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09-06-08 17:5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제1권 제2장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의의와 목적


칼빈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린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어떤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과연 우리에게도 어울리며 하나님의 영광에도 합당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가를 깨닫는 것이라 하겠다. 사실 제대로 말하자면, 신앙이나 경건이 없는 경우에는 거기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고 말할 수 가 없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지는 유익도 함께 이해해야 된다는 뜻이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경건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알 지 못한 결과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알면 성도들의 삶에 변화가 발생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어떤 식으로든지 이바지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연이어 하나님을 자각한 성도들의 삶의 태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고 그에게 구하고 기다리기를 배워야 하고, 또한 우리가 받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그에게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권능을 이렇게 감지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경건을 -여기에서 신앙이 샘솟아 난다- 가르쳐 주는 적합한 선생이 되는 것이다. “경건”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이 베푸시는 온갖 유익들을 아는 데서 생겨나는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그를 향한 사랑이 하나로 결합된 상태를 뜻한다.
순결하고 순전한 신앙이란 바로 이것이니, 곧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진지한 두려움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이 두려움으로 인하여 기꺼운 공경심이 나타나고 또한 율법이 제시하는 정당한 예배가 생겨나는 그런 것이다.

  칼빈의 이론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마음가짐부터 바르게 가져야 하며,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며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는 의미로 요약된다. 이러한 마음가짐과 보답의 자세를 합하여 경건으로 규정하며, 경건생활은 하나님을 인식하는 촉진제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발생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순수하고 진실된 종교에 대해서는 엄숙한 두려움을 갖고 하나님께 묶인 신앙인데 여기서 두려움이란 자발적인 경외와 율법에 명한 경배 등 두 가지를 다 포함하는 것이라 말한다.
  칼빈의 인식론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 그리고 경건생활로 정리되며,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라 말한다. 칼빈의 사상은 철저한 신앙과 예배생활을 강조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단,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본질과 중요성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과 생활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성경신학적인 재조명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성경신학적인 관점에서의 근본적인 의미를 일원론적인 체계로 정리해 본다.
  첫째,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존재와 속성 그리고 사역을 인지하는 것이지 단순하고 표면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단순히 ‘자각(自覺)’이란 용어로 처리하고 본래적인 신지식(神知識)의 의미보다는 결과에 치중하여 전개하고 있다. ‘하나님을 안다’라고 했을 때는 하나님의 기능적이고 사역적인 측면보다는 본질과 존재 자체에 대한 인식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알다’(know)라는 말은 구약의 히브리어 야다([d'y:)이며, 이해한다는 뜻으로서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창4:1)는 완곡어법에서 남녀 쌍방의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배워서 알다(know by learning)라는 의미도 지닌다. 신약에서는 헬라어 기노스코(ginwvskw)이며, 구약의 ‘야다’와 같이 “~와 성적인 관계를 가지다” 또는 “아이를 낳다”와 관련되어 있으며 ‘확인하다, 입증하다, 확증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 단어는 상대방의 외형적인 모양이나 체형 또는 신상을 파악한 정도가 아니라 부부의 관계처럼 완벽한 인지(認知)를 뜻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인지한다는 말은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현상을 이해하고 통찰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면을 이해하는 것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종교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하고 확신했을 때 총체적인 인식이 가능하다. 그런데 칼빈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지식의 깊이를 취급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을 자각한 결과에 따른 경건과 예배의 과정에 비중을 두었다. 다시 말하면 칼빈은 ‘하나님을 자각해야한다 그리고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신지식과 성도의 경건생활을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해서 보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합당한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단순히 지식 그 자체의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능력과 운동력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에 인식하는 만큼 사상과 행동에 실제적인 변화를 촉발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증언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지식은 이론에만 치우치지 않고 이론과 실제가 하나의 원리로서 균등하게 병행하는 완벽한 진리체계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성도의 생활은 각기 다른 차원에서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성도의 생활은 일원론적으로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말씀의 운동력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 깨달음과 행동이 각기 다른 차원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칼빈은 성도의 생활을 강조하기 위해서 ‘경건’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는 원인이 되며 은혜를 알았으면 보답해야 된다는 등식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즉, 인간이 경건한 태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그런 다음 반드시 은혜에 대한 보답을 하는 것이 참된 성도의 생활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조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영역과 능력 그리고 역사(役事)의 범위를 축소시키는 것이다.
