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의 원형
19.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과 뜻을 구하는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Prayer, the center of the Christian life, seeks God’s covenant and providence.
오늘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기도에 대한 성경적인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의 중요성은 별도로 강조하지 않아도 익히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실상 기도생활이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으로써 그것이 없는 신앙생활이란 알맹이 없는 쭉정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에 해당하며 따라서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루어지고 있는 기도의 형태와 내용을 보면 심히 염려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무조건 정성 드려서 무엇이든지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지극히 맹목적인 태도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기도는 기독교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종교, 특히 무속에서도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와 무속 신앙에서의 기도가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차이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무속 종교가 어떤 이유에서 존재하며 기독교와는 얼마나 다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욕망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무속 종교라는 것은 그런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집니다. 아담 타락이후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죄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건강하게 잘 살고 싶고, 남들보다 우월하고 싶으며, 그래서 자기이름의 영광을 돋보이고 싶어 하는 타락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욕망을 이루기 위한 삶이 모든 타락한 인생의 삶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런 인간의 욕망을 정당한 것으로 보고 그것을 희구하도록 하는 것이 무속종교의 실체입니다. 도대체 무속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가렵고 아픈 점을 이용하여 이 땅에 기생하는 왜곡된 신앙의 방식입니다. 즉 인간은 몸이 병들고 아프면 누구나 건강하게 낫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인간은 부유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돈이 없으면 당장 위협과 불안을 느끼고 불편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 하든지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기를 희구합니다. 그래서 병 낫기를 바라고, 부자 되기를 바라며, 더 나아가 집안에 우환이 없기를 바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을 파고들면서 기생하는 것이 무속종교이며 그 무속 종교의 핵심에 기도가 자리합니다. 그들은 큰 바위 밑이나 나무 밑, 혹은 서낭당에서 잘살고 건강하고 고통 없는 삶이 이루어지길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기도가 이런 원리에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엄청난 왜곡입니다. 무속종교는 철저히 이 땅에서의 인간 중심적인 행복입니다. 오직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부귀영화를 누리고 건강하게 잘 살 수 있느냐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본 원리가 무속과는 전혀 다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계획가운데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심을 기본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그 섭리 가운데 택한 백성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의 복을 허락하여 그를 얻은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생의 복을 깨닫고 누리는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 땅 위의 고통까지도 알고 보면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입니다.
이런 큰 신앙 원리에서 볼 때에라야 기독교의 기도도 올바르게 설명이 됩니다. 기독교의 기도는 무속과는 근본적으로 상이합니다. 무속적 기도가 인간의 욕망을 구하고 추구하는 것이라면, 기독교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무속에서는 건강한 것은 좋은 것이고 병든 것은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것만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게 가르치질 않습니다. 건강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감사할 내용이며, 또한 병드는 것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깨닫고 의지하게 되는 신앙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육체의 가시(몸의 병)가 떠나가기를 세 번이나 간구했으나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때 바울은 자기가 약한 것이 그리스도의 강함을 깨닫게 되는 계기임을 발견하였습니다(고후 12:10). 이 얼마나 상이한 태도입니까!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무속이 인간중심의 종교인 반면에 기독교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말의 의미를 좀 더 밝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는 세상만사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절대적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을 기본 전제로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되어지는 일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과 예정을 따라 진행됩니다. 다음의 에베소서는 이를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그렇다면 왜 우리는 기도를 하게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약속의 형태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하신 뜻을 이 시간 세상에 이루어 가실 때에는 언제나 약속을 하시고 그것을 이루어 가시는 방식을 취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이 에세이를 처음 쓸 때부터 강조하였던 성경의 기본 골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고 그것을 성취하시는 과정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의지하게 되는 교육적인 과정을 의도하고 계십니다. 즉 이것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는 기도의 과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해방 받아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가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어려움의 과정 없이 혹은 기도하는 과정이 없이 그냥 이루어 주신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약속의 땅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절실한 느낌을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의 실현인 약속과 성취의 과정에서 기도하게 하는 과정을 두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매달리게 하시는 섭리를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려움이 없는 직선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추격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으로 인도하십니다. 즉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날 수 없게 하십니다. 이런 상황이 모세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기도한 것은 바로 반드시 약속대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근거한 모세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 주십니다.
따라서 기도는 표면적으로 볼 때 인간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성취하시는 과정에서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을 구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을 성령을 통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게 하십니다(롬 8:26). 다음에는 주기도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만날 때 까지 주 안에서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If God is sovereign, then why do we pray? The answer is that, first, the will of God is fulfilled in the form of promise. Whenever God acts in the world, he makes promises first and then fulfills them. I have been insisting on this truth. However, in the process of covenant-fulfillment, God wants us to be aware of his power and to become dependent on him. This is the educational dimension of his plan. Prayer is a process that makes us totally dependent on his power and 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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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낫세의 패역과 회개 |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