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계시의 개념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2, § 16. Die Freiheit des Menschen fur Gott(KD I/2., 222, GG., 260, CD., 203)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자유”(신준호)이다. 첫째 “성령,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Der Heilige Geist die Subjektive Wirklichkeit der Offenbarung, GG., 260)으로 진행한다. 바르트는 성령 부분에서 처음 정보를 재론하면서 논리를 진행한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는 좀 더 꼼꼼한 독서를 진행하려고 한다.
바르트는 계시의 개념(Begriffs der Offenbarung)을 제시한다. 바르트가 수없이 말하는 것이 계시인데, 바르트가 말하는 계시는 개혁신학이 말하는 계시와 전혀 다르다. 계시 이해는 종교개혁 이후 신학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우리는 대표적 계시 이해로 계시연속주의와 계시충족주의(단절주의라고 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로 구분시켰다. 은사중지론(cessationism)과 은사지속론(continuationism)으로 말하기도 한다. 바르트는 은사지속론(계시연속주의)이고, 개혁신학은 은사중지론(특별계시적 은사의 중단, WCF 1장)을 견지한다.
바르트는 자기의 교회교의학(kirchlichen Dogmatik)이 성서의 척도와 과거의 교회적 교리들을 존경한다고 했다(Maßgabe der heiligen Schrift und unter Respektierung des kirchlichen Dogmas verstanden werden muß, KD., 222: GG., 260). 바르트가 말하는 교리들(Dogmas)의 범위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는 교리(Dogma)가 아니라, 개인의 진술로 보아야 한다. 교리(Dogma)는 규범적 문서이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은 “스스로 계시하는 신(dem Gott der sich offenbart)”을 근거한다. 스스로 계시하는 신이 출 3:14을 근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출 3:14(ἐγώ εἰμι ὁ ὤν)은 하나님께서 자존자이시며, 자기 이름을 계시하는(알려주시는) 부분이다. 그 이름(하쉐임, YHWH)을 이스라엘 사람이 잃었다.
바르트는 성경을 계시 증언(경험) 기록으로 본다. 그리고 동시성의 원리(Gleichzeitigkeit)를 갖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공간과 현재 공간의 차이점을 두지 않는다. 김영한은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동시성(Gleichzeitigkeit)이다. 동시성이란 2천년 전의 예수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와 현재 동행하신다는 것이다. 과거가 현재 속으로 들어와 과거가 지나간 시간임을 그치고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 동시성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성이다”로 제시했다(김영한, “신자의 매일의 삶 속에 동행하시는 그리스도 (I)”, <크리스천투데이>, 2013.07.09.). 바르트가 말하는 공허한 공간(leeren Raum)은 계시의 현실성이 발생하지 않은 상태이다. 공허한 공간에 계시가 발생하면 사건(Ereignis)이다. 이때 바르트는 신이 자기를 계시하는(in welchem sich Gott als Gott offenbart) 사건으로 제시했다. 세 번째로 이 사건이 인간에게 향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에게 계시되어진 신(Gottes Offenbarsein für uns)”이라고 했다. 바르트의 기본적 계시 구도는 계시자, 계시내용, 계시사건(계시됨)(Offenbarer - Offenbarwerden – Offenbarsein)이다. 바르트는 계시의 주체(Subjekt der Offenbarung)는 스스로 계시자(selber der Offenbarer)이며, 스스로 계시 행동(selber der Akt seiner Offenbarung), 스스로 계시됨(selber sein Offenbarsein) 된 삼중적 인식(dreifache Erkenntnis von dem Gott)으로(GG., 260) 반복해서 설명했다. in der Lehre vom Vater, Sohn und Heiligen Geist in ihrer Einheit und Dreiheit, Dreiheit und Einheit. Lehre를 신준호는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 체계(Lehre, doctrine)로 말하고 있다. 바르트가 제시하는 “일성(一性)에서 삼성(三性)과 삼성(三性)에서 일성(一性)”(번역자는 ‘삼위성’으로 번역했는데, threeness에는 ‘위’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의 체계는 바르트가 어거스틴의 표현(한 실체에 세 위격, una substantia tres presonae)을 이용한 것이다. 바르트의 신 개념에는 실체 개념이 없고, 인격 개념은 단일인격인데, 실체적 인격이 아니라 발생하는 사건으로 규정했다.
바르트는 두 번째 삼위일체론에 대한 질문에서(Trinitätslehre mußte die zweite Frage), 반복하는 어휘, 현실성, 계시의 현실성(Wirklichkeit der Offenbarung von Gott)에 관한 질문을 제기했다(GG., 260). 바르트는 계시의 현실성을 그리스도론, 말씀의 육화 교리(Lehre von der Fleisch - werdung des Wortes)에서 다루었다. 바르트는 그 부분을 계시의 객관성으로 내용을 전개했다. 영어 번역에서는 incarnation(성육신)이라고 번역했는데, “말씀의 육화 교리”와 “성육신 교리”는 엄격한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 바르트의 계시의 현실성의 육화는 동시성 원리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 체계를 구체적으로 공식화한 학자가 칼 라아너(Karl Rahner)이고, 그는 존재통보(Gottes Selbst-Mitteilung, God's Self-Communication)로 육화 교리를 체계화시켰다.
그리고 다음 세 번째 질문에서는 계시의 주관성으로 전개하려고 한다. 바르트는 이러한 전개가 독립적으로 제기되고 답변해야 한다(selbständig zu beantworten)고 제시했다(GG., 260). 바르트가 앞에서 삼성과 일성, 일성과 삼성으로 교차 진술하면서도, 독립적 답변을 추구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적인 내용과 기독론적 내용과 독립된 대답을 전개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natürlich im strengsten Zusammenhang sowohl unserer trinitarischen als auch unserer christologischen Untersuchungen - selbständig zu beantworten, KD., 223: GG., 261). 바르트는 our trinitarian과 our christological inquiries라고 한다. 바르트가 제시하는 ‘우리’는 바르트가 규정한 개념(Begriffs der Offenbarung)이다.
필자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해설에서 ‘우리’라는 진술에 대해서 지적한 사람이 있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서 ‘우리’를 사용했다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합당하게 존중하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될 것이다. 신학에서 ‘우리’는 한 공동체적 소개가 아니라, 합당한 권위 아래에 있는 권위자가 사용하는 어법이다. 바르트가 서 있는 근거가 되는 권위는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바르트의 제시로 보면 “스스로 계시하는 신”이 될 것이다. 정통신학의 근거는 사도 베드로께서 예수님을 예수님 앞에서 증거한 고백이다(마 16:16).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진술을 듣고 그 진술의 기원을 아버지라고 밝히셨다(마 16:17). 바르트는 예수를 계시의 현실성의 구현자로 규정하고 있다. 바르트가 진술한 문장의 기원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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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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