  성도의 생활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정비례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70%로 인정하면 그만큼의 행동이 나오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성도의 생활이나 행동 원리의 핵심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지, 어떤 수단이나 기술적인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가르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빠른 시간 내에 어떤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들도 성도들의 생활과 행동 자체에 관심을 두며 행동교정이나 생활의 변화를 위한 노력을 한다. 성도들의 변화는 교훈적인 설교나 선동적인 간증 또는 즉흥적인 감정유발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만 올바르게 가르치면 하나님에 대해서 깨닫는 만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되어 있다.
  흔히들 믿음과 행위라는 표현을 쉽게 사용하고 있지만, 믿음과 행위라는 어법은 ‘과’라는 접속사가 의미하고 있는 것처럼 그 범주가 각기 다른 차원이란 뜻이다. 흔히들 믿음은 좋은데 행동이 그렇지 못하다는 말을 쉽게 사용하는데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용법이다. 믿음과 행동, 신앙과 생활은 각기 다른 이중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체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믿음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은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성경이 진리로서의 구성과 효능에 문제가 있음을 자인하는 것이 된다. 성경 진리는 이론만 무성하거나 아니면 경험만을 중시하여 한편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실제가 하나로 되어 있는 말씀이다. 성경은 성도의 성숙한 변화를 성령‘과’ 열매라 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로 표기한다. 예수께서도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고 증거했다. 이 말은 나무와 가지 그리고 열매의 관계를 유기적인 체계에 의한 하나의 일체감을 확실하게 설명한 것이다. 믿음과 행동이나 신앙과 생활이란 용어는 이분법적인 어법이지만, 믿음의 행위나 성령의 열매라는 표현은 나무와 가지 그리고 열매의 구성처럼 유기적이며 일원론적 체계로서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타당한 용어이다.
  그리고 보답(報答)이란 용어는 은혜를 갚는다는 뜻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성도들이 어떻게 갚을 수 있겠는가? 물론 칼빈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이런 말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갚아야 하는 의무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베푸신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며 사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은혜를 베푼 대가를 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엄청난 부담이 될 것이다. 보답이란 용어를 꼭 사용한다면, 보답은 규범에 따른 의무이행이 아니라 은혜 인식의 결과로 나타나는 감격에 의한 자연스런 행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報答)’한다는 용어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동하며 누리는 생활’이 적합하다고 본다.
  셋째, 칼빈은 하나님을 자각한 성도들은 두려움으로 경배하며 율법의 명령에 순복해야 된다고 말한다. 칼빈의 주장에서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경배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속성과 율법에 대한 부분을 오해한 결과인 것 같다.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를 통해서 그 분의 자녀 된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평안과 기쁨으로 찬양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보다는 사랑과 미움이나 축복과 저주 또는 상급과 채찍의 상반된 인식체계로 이해한 것 같다.
  보편적인 종교관은 신(神)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로 정의한다. 하지만 성경신학적인 종교관은 지존하신 하나님을 배우며 깨달아 그의 영광을 발견하고 찬양하는 성도들의 삶의 체계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은 찬양이며, 찬양은 기쁘고 즐거운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비록 실수와 범죄가 있다하더라도 하나님을 바로 알고 은혜의 깊이를 깨달으면 두려움보다는 기쁨과 평안이 내면에 자리한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증거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바울이라 할지라도 두 마음을 갖고 때로는 실수와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실에 대해서 오히려 감사함이 넘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다. 실수한 인간이 죄책감에 사로 잡혀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선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한다. 대가(代價)란 상대적 관계에서 노력이나 희생을 통하여 얻게 되는 결과로서 조건적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은혜는 아무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베푸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의(義)의 옷을 입은 자들은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면서 은혜의 영광을 기쁨으로 찬양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 솔로몬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라고 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신(神)인식의 결과로서 지식은 지혜에 기초한다.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작정하신 뜻을 따라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언약하신 말씀대로 만사만물을 섭리하시는 총체적인 경륜에 대한 이치를 깨닫고 선악을 올바르게 분별할 줄 아는 재치 있는 마음의 상태이다. ‘지식’은 창조세계에 살면서 직접 경험하고 만져보고 얻은 것을 뜻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와 지식의 결과로 나타난 성도의 생활이며 인간의 본분이다. 이 일을 위해서 솔로몬은 아들 르호보암에게 지혜와 지식을 훈계한 것이다. 이러한 지혜와 지식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원리이며 방법으로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주지주의(主知主義)적인 이론에 머물지 않고 전인적으로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경외하는 목적에 대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일목요연하게 기술했다.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더 구체적인 진술과 성경신학적인 개념정리가 보충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하나님을 알아야한다는 신학적인 명제는 당연하고 또 매우 중요한 과제이며 칼빈의 신학사상의 출발점이다.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한 한국교회는 이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되며 깊이 있는 연구와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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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제3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선천성(先天性)
제1권 제1장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지식의 상관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