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제1권 제1장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지식의 상관관계
칼빈은 「기독교 강요」 1권에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주제로 하여 논증한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되어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 존재하고 섭리되기 때문에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동감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본질을 증거하기 위한 주제로는 부족한 점이 있어 보인다.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한 주제는 창조와 섭리 그리고 종말을 포괄해서 총칭할 수 있어야 한다. 칼빈이 선정한 제목은 창조주에만 편중된 면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용어가 필요하다고 본다.
1권의 내용은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하고 창조주의 사역과 섭리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자연계시에 의해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하지만, 하나님을 완전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특별계시로 주어진 성경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 다음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논증한다.
1권의 구조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본 단원에서 좀 더 심층적으로 접근해야 될 신학적인 주제는 인간의 종교성과 성경의 진리성 그리고 삼위일체와 작정론적 섭리론에 관한 내용이다. 이 주제들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민감한 부분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전통적으로 계승된 교리적인 이론만 답습하는 실정이다.
각 주제의 이슈는, 종교성에 관해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스스로 인지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관건이며, 성경의 진리성에 대해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빙성에 대한 증명이 문제이고, 신학적인 숙제로 여겨질 만큼 난해한 삼위일체론은 수(數)와 시간 그리고 형상을 초월한 영원의 개념과 수로 표현되는 피조세계 간에 존재하는 언어개념상의 차이의 문제이며 작정론적 섭리론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죄에 대한 책임공방이 난제이다.
위의 과제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쉽게 접근해서도 안 되며, 단편적인 주장이나 편견으로 규정지으려 하거나 역사적인 전통과 교리만을 고집해서 단정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본서에 대한 분석은 전체를 이해하려는 총체적인 시각에서 확립된 구조로써 신학적인 주제들을 명확하게 재정립하려는 것이다.
칼빈은 1장에서 1권 전체의 주제가 되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규명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하나님과 인간을 관련지어 놓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의 자기 지식에 대해서 설명한다. 인간의 참된 지식은 하나님과 인간을 아는 것이며,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선행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빈의 논조는 주술적이며 맹신적인 신앙보다는, 우선순위는 불분명하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정체성을 먼저 파악해야 된다는 점에 비중을 두고 있다. 이와 같은 칼빈의 견해는 하나님과 인간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식’의 역할이 막중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성도들을 유린(蹂躪) 했으며, 철학적 이성에 기초한 인본주의 사상과 우상숭배의 형태로 몰락되었다. 하나님보다는 교황이 절대군주의 자리에 앉아 백성들을 지배하였으며, 백성들은 인간 본래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칼빈의 신(神)지식과 인간의 자기이해에 관한 사상은 당시의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건전한 신앙관과 성도생활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공헌하였다.
칼빈은 지식의 종류를 크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의 자기 이해라는 도식으로 분류한다. 그러면서도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방법 면에서는 다음과 같이 모호하게 말한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혜, 즉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거의 모두가 두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으니,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두 지식은 갖가지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중 어느 것이 먼저 오며, 또 어느 것이 그 뒤에 결과로 따라오는 것인지를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우리를 자극시켜 하나님을 찾도록 해 줄 뿐 아니라, 말하자면 우리를 손으로 이끌어 그를 발견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칼빈은 소제(小題)에서도 첫 번째는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향하게 함’이라고 표기하고, 두 번째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 자신의 진면목을 깨닫게 함’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칼빈의 주안점은 하나님과 인간의 자기이해라는 ‘지식’에 있다.
하지만 이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은 인간의 자기이해가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전제해야만 인간의 자기 이해가 가능하다. 그 이유는 인간은 상대적인 존재이므로 상대적인 관계에서는 인간의 정체성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본질을 수(數)와 실험에 의한 산술적인 수치나 과학적인 잣대로 분석한다면 어떻게 인간의 생명을 정의할 수 있겠는가. 상대적인 판단이란, 학창시절에는 성적표에 의해서 평가를 받는 것이며, 사회에서는 사회적 활동이나 직급 또는 경제능력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나는 부모 앞에서 자식이 되지만, 자식들 앞에서는 부모가 된다. 또한 나보다 약한 사람 앞에서는 강한 자이지만 강한 사람 앞에서는 약한 자로 변모된다. 이와 같이 인간은 상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분석과 실험, 통계로 판단하려는 것은 오판이다. 인간은 상대방이나 환경에 따라서 자신의 위치나 상태 또는 신분이 변화되기 때문에 상대적인 관점에서는 인간의 본질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다. 어느 누가 자신을 이해하거나 혹은 인간의 정체성을 바르게 정의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라고 말했다. 즉, 인간은 자기들이 정한 표준에 따라 자기를 평가하고 비교하기 때문에 동류끼리 자신을 분류하거나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이다. 피조세계의 모든 것은 정함이 없어 모든 것이 가변적이므로 인간의 자기이해란 과학적이거나 사회적, 종교적이거나 윤리적인 잣대로는 불가능하다. 인간은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만 확실한 자기분석과 이해가 가능하다. 칼빈은 후반부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자기 자신의 진면목을 깨달을 수 없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편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서 거기서부터 내려와 자기 자신을 살피게 되지 않고서는 절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할지라도, 올바른 가르침의 순서가 있는 법이므로, 우리는 전자를 먼저 다루고 그 다음에 후자를 다루도록 할 것이다.
