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찾아 제2의 인생을
2월을 끝으로 정년퇴임을 하는 교장 선생님의 표정에는 고뇌가 묻어났다. 며칠 후면 교문에 들어설 수 없다는 현실이 노구를 짓누르고 회한을 일으켰으리라. 지금까지의 인생 중 반 이상을 교직에 종사하였으니 ‘교육 인생’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문득 스치는 생각 하나. ‘그 분의 교육적 삶은 어땠을까?’
바람직한 교육자상은 자신의 교육철학을 현장에서 구현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으리라. 세상은 급변하였고 그에 따라 트렌드도 수시로 변화되었으니 교육인들 예외였겠는가.
그분이 반평생을 보낸 학교는 지식교육과 인성교육을 축으로 움직여왔다. 지식교육을 거들떠보자면, 그것은 근대 공교육의 시작과 궤를 같이한다. 당시의 학교로 대표되는 공교육은 지식의 전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교사가 얼마만큼의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하느냐가 교육의 성패를 좌우했다. 그러나 교사 주도로 지식을 넣어주는 시대에서 열린 교육, 협력수업 등을 비롯한 다양한 흐름을 거쳐 ‘자기 주도적 학습’ 등으로의 패러다임 전환기를 맞이한 바 있다. 결국, 학교교육의 지식교육은 일정하게 유지되면서도 끊임없이 대안을 찾고 찾는 과정이었다.
인성교육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지식교육보다는 인성교육이 강조되고 있는 즈음이라서 무게중심이 인성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사회 부조리의 원인을 인성교육의 부재로 본다는 점에서다. 그런 까닭에 국가주도의 인성교육정책이 추진되었다. 그 실체가 ‘인성교육진흥법’이다. ‘건전하고 올바른 인성을 갖춘 시민 육성’이라는 추상적인 목적을 표방하고 있으며 교육부 장관은 5년마다 ‘인성교육종합계획’을 수립하고 교육감은 매년 시행계획을 수립하여야 한다. 당연히 학교에서는 인성교육과정을 편성·운영해야 한다. 이렇듯 교육의 시대적 핵심으로 인성교육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인성교육은 학교만의 영역이 아니다. 근본적으로는 타고나는 것이고 가정의 문화에 영향을 받으며 사회의 분위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여, 뜬금없이 인성교육진흥법이 태동한 것도 아이러니지만 인성교육을 학교에 한정시켜 탑다운 방식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마뜩잖다. 물론, 학교의 인성교육은 분명 필요하고 일정 효과도 있다. 다만, 학교에 전적으로 의지하려는 의도는 절름발이일 뿐이라는 의미다. 게다가 이번에도 미국 ‘따라쟁이’다. 미국은 1994년 인성교육을 명문화한 ‘학교 개선법’을 연방법으로 제정했다. 말하자면 법률로서 인성교육을 의무화하고 예산까지 지원토록 하는 등의 역점을 둔 바 있다. 그럼에도 미국 연방정부가 발주해 수행한 2010년 보고서에 따르면 인성교육은 실패한 것으로 인정되었지만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렇듯 학교교육의 핵이라고 할 지식교육과 인성교육은 부침을 거듭해 왔다. 교장 선생님은 이런 압축적 급변기에 교육 일선에 있었다. 완고했던 그분은 시대적 변천에 따른 교육관의 전환이 필요할 때마다 자신의 교육철학을 바꾸거나 적응해야 했을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었던 지식이 한순간에 거짓으로 판명되고, 옳다고 확신했던 덕목들이 그 가치를 상실하면서 학교교육의 유동성에 고민했을 것이다. 어제의 학생에게는 ‘A’라는 명제가 옳다고 강조하고 오늘은 ‘B'가 옳다고 말한다면 양심이 온전했겠느냐 말이다. 때로는 순수한 교육적 접근보다는 좀 더 높은 직위에 대한 의지가 발현되어 학생들에게 냉정하고 동료들과 소원한 관계도 있었을 것이다. 이는 필자가 겪었거나 생각했던 일들을 한발 앞섰던 그분도 경험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의 발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마음 편히 현실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란다. 사람에게서 무슨 선한 것을 찾겠는가. 무엇보다도 교직에 있는 동안 뜨겁게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랴. 그것으로 족한 거 아닌가. 여전히 학교교육은 지식교육과 인성교육이라는 투톱체제 아래 있다. 이제는 표리부동한 세상교육일랑 미련을 두지 마시고 ‘참’을 찾아 아름다운 제2의 인생을 찾아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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