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 1 교의학의 과제 § 1.1 교회, 신학, 학문
교의학은 한 신학적 훈련이다. 신학은 교회의 한 기능이다. 교회는 하나님에 관해 말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하여 신앙고백한다. 그것은 둘째 공동체로서 특수한 행위를 통하여 일어나는데, 즉 설교와 성례전 집전을 통한 선포에서, 예배에서, 교육에서, 약한 자들·병든 자들·위험에 처한 자들 가운데에서의 사랑의 활동을 포함한 외적인 또 내적인 선교에서 일어난다. 교회의 현실은 다행하게도 그 행위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의 행위는 교회가 믿는 자들 안에서의 그 실존에서 또한 그 공동체적 실존 자체에서도 하나님에 관해서 말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교회의 행위는 저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 또 이보다 더 좁은 의미에서 신학이다.(박순경) *현실, Wirlichkeit, reality는 현실성으로 번역하는데, 우리는 ‘실제(實際)’ 어휘를 제언하고 있다. 실재(實在)와 실제(實際)는 같지 않다.
Dogmatik ist die theologische Disziplin, Theologie ist aber eine Funktion der Kirche. Die Kirche bekennt sich zu Gott, indem sie von Gott redet. Das geschieht einmal durch ihre Existenz im Handeln jedes einzelnen Glaubenden. Und das geschieht zweitens durch ihr besonderes Handeln als Gemeinschaft: in der Verkundigung durch Predigt und Sakramentsverwaltung, in der Anbetung, im Unterricht, in der außeren und inneren Mission mit Einschluß der Liebestatigkeit unter den Schwachen, Kranken nd Gefahedeten. Die Wirlichkeit der Kirche geht darin auf, daß sie sowohl in ihrer Existenz als solcher von Gott redet. Ihr Handeln ist, "Theologie" in jenem weiteren und in diesen engeren Sinn.(KD I/1., 1)
Dogmatics is a theological disciplines. But theology is a function of the Church. The Church confesses of God as it talks about God. It does so first by its existence in the action of each individual believer. And it does so secondly by its specific action as a fellowship, in proclamation by preaching and the administration of the sacraments, in worship, in its internal and external mission including works of love amongst the sick, the weak and those in jeopardy. Fortunately the reality of the Church does not coincide with its action. But its action coincides with the fact that alike in its existence in believers and its communal existence as such it speaks about God. Its actions is "theology" in both the broader and the narrower sense.(CD I/1., 3)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읽기 13권, 중 I/1권 첫 도입 문장이 전체를 결정하는 것 같아, 첫 문단을 전체 인용했다.
본문의 키워드(key word)는 교의학, 신학적 훈련, 신학, 교회의 기능, 하나님에 관해 말함, 하나님을 고백함, 특수한 행동, 설교, 성만찬, 구체, 연민, 행동, 교회의 실재성, 신학 등이다. 바르트 신학에서 등장한 키워드가 거의 등장하는 것 같다. 그런데 등장하지 않은 어휘는 성경, 예수 그리스도, 계시, 삼위일체, 기도 등이다. 바르트의 사유 구조를 예단할 수 있는 문장이다.
바르트의 사유의 시작과 기초는 교회(Kirche)가 현재 존재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를 부정할 사람이 없다. 부정할 수 없는 가치 위에 사유를 세우는 것이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며, 거부할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 사유의 시작이 있다면 종점은 어디일까? 바르트의 사유의 귀결은 사랑과 자유일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에서 인간의 사랑과 자유로 귀결될 것이다. 자유주의는 사랑으로 귀결했고, 바르트는 그것에 자유를 더해, 사랑과 자유로 구도화시켰다고 필자는 제언한다. * 바르트를 읽을 때에는 우리의 사유에 대해서도 반성할 수 있다. 신학하는 당신의 사유의 시작은 무엇인가?
