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공기(公器),
언론은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가?
학교가 교육을 독차지했던 시절은 지났다. 학교 밖, 거의 모든 일에 교육이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그렇다. 교육을 학교에 한정시킨 근대의 시각이 잘못된 것이지 교육은 인류의 태와 함께 시작되었다.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것을 습득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의 전수 혹은 상호작용이 교육이다.
오늘날의 교육은 세상의 각종 환경으로부터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다. 정보화시대라 일컬어지는 근래에 정보를 선별하여 제공하는 주류는 언론이다. 따라서 언론을 사회적 공기(公器)라 일컫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언론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국민을 대상으로 장난을 친다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을까? 있다.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의 사례는 언론이 국민들을 대상으로 우민화 정책을 실시했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안타깝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우민화의 사례를 몇 가지만 들어보자.
하나, DJ정부 시절 교육부 총리를 지낸 한완상씨가 ‘창발성’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그런데 교총을 시작으로 북한 국호를 사명(社名)으로 쓰는 보수신문까지 이를 ‘종북’으로 몰고 갔다. 이유인즉, 북한이 자주 쓰는 용어라는 것이다. ‘창의성’으로 써야 한다는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면서. 국어사전에 올라있는 가치중립적인 말을 쓰는 것까지 이념의 잣대를 들이댄 것이다. 한두 번이 아니다. 전체주의 냄새가 풍기는 ‘국민’대신 오래전부터 써 왔던 ‘인민’도 사라졌고, 친구를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인 ‘동무’도 금기어가 되었다.
둘, DJ는 대통령 재임시절에 통일을 거론하며 삼국시대의 전쟁과 한국전쟁을 예로 들었다. 큰 문제가 되었다. 통일이라는 용어는 한국전쟁에 쓰지 말아야 한단다. 그 이유가 김일성이 시도한 무력이기 때문이란다. 누구나 쓸 수 있고 역사적으로도 인정되듯이 무력이든 평화적이든 통일의 시도는 맞는 것인데도 몇몇 보수신문에서는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했다.
셋, 이명박 정부에서 강조했던 것이 법치주의였다. 대통령이나 고위 공직자들은 국민을 향해 법치주의를 강조했다. 그런데 그 말의 원뜻은 국민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왕정 시대에는 ‘짐이 곧 국가다’라는 것이었으며 사회가 발전하면서 법에 의하지 않은 통치는 안 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면서 통치자에게 주어진 의무였다. 즉, 법대로 통치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것을 비틀어 통치를 받는 대상에게 강조하는데 써버렸다. 사회적 공기인 언론에서는 그것의 참 뜻을 전달하는데 인색했다.
넷, 얼마 전 박대통령은 천막 농성을 하는 야당을 향해 ‘국민적 저항’을 받을 것이라는 으름장을 놓았다. 그런데 국민적 저항은 원래 통치 권력을 향하는 것이고 이러한 예외가 세계사적으로 없다. 야당을 향해 국민적 저항 운운하는 것은 새로운 이론의 창조다. 그래서 서울대 모 교수는 트위터에 “야당이 국민 저항에 직면한다는 것은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봤음”이라는 글을 올려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풍자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인식이 문제제기 없이 당연시되고 그것의 중요성을 포장해서 칼럼이랍시고 강조하는 사람을 보노라면 서글픔을 느낀다.
대입 평가 항목 중 하나인 논술은 학생들의 사고와 지식을 집대성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며 이를 통해 학생들의 수준을 파악하는 좋은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신문의 사설이나 칼럼은 논술의 기술을 높이는 데 좋은 소스라고 알려져 있다. 현실은 반대다. 신문 사설이나 칼럼으로 논술을 가르칠 때 잘못된 논술의 사례로 거론하거나 그 자료에서 비약이나 궤변을 찾는 방법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라면 필진들에게는 수치다. 논리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억지와 궤변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신문의 독자들 중 상당수는 그런 신문들의 논조에 쉽게 동화되어 자기화한다. 그리고 잘못된 지식을 정석인양 주변에 전수한다. 전수받은 이들은 그것을 내면화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간다. 결국에는 사회의 퇴행으로 이어지며 교육의 짐으로 얹힌다. 총체적인 부실이다. 영적 공기인 교회는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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