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의 원형
7.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외형적인 것이 아닙니다.
The essence of Christianity is not external activities.
우리는 지난 번 기독교 신앙이 고달파지는 이유를 분석하면서 복음을 복음답게 깨달아 간다면 샘솟는 감격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을 말씀 드렸습니다.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는 점차 ‘외형적인 것을 마치 신앙의 본질’인 것으로 간주하는 현상입니다. 만약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세상에서의 보이는 성공에 둔다거나, 세상적인 기준에서의 사회정의에 둔다거나, 외형적인 교회의 크기에 두는 것은 기독교의 기독교 됨, 즉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가치와 긍지를 상실하고 오히려 세상의 상대적인 철학과 세속적인 가치관에 굴복하는 서글픈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교회의 문제 상황을 분석하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보이는 사람 중심의 파당과 분쟁’의 미숙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교회생활의 미숙은 결국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임을 고린도후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함이라
(고후 4:18)
위의 말씀은 우리의 신앙이 참으로 보이는 외형적인 차원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세계를 목적삼고 있음을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처음 시작하면서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때 자칫하면 이미 ‘신앙’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생활’을 잘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진정한 신앙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깨달아 감으로써 인격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감각적인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신령한 세계의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성경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그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은혜의 섭리를 우리 삶의 전 영역을 통해 발견하고 느끼는 삶입니다. 그것은 평생토록 깊어질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런 내면의 신앙에 대한 진실한 고려와 관심보다는 외형적인 일이나 생활 자체로 무게 중심이 옮겨지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중세교회 당시 타락의 징후가 어떻게 드러났습니까? 하늘을 찌르는 웅장한 예배당 건물들, 드높아 가는 사제들의 무소불능한 권위, 치밀한 조직적인 교회 제도의 운영, 이런 찬란한 외형적인 것 들 안에 참된 내면의 신앙은 오히려 퇴색하고 영혼들은 억압을 받았습니다. 16세기의 종교 개혁은 그러한 외형적인 허구를 진리의 눈으로 꿰뚫어 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의 내면적인 신앙의 세계’를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외형적인 일이나 교회의 아름다운 제도의 운영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일차적으로 진리의 회복이면서 동시에 외형적인 교회 제도의 개혁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러한 ‘외형적인 일이나 교회제도’들은 어디까지나 ‘보이지 않는 신앙의 형성’만큼 따라 나오는 것이라는 점을 제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외형적인 일과 생활, 그리고 교회의 제도적인 운영은 실상 우리의 신앙의 내면이 만들어 내는 결과이면서, 동시에 우리 신앙을 키우기 위한 교육적 방편이라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외하는 신앙’을 키우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고 그러한 ‘드러나는 일이나 교회 제도의 운영’은 그를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 점은 기독교적 신앙의 본질을 파악하고 바르게 성장하는데 있어서 너무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게 하고 교회를 세워 가는 일을 하게 하십니까? 만약 우리가 외형적인 일 중심의 사고방식에 매여 있다면 그것 자체가 우리 신앙의 지상목표가 되어 버립니다. 외형적인 일들, 즉 복음을 전파하는 일, 예배당을 짓는 일, 당회, 노회, 총회등 교회의 제도를 운영하는 일등은 모두 그것 자체가 결코 궁극 목적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궁극 목적이라면 우리는 ‘하나님’ 보다 ‘일이라는 우상’을 섬기게 되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들은 모두 이 땅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의지하게 하는 교육적 방편들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사용하셔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교회를 세워가도록 섭리하시는 목적은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무궁하신 영광을 드러내시어 우리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신앙을 키우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우리 성도들을 이 고난 많은 땅에 두시고 연단도 시키시고, 또한 교회 일들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경외하게 하시는, 즉 한마디로 신앙하게 하시는 섭리의 궁극적인 목적을 잃어버리면 이 땅의 보이는 일들을 목적으로 삼아 이른바 ‘외형적인 일이라는 우상’을 섬기며 살아가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일의 성격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 6:28)” 예수님의 대답은 외형적인 어떤 일을 예상하던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달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이는 진정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으로 ‘드러난 일과 보이는 차원의 외형’에 매여 있기 쉬운 우리 인생들의 허탄한 사고방식을 근본에서부터 흔들어 놓는 비수와 같은 말씀입니다.
주일날 교회 잘 참석하고 헌금 열심히 하고, 심방하고 봉사하는 일, 교회의 각종 회의의 운영 등. 그러한 일들은 신앙이 무르익어 가면서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외형적인 일 이전에 얼마나 하나님을 알고 의지하는 신앙의 인격이 가꾸어져 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위의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의 진정한 일은 이런 내면적인 신앙의 성숙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무슨 외형적인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이 말씀의 능력에 의하여 새롭게 변화하는 과정을 중시합니다.
신앙의 내면이 성숙되지 않고 이루어지는 외형적인 일들은 언제나 자기 자랑의 근거거나 지체간의 갈등의 요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신앙의 내면이 어린아이와 같다면 유치하고 미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신앙의 본질은 일차적으로 외형적인 일 보다는 우리의 신앙의 내면을 중시하고 건실하게 가꾸어 가는 일입니다. 이점이 분명하고 확고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이 빗나갑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당당함을 잃고 언제나 남의 눈치와 평가에 연연하는 고달픈 삶이 됩니다. 역사적으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복음을 깨닫고서는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서’라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갔습니다. 그 신앙의 기개가 서구교회에 아직도 남아 있어서 이들은 자신의 일에 당당하고 사람의 눈을 그리 의식하거나 눈치 보지 않습니다. 성경적인 참된 신앙은 언제나 외형과 사람의 평가보다는 내면과 하나님의 눈을 더욱 의식합니다. 다음 만날 때까지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If we evaluate Christianity on the basis of externally visible achievements, we completely miss the point. Our visible activities for the church are both the result and the cause of our inner life of faith. Our activities then are only means to further the growth of our faith and God’s glory. If we work hard without knowing why, then we may end up worshiping our work and not God.
The quality of our faith does not depend on the quantity of visible service for the church but the extent to which these activities help to enrich our inner life of faith.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
출애굽 시대의 이해 |
가치에 의한 판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