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삼중일신을 위한 뿌리, 삼위일체론(Wurzel trinitatis)
우리는 바르트의 두 명제, Dei loquentis persona(하나님이 말하는 인격, Deus dixit)와 “하나님은 스스로 주로서 계시한다(Gott offenbart sich als der herr, KD., I/1, 323)”가 기독교 명제가 아니라고 제시했다. 바르트가 확립하고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지 기독교 신학에서 사용하는 전형이 아니다. 정통 기독교는 1세기 예루살렘에서 성령의 권능을 받아 고백하고 선포하며 시작했는데, 로마 제국에서 존재에 귀착했다.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이 실패했고(중세 스콜라 신학), 다시 성경을 이성으로 증명하려는 것을 실패했다(계몽철학, 자유주의). 유럽의 지성들은 이성으로 존재 증명, 이성으로 성경 검증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성공할 수 없는 과제이다. 이 세상에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현대철학에서는 증명이 아닌 ‘자유’와 ‘희망’으로 이성 탐구의 방향을 정립했다. 우리는 이러한 가치가 중세에 체계화된 신비주의, 부정신학 그리고 근세에 재침례파, 소시니안(Socinians), 유니테리안(Unitarians) 등의 연합으로 구성되었다고 추측한다. 가장 근원에는 영지주의, 마니교가 있다고 추측한다.
우리는 칼 바르트가 제시한 ‘Dreieingkeit Gottes’을 ‘삼중일신’으로 번역했다. 바르트는 그 이해는 삼위일체의 뿌리(Wurzel trinitatis, §8.2. The Root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에서 시작한 것으로 제시했다. 바르트는 역사적 기독교를 뿌리(Wurzel)로 말하지만, 뿌리와 현재 교회가 이해하는 내용의 일치에 대해서는 부정한다. 바르트는 Wurzel trinitatis가 성경 안에 없는 교의라고 규정했다(KD., I/1, 327). 그리고 교황 무류성을 승인할 수 없다고 제시했다(KD., I/1, 327/교교., 403). 바르트가 교황의 무류성을 승인하지 않아 로마 교회와 갈등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데, 로마 교회는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를 중심으로 칼 바르트 신학을 적극적으로 채택하여 2차 바티칸 회의를 자문했다. 로마 교회는 칼 바르트가 주장하는 계시연속주의이면 교황의 계시 발언을 인정할 수 있는 체계를 확립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을 위해서는 확정적인 교리 체계를 부정해야 한다. 그래서 절대진리 위치를 갖는 삼위일체 trinitatis에 대한 교리 내용의 연속성을 거부한다. 그리고 새로운 가치, 삼위일체의 뿌리 위에 있는 참 계시 안에 있는 스스로 주로 계시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계시의 삼중성을 제언했다(KD., I/1, 332/교교., 408). 그리고 바르트는 삼중성의 둘째 인격(die zweite Person der Dreieinigkeit, Gott ser Sohn, die Gottheit Christi) 테마에 대해서 수정을 진행한다(KD., I/1, 332/교교., 408).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신성에서 그리스도의 인성(humanitas Christi)으로 신학을 전환시킨다. 바르트는 하르낙의 제시, “기독교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이라는 문장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간화시킨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자유, 하나님의 신비가 역사 속으로 들어옴의 구조를 확립했다. 칼 바르트의 신학이 상승기독론 (Aufstiegschristologie)인지 하강기독론(Abstiegschristologie)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바르트가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 속으로 들어온다고 주장하기에 하강기독론으로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의 성육신이 없는 기독론은 모두 상승기독론이다(참고. 서철원 박사의 <기독론>).
바르트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롭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결정했다. 이것을 “하나님의 자기 현시”라고 했다(KD., I/1, 332/교교., 409). self-unveiling으로 번역했고(CD., I/1, 315), self-disclosure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기 폭로는 역사적인 현장에서 인간 안에서 발생한다(KD., I/1, 333/교교., 409). 비록 바르트는 하나님이 특정한 인간에게 부여된다고 제시했지만, 부여받은 인간이 반드시 인지해야만 효력을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형태를 ‘임마누엘’로 규정했다. 바르트는 임마누엘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동이지만, 죄인과 함께하는 임마누엘로 제시한다.
바르트는 계시가 인간에게 분여되는 하나님의 자유에서 계시의 주체에 대해서 논의한다(KD., I/1, 338/교교., 415). 앞에서 바르트는 예수-계시(Jesus-Offenbarung)라는 표현을 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한 인간 형태로 제시했다(KD., I/1, 337/교교., 414). 바르트는 이 부분에서 인간은 계시된 부분만큼 인식한다는 원리를 제시한다. 그러나 바로 인지되지 않는 하나님, 비현시적인 하나님을 제시하며, 비현시적인 하나님이 본질이라고 제시한다(KD., I/1, 338). 그리고 계시된 하나님과 계시되지 않은 하나님(Deus Revelatus 는 Deus Absconditus)을 제시한다(KD., I/1, 338). 바르트의 자유로운 하나님 개념에서는 중보자 개념이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자기 자유와 자기 결단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그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행동한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이란 개념이 성경 주석을 그 당대에 타당성을 부여했지만, 예비적 가치로 평가했다(KD., I/1, 352). 우리는 칼 바르트가 삼위일체를 어떻게 평가하고 처리하는지를 보았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를 한 교리(lehre)로 보아 가변성에 정당성을 부여했고, 예비적 가치를 두어 본래 가치가 등장한 뒤에 용도 폐기하려고 한다. 바르트는 앞에서 자기 신관이 삼위일체(Trinitas)가 아닌 삼중일신(Dreieingkeit Gottes)으로 확립했음을 밝혔다. 그리고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의 자유와 결단이지만 인간이 인식 한에서 계시이고 인식되지 않은 부분이 하나님의 근거이다. 인지하지 않는 인간이 없는 세계에서 바르트의 신은 의미나 존재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4복음서 중심의 전후 |
형상부터 성전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