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3-11-21 21:4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종교를 지양하고 계시로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2』, § 17의 제목은 “종교의 지양으로서의 하나님의 계시”이다. 우리가 신학자의 사유를 익힐 때에 중요한 것은 신학자가 사용한 어휘 개념을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는 바르트가 사용하는 ‘계시’라는 어휘도, 우리가 사용하는 ‘계시’ 어휘와 개념이 같지 않음을 제시했다. 우리는 계시를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누는데, 칼 바르트는 계시를 한 계시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자연계시를 부정하고 특별계시를 인정하는 것처럼 이해하기도 하는데, 바르트의 계시 이해는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를 구분하지 않는 한 계시이다. 그래서 죽은 개, 러시아 관현악단의 연주 속에서도 계시가 발생할 수 있다. 에밀 브루너는 자연에 계시가 있다는 것이고, 칼 바르트는 계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발생한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은 계시의 신학이다. 슐라이어마허가 종교를 절대의존감정이라고 규정한 것에서, 바르트가 종교를 계시로 전환했지만, 슐라이어마허의 그늘 아래 있다고 평가한다. 그 이유는 계시와 종교감정이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절대의존감정이 발생되는 현상이 계시의 현실성이 된다고 연결한다.

바르트는 § 17에서 본격적으로 종교의 지양을 구현하고 있다. 우리는 § 17.1 “신학 안에서의 종교의 문제”에서 종교를 지양하고 계시로서의 종교를 세우려는 바르트의 의도를 보았다. 바르트가 말하는 종교는 무엇일까? 독자 제위는 종교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독자가 개념화한 종교와 바르트가 정의한 종교를 비교해보아야 한다. 바르트가 반면교사라고 한다면, 자기 개념과 동일할 때는 자기 개념을 깊이 성찰해서 수정할 것인지, 왜 동일한 현상이 발생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바르트가 정면교사라면 반대로 적용된다. 내가 정의한 개념과 바르트가 정의한 개념이 같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큰 신학자의 글을 읽는다면, 그의 미로에 갇혀 경탄하던지, 눈을 감고 틀렸다고 외치든지 해야 한다. 우리는 반면교사, 정면교사 개념으로 신학자의 글을 읽는 것을 제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바르트는 반면교사로 설정하고 독서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가 정의한 종교 개념은 ‘기독교’이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기 위해서 세우신 제도’라고 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포이에르바허(1804-1872)의 종교 개념, 변증법적 체계를 사용하는 것 같다. 그런데 바르트는 키에르케고르의 사상, 절망의 변증법에도 영향을 받았다. 바르트는 헤겔 좌파의 사상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바르트가 자펜빌에서 사역할 때에 사회주의에 착념되었다고 평가한다. 바르트가 사회주의 사상을 마지막까지 유지했다고 보는 학자는 발타자르, 바르트 좌파이다. 바르트 좌파는 바르트의 사유 체계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변함이 없다고 보는 경향이고, 바르트 우파는 바르트의 사유 체계가 구간별로 변함을 가지고 있으며, 칼빈 등 개혁파의 신학과 대비되는 복음주의 형태로 분석한다.
포이에르바허는 <기독교의 본질>(1841년)에서 종교를 재정의하며 기독교를 재구성했다. 바르트는 헤겔과 포이에르바허의 개념을 그대로 채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포이에르바허는 헤겔의 소외 개념을 받아들여 인간이 자신을 피안에 투사(投射, projection)한 것이 바로 종교라고 주장했다.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추상화하여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에게 투사해서 종교라는 제도를 형성시켰다는 것이다. 종교의 기원은 인간의 자기투사에서 그 시원을 확인할 수 있다. 종교가 발생되는 것은 자연현상인데, 인간의 자기해석이 투사되는 것이다. 인간은 유한한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자연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종교를 만들어냈다. 바르트는 이러한 이해에 ‘계시’라는 개념을 부가해서, 철학을 종교로 전환시켰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까지 채용한 것이다. 바르트의 계시와 종교 진술에서는 두 철학자의 사유가 교차로 진행되는 것으로 보인다.
헤겔 좌파와 바르트의 연관 관계는 김균진이 많은 연구를 보여주었고, 정승훈은 “헤겔 좌파와 칼 바르트”라는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진행했다. 칼 바르트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을 종교(Religion)로 수정하려고 한다. 바르트는 ‘종교’를 ‘불신앙(Unbelief)’으로 표현하며, “계시(Revelation)의 적”, 심지어 “적그리스도(Anti-Christ)”로 비판했다. 종교를 지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 “하나님의 계시”,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현실성(Reality, Wirklichkeit), 계시의 객관성과 주관성으로 현실성을 규정했다. 바르트는 ‘현실성’이란 어휘를 인간성과 인간의 사회와 인간의 역사를 새롭게 규정하고 방향 지으며, 새롭게 이끌어 가는 방향성이기에, 인간의 죄와 허무와 죽음의 현실에 감행되는 “하나님의 혁명(Revolution of God)”이었다. 죄와 불의와 죽음의 역사(종교의 세계)에 감행되는 “하나님의 쿠데타”인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에 기반한 혁명의 신학과 신학의 혁명으로 선포했다.
그런데 바르트의 탁월성은 헤겔 좌파와 결을 같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철학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경험주의 철학자, 스피노자, 칸트, 헤겔은 철학자이지만 신학에 대한 명저를 남겼다. 그들이 집필한 신학 어휘들이 기독교 신학에 들어오면서 자유주의 신학 시대가 되었다. 바르트는 헤겔 이후에 헤겔 좌파, 키에르케고르 등 다양한 실존주의 철학자의 사유와 그 어휘(개념)를 신학에 현란하게 도입시켰다.

