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7-10-17 19:3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새로운 신학은 되는데 기독교가 될 수 있을까?


신학을 전개할 때 자주 듣는 말 중에 당황스러운 말 중 하나는 “창조적 신학”이다. 과거 내용을 답습하고 반복하는 신학 행위를 창조적 학문이 아니라고 평가하고, 새로운 내용을 발표할 때 가치를 인정해주는 풍토가 신학에 만연한 것이다. 필자는 신학에 두 종류를 제안한다. 첫째 새로운 이론을 창안한 ‘새(新) 신학’과 둘째 믿음의 대상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과 교회를 세우는 ‘옛(舊) 신학’이다. 
바르트의 신학이 크게 유명한 것은 새 신학(New Theology)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것을 믿는다(전 1장). 그런데 바르트의 신학은 새 신학이라고 하고, 큰 가치를 두어 평가한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의 새로운 견해를 따를 것인가? 과거의 공교회의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라고 질문을 하고 있다. 바르티안들이 자기들은 바르트를 추종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치 싯달타의 제자들이 ‘석가모니(釋迦牟尼, BC 624~BC 544)’를 신(神)으로 숭앙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 굴레 안에 있는 것과 유사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부처님 손바닥이듯이, 신학계에서 바르트를 넘어서는 것은 상상에서만 가능할 정도이다. 바르트의 사상은 탈-기독교를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제종교까지 통합시킬 수 있는 위력이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사상은 넘을 수 없으며 저항할 수만 있다. 가장 영향력 있는 개인 신학자의 견해를 거부하고, 공교회의 교리(Dogma)에 서 있는 옛 신학으로만 저항할 수 있다. 이 싸움은 진리의 싸움이 아니다. 진리는 이미 확정되었고(정통신학), 진리를 거부하는 개인(신-정통신학)과 확정된 진리를 지키는 공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와의 싸움이다. 교회에서 한 개인이 죄사함과 영생을 부정하거나 제외시키며 새로운 신학을 창조할 수 있겠지만, 죄사함과 영생의 복음의 교회 신학과 같을 수가 없다. 
정통 교의(Dogma)는 “삼위일체(325년 니케야 공회의,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와 그리스도 양성 교리(431년 에베소 공회의, 451년 칼케돈 공회의)”이다. 칼 바르트는 공교회의 두 교의를 재해석하여 개인 자격으로 새 신학을 제안했다. 바르트 신학에 정통 신학 용어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이다. 바르트 신학에 정통 신학 용어가 그렇게 많이 등장했는데, 답습이라고 하지 않고 새 신학이라고 한다. 그것은 모든 정통 교의를 재해석, 재배열하여 공교회 신학과 다른 신학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이 과거를 답습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할 수 있다. 기독교 신학의 용어를 반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믿음의 선진들의 영적 세계를 재현하거나 구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반복 혹 답습한다는 것은 동등(同等)을 이룬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옛날보다 더 세속화되었기 때문에, 과거 믿음의 선진들의 영적 세계를 쉽게 이를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동료들에게 고대 교의를 쉽게 이해하고 파악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요구한다. 누구도 교의를 이해할 수 없다. 신경 작성자들도 이해한 것을 문서로 작성하지 않았고, 구원을 위한 고백 문장이다. 그래서 결국은 과거를 답습할 수 없다.
‘학(學, scientia)’이란 ‘검토와 검증이 가능한 것’이다. 바르트는 교의학을 교회에서 진행하는 학으로 분류한다. 바르트에게 학과 교의학은 방법과 전개에서 차이가 없고, 다만 장소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독일 사회가 기독교 사회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큰 충격이 없지만, 기독교 사회가 아닌 선교지에서 바르트의 이해는 적지 않은 혼동을 초래할 수 있다. 바르트의 견해대로 한다면 교의학을 탐구하면 교회를 게토로 만든다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교회와 세상의 장벽을 허무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을 허물었다면, 바르트의 신학은 교회와 세계의 장벽을 허문다. 복음으로는 교회를 세우지만, 바르트의 신학으로는 교회를 허문다.
기독교의 신학은 검증 가능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이루는 지식 체계’이다.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인식한 것은 학(學)적 검증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그리스도인으로 인식하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신학은 만인의 학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 제한된 학문이다. 메이천은 <기독교와 자유주의>에서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죄사함이 없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임마누엘(Immanuel, God with us), “함께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을 추가했다. 그래서 바르트에게 임마누엘은 “죄인과 함께하는 하나님(Immanuel, with us sinners)”이다(§4. 삼중적 형태에서의 하나님의 말씀, 2.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KD., I/1, 111. 박순경 번역, 150-151쪽). 
바르트는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를 거부하고, 믿음의 유비(analogia fidei)를 제안했다. 바르티안은 바르트가 존재의 유비를 거부한 것과 믿음의 유비를 탁월한 것으로 인정한다. 고대 교의는 존재 유비를 근거로 교의 체계를 구성한 것이 아니다. 믿음의 대상과 죄사함의 도식이 무너지지 않은 방향으로 교의를 구성한 것이고, 그 목표를 위해서 존재의 유비를 사용한 것이다. 고대 공의회가 모인 참석자들이 이해 방식으로 교의를 작성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교의는 믿음을 이루기 위한 고백이지, 이해를 수립하는 문장이 아니다. 한 믿음 고백을 위한 교의가 이해되지 않는다기에, 이해되는 형태로 새롭게 바꾸는 것은 기독교를 해체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자유’와 ‘믿음의 유비’로 고대 교의와 성경무오 사상을 해체시켰다.
바르트는 학문 원리를 그대로 신학에 적용한 것이다. 검토와 검증이 가능하고, 반증이 가능한 체계를 구축했다. 그 원리에 따라서 유력한 신학자들이 활동했고 활동하고 있다. 몰트만, 판넨베르크, 알리스터 맥그래스 등이 있다.
필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한다(요 1:12-13). 유럽과 영미의 유력한 신학자들의 견해를 거부하는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어떻게 산골소년이 대신학자들을 평가하고 거부할 수 있는가? 나는 내가 드러나도록 신학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증거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적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부정하거나 깎아내리는 신학이 교회에 있다면 거부하고 배척한다. 예수의 이름이 낮아지는 곳에서 찬사를 보내고 함께하는 것은 불신앙이고 배도이다. 그리스도인은 본성적으로 교회와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소홀하게 대접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고대 교회의 큰 쟁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본체(homoousion)로 고백했고, 한 위격에 두 본성(Anhypostatia, duae naturae una persona)으로 고백했다. 이 교의에 교회는 세워지고, 이 교의를 부정하면 교회는 무너진다(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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