림들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곳이 되었다. 이슬람 세계와의 교류에 있어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공식적 장소가 세워졌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개원 전 약 3700명에서 한국 무슬림이 개원 후 3년 내에 1만 5천명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입교한 한국인들의 상당수는 충분한 이슬람 지식이나 신앙에서가 아니라 당시의 늘어가는 이슬람 나라들과의 교류로 말미암은 취업, 유학, 결혼, 사업 등이 입교의 주요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입교한 무슬림들은 실제로 중동에서의 이슬람과의 만남을 경험하고 신실한 무슬림으로 변화되어 귀국한 경우도 많았다. 1978년 3월에는 중동의 한국인 근로자들에게 그들이 사는 세계의 종교와 사상 그리고 문화로서 이슬람을 알리기 위해 최초의 해외 지회인 ‘제다 지회’가 설립되었다. 이슬람에 입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8000여명이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1979년 7월에는 ‘쿠웨이트 지회’도 설립되어 한국인을 대상으로 이슬람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84년 까지 약 3000명이 무슬림이 되었다. 이러한 이슬람 세계로 진출한 한국인을 대상으로 현지 문화와 종교를 교육하는 목적은 ‘인도네시아 지회’도 설립하게 되었다.
서울에 성원이 세워짐으로 서서히 각 지방에서의 선교가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가정집, 비닐하우스 등에 임시 예배실을 마련하고 이슬람을 알리려는 노력은 지방에서의 성원 건립을 유도하였으며, 외국의 지원으로 1980년 9월 부산 성원이 개원하고, 이어 1981년 7월에는 경기도 광주에서, 1986년 11월에는 전북 전주에서 개원되었다. 1986년 4월에는 안양의 기독교 교회를 매입하여 외국의 지원을 받지 않고 한국인 무슬림들이 힘만으로 개원하게 되었다. 현재는 울산과 제주에도 임시 예배실이 설치되어 한국과 이슬람과의 교류에 힘쓰고 있으며, 약 4만 명의 무슬림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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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오부영 목사 (국제문화교류선교회 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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