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의 원형
14. 기독교 신앙은 사회생활을 통해 성숙됩니다.
The life of Christian faith can be matured through social life.
지난 몇 차례에 걸쳐 기독교 신앙이 삶의 전 영역에서 균형 있게 이루어짐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사회생활의 신앙적 의미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생활은 교회 생활과 비교하여 질적으로 세속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그릇된 이원론적 신앙입니다. 이 때문에 많은 경우 신앙의 기쁨을 상실하고 늘 죄의식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요즘은 남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여자들까지도 많은 시간을 사회 혹은 직장에서 보내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시간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루생활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회생활 혹은 직장생활에 대한 신앙적인 의미가 부여되지 않으면 실상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너무도 편협되고 더 나아가서 왜곡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번 말씀드린 대로 이원론적 신앙, 즉 교회당은 거룩한 공간이고 세상은 속된 곳이라는 비성경적인 사고방식은 생각보다 신앙인의 사고방식 속에 뿌리깊게 박혀 있습니다. 이는 중세 가톨릭주의자들이 만들어낸 허상입니다. 수도원이라는 특별한 공간은 영혼이 하나님을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인 반면, 세상은 타락한 육신의 삶을 보존하기 위한 세속적인 일을 하는 곳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는 성경적인 사고방식이 전혀 아닙니다. 그것의 사상적인 뿌리는 고대 헬라 철학의 영육 이원론으로부터 기인되었습니다. 즉 영혼의 활동인 이론적인 사유는 고귀하고, 육체적인 활동은 천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한 철학사조가 교회 안에 침투하게 되었고 그것은 성속 이원론, 즉 교회 일은 거룩하고 세속적인 일은 천하다는 사상으로 정착되었습니다. 교회지상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교회 안에서의 입장을 공고하게 하고 일반 성도들을 굴종시키기 위해 그러한 사유를 주입시켰습니다.
이런 그릇된 이원론을 혁파하고 일상적인 삶의 신앙적인 의미를 성경적으로 되살려 낸 사람이 바로 루터입니다. 그는 성경에서 만인제사장의 진리를 밝혀내었고 그래서 모든 성도는 하나님을 직접 섬길 수 있는 신분을 가졌다고 주장함으로써 가톨릭의 사제주의, 즉 성직자인 사제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이 비성경적 임을 밝혔습니다. 더 나아가서 루터는 교회당 안의 직분만이 성직이 아니라 구두 수선공도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직업이라고 하여 성직으로 불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교회와 아울러 세상에서의 삶이 모두 하나님을 배우고 섬기는 의미 있는 삶으로 이해되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의 사상적인 풍토와 현실에서는 일대 혁명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사회생활과 직업의 신앙적인 의미가 부여되고 이것은 구라파의 삶과 문화를 밝게 만들어 온 바탕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거룩함은 외면적인 형식이나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아래 진리와 함께 하는 내면적인 삶의 원리를 일차적으로 지칭합니다. 다시 말해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는 특정의 시간과 공간에 매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령한 깨달음을 얻은 성도가 존재하는 어느 장소 어느 시간이든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교회당, 가정, 사회 어느 곳이든지 이루어질 수 있으며, 심지어 바울과 같은 경우는 감옥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편지를 통해서 감옥 밖의 성도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는 거룩한 삶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일원론적인 관점, 즉 하나님 한 분이 모든 삶의 영역을 지배하심으로 어느 곳에든지 하나님을 배우게 되며, 또한 거룩한 삶이 이루어진다는 입장에서 볼 때, 성도의 사회생활은 매우 중요한 신앙생활의 측면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사회생활이야말로 강인하고도 실제적인 신앙의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광야와 같은 거친 사회생활에 비한다면 교회당 생활은 위로와 격려가 주어지는 일종의 안식처와 같은 곳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회생활은 교회당에서와는 다른 차원의 신앙 훈련과 신앙의 검증이 적나라하게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말하자면 교회당에서 말씀을 배우고 교제함으로 무장된 신앙이 실제로 그 힘을 발휘하고 더욱 단련되는 현장이 바로 사회생활입니다. 따라서 사회생활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배우고 의지하는 신앙생활이자 성도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행하게 되는 현장입니다.
그러나 사회생활의 신앙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사회 혹은 직장생활은 육신적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재물을 벌어들이는 속된 장소로만 인식되게 되고 따라서 그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회생활이 신앙적으로 무의미하고 지겨운 장소로 간주되기가 쉽습니다. 그렇게 인식되는 사회생활에서 신앙적인 진지함과 성실성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불신자와 다를 바 없는 무기력한 삶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도는 세상 안에서 타인과 더불어 같은 사회 혹은 동일한 직장 생활에서 재물을 벌며 살아가지만 불신자가 가질 수 없는 신앙적인 의미를 사회생활을 통해 느끼고 배우게 됩니다.
예컨대 어떤 사장 밑에서 직장 생활을 한다고 할 때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인은 사장의 눈 앞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일을 하는 자세를 취하게 될 것이고, 사장이 너그럽게 하든 혹은 까다롭게 하든 간에 하나님 앞에서 일한다고 하는 당당한 자세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사장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으면 사장의 눈가림을 위해 일하게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회생활은 단순히 재물을 버는 속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실감 있게 배우는 장소가 됩니다. 구약에 성전을 지을 재목이 예루살렘 밖의 장소, 예컨대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비바람을 맞으며 단단하게 길러져 사용되듯이 신약 시대 성도들의 신앙적 인격의 연단이 사회생활의 거친 훈련을 거치면서 키워집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사회생활은 교회생활 못지않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은혜의 손길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신앙생활의 현장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훈련시키되 척박한 사회생활 가운데서 때로는 어려움과 핍박을 받게도 하시고 또 어려운 상황에서 보호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만을 통치하고 섭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권력자와 사람들의 마음을 한 손에 거머쥐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세상의 통치 가운데 자기 백성들을 훈련시키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 성도의 사회생활은 너무도 의미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다음 만날 때까지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Our social life allows us to experience God’s grace as much as our church life. God trains us with love and sometimes through hardship and suffering in the work place, and he shows his mercy through his divine protection from evil. Remember this! God’s rule is not limited to the church. God is the Lord of the world and rules every creature on the earth, including humans. Sometimes God gives us suffering, pain, hardship, and difficulties in order to train us so we feel and appreciate his grace. We are indeed privileged to have such a God to teach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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