신학의 시작은 어디일까? 바르트는 ‘교회’라고 규정한 것이다. 신학의 시작은 어디일까? 교회일까? 필자는 신학은 기독교 사회가 되면서 기독교 사회 체계를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신학 어휘가 등장했다고 제언한다. 신학(theologia)이란 어휘는 실제 12세기에 등장한 어휘이다(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세기 이전 서방 교회에서는 신학이 아닌 믿음, 원리 등의 어휘로 작품(treatise, sententia)을 제시했다. 바르트는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보편성, 일반성 가치를 위해서 학문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교회와 교의학, 신학은 깊은 관련이 있지만, 바르트는 신학은 교회 밖에서도 이루어진다고 제시한다(KD I/1., 2). 즉 교의학과 신학이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다른 체계로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교의학은 교회 안에서 발생한 것이고, 신학은 더 광범위한 영역을 갖고 있다. 바르트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의학에 대해서만 제시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에 대해서 부정하거나 배제하지 않을 것이다.
바르트는 교회의 기능(Funktion der Kirche)과 교회의 현실성(Die Wirlichkeit der Kirche)으로 교회를 세우고 있다. 두 교회에서 모두 등장하는 것이 “신에 관해서 말함(von Gott redet)”이다. 바르트는 결국 신에 대한 담론(談論)이 신학인데, 넓은 의미(교회 밖), 좁은 의미(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제시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신에 관해서 말함은 교회 밖과 교회 안에서 언제나 일어났고 일어나고 일어날 수 있다는 견해일 것이다.
바르트는 신학 첫 문장에서 교회의 기능에 대해서 규정하면서 전개했다. 반틸 박사(Cornelius Van Til)는 이러한 패턴에 대해서 바르트의 전제(presuppositions)라고 규정했다. 바르트의 전제와 반틸 박사의 전제는 같지 않다. 그래서 반틸 박사는 자기 학문을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라고 세웠다. 바르트의 사상을 변호하는 한 수단으로 바르트의 부당한 전제를 밝혀야 했지만, 반틸 박사는 부당한 바르트의 전제에 대해서 많이 밝히지 않았다. 우리는 바르트의 전제와 방법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다. 바르트의 전제는 “신학은 세계 모든 영역에 있다는 것이고, 교의학은 교회 안에 있는 신학”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전제가 아닌 역사적 근거에 의해서 신학은 12세기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교회는 교리 위에 세워지기 때문에, 먼저 교리를 확증하는 일을 한다. 교리와 신학은 같지 않다. 교리는 교회의 공적 고백이고, 신학은 신학자의 신학 사유 체계이다. 바르트는 교회의 신학(교리)과 신학자의 신학을 명료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교회를 먼저 설정하고 그 안에서 신학을 논하는 구조로 순서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신학을 교회의 기능으로 평가하고, 교회 안에 두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는 교리 위에 세워지기 때문에 교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가르침을 요구한다.
바르트는 교의학(Dogmatik)을 제언했다. 우리는 교의(Dogma, 교리)를 제언한다. 우리는 교의와 교리를 동의어로 사용할 때도 있지만, Dogma와 Dogmatik은 같지 않다. 바르트는 교의학을 신학적 훈련(die theologische Disziplin)으로 규정했다. 이것은 규정된 규범이 없는 수준을 드러낸 것이다. 교회는 진리의 기관으로 불변한 가치(Immutatis Mutandis)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교회가 신학적 훈련 기관이기 때문에 불변한 가치를 갖고 있을 수 없다(Mutatis mutandis). 교회는 교의를 불변한 가치로 세운다. 개혁된 교회는 불변한 가치로 451년 칼케돈 신경의 4개의 공회의와 공회의 문서(신조)로 세운다. 반면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 회의를 통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있다는 견해를 갖는다. 바르트의 사상과 차이가 없는 부분이다. 필자는 이러한 공통된 이해가 계시 이해의 일치이고, 그것을 “계시계속주의”라고 제시한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서는 “계시중단”(WCF 1:1, 계시중지주의)를 고백했다. 바르트의 계시계속주의(진리 가변설)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계시중지주의(진리 불변설)는 명확하게 대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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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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