McKinnon에 따르면, 19세기 초에 독일 학자들은 키에르케고르의 해석에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키에르케고르를 비합리적이고 일관성이 없는 사상가로 읽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칼 바르트, 허쉬, 에밀 부르너에 이르기까지 대다수 이런 “유령 키르케고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카리스 아카데미에서). “유령 키에르케고르”는 1921년 독일에서의 평가는 키에르케고르가 “비합리주의자”였고, “루터교 신앙의 파괴자”였고, “철저하게 신앙지상주의자”였다는 것이다. 또한 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고 모순으로 가득 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키에르케고르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창우는 키에르케고르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목사인데, 키에르케고르가 주창한 예수를 따르는 삶에 대해서 강조한다. 바르트는 예수를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의 주체로 제시한다. 우리는 사도의 가르침대로 예수 믿음을 추구한다. 어떤 정교한 사상, 웅장한 웅변일지라도 사람에게 미련한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전도의 방식으로 경건을 추구한다.

철학자는 철학자이다. 철학자에게서 신학의 유익을 기대하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다. 철학자가 추구하는 신은 신학이 추구하는 신과 다르다. 그런데 바르트는 철학자들의 개념을 신학 어휘에 넣어서 신학을 구성했다. 바르트가 구사하는 어휘는 모두가 거의 모두 정통 신학 어휘인데, 개념은 계몽철학의 개념이다. 바르트가 실존주의 철학에도 영향을 받았지만, 칸트와 헤겔 그리고 헤겔 좌파의 개념이 그의 신학 어휘에 많은 것으로 보인다. 바르트가 왕성하게 활동하는 1930년대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 철학자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르 W. 아도르노가 쓴 “계몽의 변증법”(1944년)이 출발되고 있었다. 바르트의 결실은 1962-1965년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종교다원주의-익명의 그리스도인”을 결정했고, 바르트가 죽기 전 1968년 5월에 68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바르트는 1968년 12월에 죽었다. 그의 인생의 열매에 종교다원주의가 있으며, 바르트보다 더 파격적인 “계몽의 변증법”, 문화-맑시즘이 출범했다. 종교와 사회 분야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구도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1977년 E.P 샌더스로 바울의 새관점학파가 시작되었는데, 슐라이어마허의 큰 구도가 구축되었다. 슐라이어마허는 유일신 종교를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로 제언했고, 새관점학파는 아브라함의 종교로 구도화시켰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크리슬람’, ‘부디스챤’이 형성되었고, 사회적으로 동성애 등 성 해방이 진행되고, 가족이 해체되고 있다. 변증법적 세계관은 인류는 충돌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역사가 진행된다는 낙관적 세계관에 의한 것이다. 계몽으로 부정했던 신화가 계몽의 변증법에 의해서 다시 문화로 들어왔다. 쫓겨나갈 때에 혼자였지만 들어올 때에는 수많은 친구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이제 인류는 이전보다 더 심각한 상태가 되었다. 바르트는 1차 대전에 참전한 선생들에 놀라서 개선하려고 했지만 더 심각한 지경으로 몰고 들어갔다. 칸트의 동기주의의 낭만이 준 선물이다. 전적부패(노예의지)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철학이든 신학이든 동일하게 혼돈을 가속화시키는 행동에 불과하다. 더 나음을 위해 노력하면 더욱 혼돈이 증가하는 아이러니가 펼쳐질 것이다. 바르트는 종교를 지양했지만, 종교를 지향해야 했다. 종교 안에서 계시를 추구해야 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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