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의 원형
17. 율법은 궁극적으로 도덕적 규범이 아니라 메시야 언약입니다.
Ultimately, the Law is not a moral code but the messianic covenant.
우리는 지난번에 주로 신약성경을 중심으로 하여 율법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율법이란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있는 도덕적인 차원의 규범이 결코 아니라 죄인인 인간이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며, 더 나아가서 그 율법은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과 같음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신약의 성경이 너무도 명백하게 밝히고 있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율법의 의미를 정리한 연후에도 여전히 질문이 생겨납니다. 즉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율법은 어떤 기능을 하느냐 입니다. 이에 대한 중요한 오해는 구약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그것을 지키라고 하셨기에 그것은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지켜야할 도덕적인 규범과 같은 것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에 대한 이해가 모순을 일으킵니다. 즉 한 성경 안에서 율법은 지킬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기도 하고 반면에 지켜야 된다고 가르치기도 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이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이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는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언약적인 성격”은 사라지고 율법을 “도덕적인 차원”으로 곡해하는 결정적인 문제를 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결정적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의 틀 안에서 율법을 정리해야 합니다. 언제나 성경에 대한 오해는 성경 전체의 구조와 근본 기록 목적을 염두에 두지 못하고 지엽적인 접근을 할 때 발생합니다. 특히 율법에 대한 오해가 그러합니다. 성경은 구약이 메시야 언약이고 신약은 메시야 성취로서 의미적인 통일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기본 틀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용어와 사건들은 언약-성취의 기본 틀에 의해 수렴되고, 또한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정리됩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성경의 기본 틀인 언약-성취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이 그 이전에 주어진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의 관련성을 놓친 채 도덕적인 규범과 같이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근본적으로는 이미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대로 가나안에 가는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가나안으로 가는 과정에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십니까? 그것은 그 율법을 지키는 과정을 통해서 이미 주어진 하나님 여호와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는 방편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런 “언약과 성취의 역사를 주도하시는 하나님 계시” 라는 전체적인 틀을 놓치고 모세 율법만을 따로 떼어 내어 이해할 때 잘못된 율법주의적인, 혹은 도덕적 해석이 발생합니다.
모세 율법은 인간사이의 질서를 위한 도덕규범이 아니라 언약을 이루시는 여호와를 기억하게 하는 종교적 차원의 계시적 법입니다. 지난번에도 밝힌 대로 모세 율법은 십계명, 율례, 규례로 나누어집니다.(출) 이를 중세 신학자 아퀴나스가 도덕법, 민법, 의식법이라고 자의적으로 규정하여 예수님이 오심으로 민법과 의식법은 성취가 되었으나 “도덕법으로서의 십계명”은 영구히 효력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칼빈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약 율법이 도덕법이라는 규정 자체가 그릇될 뿐 아니라 예수님이 오심으로 율법 중 일부만 이루어지고 일부는 아직도 남아 있다는 주장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과 선지를 폐하러 (……)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완전케 하신 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예수님의 의도를 완전히 곡해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약의 율법을 자신이 지키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혹은 간음하지 말라 하는 법을 자신들이 지키는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실상 모세율법을 껍데기로는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본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옛적에 살인하지 말라 하는 법을 들었으나 형제를 보고 라가(이는 히브리어로 욕입니다, 즉 미워하는 자)하는 자마다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를 보고 음욕만 품어도 이미 간음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예수님은 껍데기의 행위가 아니라 그 속의 중심을 살피십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하신 율법은 우리가 결코 지킬 수 있는 법이 아닙니다. 죄인인 인간은 외형적인 범죄이전에 이미 자기 안에 미움과 악독, 그리고 음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완전케 하신 율법은 인간이 도저히 지킬 수가 없으며 그것을 예수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운명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은 메시야를 예표하는 언약적인 성격을 띱니다. 출애굽기(20:~33:)를 보면 하나님은 율법, 즉 십계명과 율례, 규례를 주시기 전 에 앞으로 주실 율법이 언약임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즉 19장 5절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라고 하십니다. 이른바 “시내산언약” 입니다. 이 시내산언약은 장차 메시야를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구약 백성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하신 이유는 그것을 잘 지켜서 구원을 얻으라는 것이 아니며 또한 도덕적인 차원도 아닙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는 십계명을 지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십계명을 지킬 수 없는 존재임을 아시고 제사법으로서 규례를 주셔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차 메시야의 영원한 속죄제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더러 십계명을 지키는 것도 그것이 도덕법 차원으로 간주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컨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날짜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킬 때 애굽의 노동의 고통 속에서 건져주신 여호와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 안식일은 궁극적으로 장차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언약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죽으시고 장사되어 완전히 안식일을 지키시고 삼일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그리함으로써 우리들을 죄악의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참 마음의 안식을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다 이루신 날짜 안식일을 지금도 율법적으로 지키라고 하는 것은 바울이 경고한 것처럼 그릇된 가르침입니다. 바울은 구약의 모든 율법의 내용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오늘날 우리는 주일이 율법적인 안식일이기에 그것을 지키러 모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안식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이게 됩니다. 양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언약으로서 모든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이심을 확증하였고 그 성취의 공로를 성도에게 거저 주셨습니다. 이제 성도는 율법의 멍에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으며 이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도는 어떤 법에 의해 살아가게 될 것입니까? 이에 대해 다음 호에서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만날 때까지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The laws in the Old Testament were designed to point to the coming of Jesus. Jesus came and fulfilled all the laws given by God, and by doing this he fulfilled God’s covenant. Jesus freely gave the Sabbath rest to us. We are free from the law and we have become slaves of Christ’s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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