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5-01-14 09:5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바르트가 말하는 교회의 기능: 신에 관해서 말함을 비판하고 교정하는 임무


칼 바르트의 신학, 그의 『교회교의학』은 독자가 자기 신학 개념을 확립해야 독서가 가능하다. 그것은 자유주의 신학은 정통신학의 믿음으로 신학에서 이성의 합리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독자가 자기 개념이 없어도 그들의 글 속에서 개념이 드러난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개념 확립에 실패했다. 자유주의는 기독교의 개념을 사랑으로 제언한 것은 광범위한 인정을 받았는데, 최근에 형성되는 예수 이해는 “혁명가 혹은 혁명적 선지자”로 구상시키고 있다. 우리의 탁월한 철학자인 김형석 교수도 예수를 혁명가로 평가하며, ‘교회주의’를 경계하는 인터뷰를 했다(“예수는 혁명가…교회가 곧 기독교라는 생각은 위험”, <한겨레신문> 2015.12.22.). 우리는 앞에서 “교회의 기능을 신학”이라는 바르트의 정의에 대해서, “교회의 기능을 신학이 아니라 복음”이라고 제시했다. 신학은 교회의 산물이 아닌 기독교 사회의 산물이다. 신학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화된 기독교에서 형성된 가치이다. 교회는 신학이 아니라 복음과 연결된다. 복음은 계시이고, 교회사는 복음과 다른복음의 논쟁이다(갈 1장). 교회사에서 정립한 복음과 다른복음은 이단과 정통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단이 앞에 선 것은 다른복음을 가진 세력이 복음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소극적인 자세로 다른복음을 배격하면서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도하는 일에 전력했다.

이번에는 ‘교회’라는 개념에 대해서 제시하려고 한다. 『교회교의학』 I/1의 첫 제목이 “교회, 신학, 학문(KIRCHE, THEOLOGIE, WISSENSCHAFT)”이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의 특징은 처음부터 교회, 성례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행동에서 『교회교의학』이 시작된다. 교회의 행동은 교의학(신학적 훈련), 설교, 성례전, 신학, 하나님에 관해서 말함(von Gott redet, talks about God), 선교 활동이다. 바르트는 교회의 행위를 신학이라고 했다. 바르트는 교회를 교회에서 보여지는 가시적인 행동들을 개념화했다.

유럽 신학은 당시 바르트가 von Gott redet으로 신학을 전개했기 때문에 놀랐다. 그것은 신학에서 인간의 합리적 검토가 아닌 신(Gott)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시를 신의 자기 노출로 제시하고, 그 계시가 성경에 충족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견지한다. 그런데 바르트는 교회에서 신을 말함에 관해서(von Gott redet) 있는 상황, 행동을 제시한다. 즉 교회의 행동, 신에 관해서 말함을 기본으로 한다. 우리는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해지는 설교로 이해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교회가 행동하는 신에 관해서 말하는 속에서 신의 실제(Wirklichkeit)가 발생한다. 바르트는 교회의 실제(Die Wirklichkeit der Kirche)라고 표현했다. ※ Wirklichkeit를 박순경은 현실, 다른 번역자는 현실성으로 번역하는데, 고경태는 실제로 번역하고 있다. 독일어에서 ‘실재(Realitaet)’와 ‘현실 혹은 실제(Wirklichkeit)’로 구분한다. 헤겔은 실제(현실)를 자기 현실태의 최고 의미로 규정했다. 이 현실이 완성되는 시점이 이성 진보의 역사성이 완성된다고 했다. 신을 인간의 인식 영역 안에 제한시킨 것이다. 그것은 칸트의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 thing-in-itself), 인식 영역 밖에 있는 것에 대해 규정했다.

정통신학은 하나님의 성육신(위에서 아래로의 기독론)을 세우며, 교회는 그의 피로 세우신 기관으로 확립하고 있다. 그런데 칼 바르트는 교회를 신에 대해서 말하는 공동체로 재정의했고, 그 행동이 있는 실제를 교회라고 규정했다.

