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의 원형
6. 기독교 신앙은 결코 고달픈 것이 아닙니다.
Christian Faith is never tiresome.
지난번까지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원천인 성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늘부터는 몇 차례 걸쳐서 성경 말씀에 입각한 올바른 기독교 신앙이 도대체 어떤 본질과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몇 차례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통념들을 지적하고 그것을 성경적으로 해명하는 일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다음 기독교 신앙의 올바른 성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 대한 중대한 오해 중의 하나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고달프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이방 종교의 신앙은 실상 고달프게 이루어집니다. 잠을 자지 않고, 밥을 굶기도 하고, 수백 번 수천 번 반복적인 정성과 고행을 통해서, 그리고 엄격한 규범과 계율을 지켜 가는 수련의 과정을 통해 신앙을 키워간다고 봅니다. 그것은 모든 이방 종교가 자신의 노력과 공로에 의해서 구원을 이루어 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단 마디로 말해서 기독교 신앙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의 복음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 결과 감격과 신령한 즐거움을 누리는 삶입니다. 만약 우리의 신앙생활이 고달프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의한 신앙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노력과 정성에 의한 그릇된 접근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참된 삶의 의미를 모르고 죄 가운데 허덕이던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복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그 소식은 우리 인생을 감격하게 할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는 변화의 원천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못 박아 죽게 하셨다가 삼일 만에 극적으로 되살게 하신 것은 어둠의 세력을 결정적으로 패배시키고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되살려 내시는 우주적인 대역전의 사건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과 사랑이 증명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끊임없는 감격의 원천으로 작동합니다. 성경 66권은 시종일관 이런 그리스도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놀라우신 사랑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이 증거 하는 생생한 하나님의 복음을 잘 깨닫기만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샘솟는 즐거움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성경은 규범적 행동을 강요하는 계율의 책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신앙생활이 고달파집니다. 성경에 나타난 율법은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오실 좋은 일의 그림자(히 10:1), 즉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복음입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 인생에게 우리의 어떤 행동을 대가로 이 세상에 속한 복을 약속하는 상업적인 거래 관계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헌금과 봉사를 한 대가로 복을 받는다면 그것은 은혜에 기초한 복음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공로에 기초하는 무속적인 기복 종교가 됩니다. 성도의 헌신과 봉사는 하나님의 복을 깨달은 결과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열매이지 그것이 결코 하나님의 복을 얻어내는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참으로 복음 종교의 변질이요 왜곡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위대한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복음의 깨달음으로부터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우선시 되지 않은 신앙생활은 고달프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가 진정으로 복음을 깨닫는다면 성도는 율법과 죄로부터 해방된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얻어진 자유와 행복은 성도를 섬기고 싶게 되는 원천입니다. 그래서 복음적인 신앙생활은 “속 중심으로부터 하고 싶어서 하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을 복음답게 깨닫지를 못하면 언제나 율법적인 규범이 성도를 지배합니다. 예컨대 “주일이 안식일이므로 반드시 교회 나와야 한다. 십일조 헌금은 성도의 의무이므로 반드시 해야 한다.” 이는 “외부적인 규범과 강요에 의해 해야 하니까 할 수밖에 없다.” 라고 하는 고달픈 신앙생활입니다.
이는 참으로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 인 것입니다. 복음을 복음답게 깨달으면 우리는 주일이 안식일이라는 규범에 의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함께 모여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경배하기를 원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들을 만나고 싶어서 가는 것입니다. 이는 너무도 즐겁고 행복한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헌금(성경은 이를 연보로 표현합니다. 연보가 더욱 성경적인 표현입니다)도 억지로 하거나 세상 복을 받기 위해 하는 것이라면 그것의 복음적인 의미를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성도의 헌금(연보)은 의무적으로 내어야 하는 세상 세금과 같은 성격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내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되는 흉물스러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연보는 고린도후서 8장의 말씀대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가난해 지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지체와 더불어 나누어 누리는 복된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의 분량만큼 자원하여 즐겨 내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이때 자원하여 즐겨 낸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신앙에 중요한 핵심인지 모릅니다.
인생은 자신을 참으로 사랑하는 대상을 위하여, 그리고 어떤 대상이 참으로 가치롭다고 생각하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신 것을 아는 만큼 우리는 그를 경배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깨달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의 수고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규범에 매여 억지스럽게 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얻어내려는 상업적인 동기와는 천양지차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붙드신 바울의 전 생애는 우리에게 이를 웅변으로 보여줍니다. 바울은 당대 기득권을 향유할 만한 자리에 있었으나 하나님의 위대하신 복음과 그의 사랑을 깨닫고는 오히려 전 생애동안 고난에 찬 삶을 기쁨으로 살아갔습니다. 이것이 신앙하는 인생의 참된 멋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모든 다른 사도들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너무도 아름다운 신앙 고백입니다. 그렇게도 많은 수고의 삶을 살았으나 바울은 그것을 “자기의 공로” 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멋진 수고의 삶을 살아가도록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진정으로 복음을 깨닫게 되면 결코 자기 자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진리 깨달음의 토대 위에서라야 우리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은 즐겁고 행복한 삶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에서의 마음의 짐과 고달픔은 이미 진정한 복음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음 만날 때까지 은혜 가운데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The demands of non-Christian religions are often burdensome. But Christian faith is different. In Christianity, redemption and salvation are gifts from God. Hence, the life of a Christian is the gift of eternal life; it is never burdensome; it is always joyful. This is the Gosp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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