칼빈의 주장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우선되어야 인간의 자기 지식을 확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신학적인 관점에서 정리하면, 참된 지식습득의 과정은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인간의 자기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 불변적인 공식이다. 이유는 첫째, 창조주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지만, 피조물 인간은 하나님을 힘입어야 생존할 수 있는 피동적인 존재이다. 즉,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생기(生氣)를 공급받아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인간의 본질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둘째, 하나님은 절대자이시지만 인간은 가변적인 모든 것과 연관된 상대적인 존재이다. 즉 하나님은 상대자 없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절대자이지만, 피조물인 인간은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만물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자기이해가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셋째, 하나님은 계시를 목적으로 만사와 만물을 창조하셨고 섭리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목적도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찬양하는 데 있다. 따라서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수단이기 때문에 주체이신 하나님의 섭리목적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본성과 존재이유를 알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인간을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살펴본 바대로 인간은 스스로가 자기를 발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만 자기를 확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다.
시가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역사 섭리를 인식하고 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속성과 인간의 속성을 대비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욥기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통해서 욥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한다. 시편 기자들은 언약대로 구원을 이루시는 여호와의 성실하심을 노래하는 반면에 인간의 변덕을 증거한다. 솔로몬은 잠언에서 언약대로 나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성을 노래하는 반면에 인간은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철저하게 하나님께 종속된 존재임을 아들에게 충고한다. 전도서는 해 아래 피조세계의 유한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노래하면서 인간세계의 한계를 피력하고 있다. 아가는 솔로몬의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노래하는 반면에 인간의 타락성을 증거한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기이해는 철저하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깨달음으로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결과임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칼빈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은 전적으로 동의 하지만 신(神)지식에 대한 신학적 의미는 좀 더 보완해야 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첫째, 칼빈은 지식의 중요성은 강조했으나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상에 있어서 순서가 모호했다. 물론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우선성을 강조했지만, 앞에서 말한 인간의 자기지식을 정립하는 과정은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첫째, 인간은 상대적 존재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의 자리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없다. 솔로몬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이라고 증거한 것처럼 인간의 자기발견은 지식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작정하셨으며, 모든 것을 미리 아시며,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사를 섭리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피조물인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야만 인간의 주제를 바로 알게 된다.
둘째, 지식의 대상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는 데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 반면에 인간의 정체성을 하나님과 대등한 관계 속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무리였다. 종교란 최고의 가르침으로서 그 가르침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이방종교는 인간들이 조성해 놓은 각 나라의 문화와 관습, 경험의 토대에서 쌓여진 자기 기준의 지식을 갖고 신을 찾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종교의 신은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을 바탕으로 인간들이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하다. 오늘날 기독교의 틀 안에서도 보편구원관에 기초한 종교다원주의가 성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을 왜곡한 인간본위의 종교가 만연되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필요와 요청에 따라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셋째, 칼빈은 지식의 필요성을 인간의 자기 발견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지식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계시하려는 데 근본적인 의도가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 필요조건인 신지식은 인간의 자기 발견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발견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는 창조의 목적과 결부되며 인간의 존재목적에 부합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자기이해는 인간의 독자적인 연구나 상관관계를 통해서 습득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자기를 발견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은 인간관계가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인식한 결과이다.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인간의 자기발견이나 구원 또는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광’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기록목적이나 피조세계의 창조 그리고 역사 섭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계시를 근본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어느 한 부분이라도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목적으로 존재하거나 운영되어서도 안 되며 운영할 수도 없다. 인간의 자기이해란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게 될 때에만 가능하다.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
제1권 제2장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의의와 목적 |
성적 쾌락과 도덕적 인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