바르트는 교회에서 신에 관해서 말함(혹은 믿음고백)에서 교회의 행동의 인간성과 책임성을 제시했다(KD., 1). 바르트는 교회의 행동을 신에 관한 믿음 고백이라고 말하면서 즉시 신을 말함에 관해서(von Gott redet)와 신의 말함(Reden Gott)으로 전환한다. 교회는 신을 말함에 관해서(von Gott redet)라고 할 때에 Anfechtbarkeit(어려운 시련, 심각한 취약성, 반박의 여지)가 있는 것과 신의 말함(Reden Gott)의 이중적 응답 구조를 제언했다.

바르트는 은혜(Gnade)를 약한 자가 강하게 되는 것으로 제시했다(KD., 1). 그리고 은혜와 함께 행위하는 교회(handelnde Kirche)보다 더 넓은 인간적 과제(menschliche Aufgabe), 신에 관해서 말함(Redens von Gott)이 발생한 교회에서 비판과 수정의 과제를 승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교회에서 수행되는 세 번째 신학 개념에서 엄밀하고 적절한 말씀의 의미를 취할 수 있다(KD., 1).

바르트는 “신에 관해서 말함(Redens von Gott)”에 대해서는 인간이 비판과 수정의 과제가 있다고 제시했다. 그러나 “신을 말함에 관해서(von Gott redet)”와 “신의 말함(Reden Gott)”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J. Gerhard의 “신학의 삼중적 개념”을 인용했다. 게르하르드는 신학을 (1) 믿는 모든 사람에게 신학, (2) 교회적 사역의 기능, (3) 신적 진리를 세우고 오류를 배격하는 것으로 개념화했다. 바르트는 게르하르드의 신학 개념을 자기화시켜 새로운 신학 구도를 세웠다. 바르트의 삼중적 구도는 매우 특이한 구조이고, 계시의 삼중성, 신에게도 삼중일신(Gottes Dreieinigkeit)까지 연결하여 구도화시켰다. 그래서 바르트의 글은 정교하게 신학화가 되지 않으면 바르트 신학 체계에 설 수 없으며 변호할 수 없다. 언어는 같은데 개념이 전혀 다르다. 개념이 다르다는 것은 지향성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정통신학은 죄사함과 영생을 주신 주님을 지향하는데, 바르트는 죄사함과 영생에 관심이 없으며 인간에게 발생한 신의식에 대해서 정당성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신의식은 모든 인간에게 발생하는 보편적 성향이다. 정통신학은 참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아닌 믿음은 교회에 있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칼 바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독단적이고 폭력적으로 생각한다. 교회만이 신을 점유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바르트는 교회를 신에 관한 말이 펼쳐지는 실제로 평가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교회를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바르트가 개념화한 교회 개념은 바르트가 최초로 제안한 것이다. 바르트는 누구에게 그러한 개념을 받았을까? 분명한 것은 정통신학, 개혁신학에서는 교회의 개념을 바르트처럼 말하는 목사는 없다. 우리 시대에는 개념 의식 없이 교회라는 말을 사용하면 바르트의 교회 개념에 동조한 것이 된다. 최소한 슐라이어마허의 교회, 공동체 개념을 동조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신의식을 경험하는 공동체로 교회를 개념화했다. 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의 개념에 동조하면서 경험을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신에 관해서 말함(Redens von Gott), 신의 말함(Reden Gott), 신을 말함에 관해서(von Gott redet) 등으로 삼중화시킨다.

바르트는 교회에서 신에 관해서 말함(Redens von Gott)에 대해서 비판, 수정의 과제를 수행하는 것을 임무로 제시했다. 우리는 교회의 표지를 복음선포와 합당한 성례집행으로 세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교회 기능은 신학이 아닌 복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