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6-02-11 08:4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믿음의 행위로서 교의학 (1)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1 읽기(22)


『교회교의학 I/1』 §1는 “교의학의 과제”이고, 1. 교회, 신학, 학문(Die Kirche, die Theologie, die Wissenschaft), 2. 탐구로서의 교의학(Dogmatik als Untersuchung)이고, 3. 믿음의 행위로서의 교의학(Dogmatik als Glaubensakt)이다. 바르트는 §1.2에서 교리가 반복이 아니라 끊임없이 묻고 탐구하는 학문적 수행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러한 바르트의 제시가 교리를 변경할 수 있다고 평가했는데, 그 교리 안에는 삼위일체와 그리스도 양성교리도 포함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바르트를 정통주의로 평가한 한국 신학자의 원형은 이종성 교수(1922-2011)이고, 비판한 신학자는 박형룡 박사(1897-1978)이다. 이종성은 신정통주의 칼 바르트의 신학을 정통주의로 평가했고, 칼 바르트 신학을 비평하는 박형룡 박사는 근본주의적이라고 소극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종성이나 박형룡은 모두 신학을 탐구하는 학자인데, 칼 바르트에서 명백하게 구분된다. 다른 의견이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은 좋지만, 부당하게 부정적 뉘앙스를 씌우는 것은 좋지 않다. 우리는 교리의 변경을 주장하는 것을 정통주의라 할 수 없기 때문에 이종성의 분석이 좋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박형룡 박사는 바르트의 성경관이 ‘~이다(is)’가 아니라 ‘~되다(become)’라고 해서(존재(Sein)와 사건(Ereignis)의 대립), 자기 성경관과 맞지 않다고 평가한 것인데, 그 분석은 누구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이종성의 바르트 이해는 권위 있는 이해처럼 평가되고, 박형룡의 바르트 이해는 근본주의적 이해라도 절하되는 것일까? 베르카우워(Cornelis Berkouwer, 1903–1996)는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을 분석한 후, 바르트 신학의 핵심을 “은혜의 승리(The Triumph of Grace)”라고 규정하며, 개혁파 신학에 편승시키게 했다. 스코틀랜드에 바르트 신학을 정착시킨 그의 제자인 토마스 F. 토런스(Thomas F. Torrance, 1913-2007)는 바르트의 신학을 정통신학으로 평가했다.

『교회교의학 I/1』 §1.3은 “믿음의 행동으로서 교의학”이다. Glaubensakt은 an Acting of Faith(믿음의 행동)로 번역한다. 바르트가 만든 독일어 Glaubensakt는 한 어휘이고 번역어에서는 두 어휘이다. 한 어휘로 표현된 Glaubensakt는 한 의미로 보아야 한다. 바르트는 믿음과 행동을 한 사건(Ereignis)으로 제시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어휘(Act of Faith)로 나뉘면, ‘믿음’이라는 원인에서 ‘행동’이라는 결과가 되는 인과 관계가 된다. Glaubensakt는 “믿음의 행동”이 아니라, “믿음행동”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 참고로 ‘믿음’과 ‘신앙’은 같은 개념이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같은 개념으로 사용한다. ‘믿음(信)’은 순수상태이고, ‘신앙(信仰)’은 믿음이 구체화된 형태로 볼 수 있다.

우리는 ‘행동’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다. 이신칭의, 믿음에 행동(성화)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바르트의 특징 중 하나는 기존 논리 순서를 역행시킨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칭의와 성화”라고 한 것에서 “성화와 칭의”로 구도를 변경시켰다. 율법과 복음에서 복음과 율법으로, 창조와 언약에서 언약과 창조 등으로 순서를 바꿨다. 그리고 두 개념을 한 개념으로 통합시키기도 했다. 두 계시(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계시로, 두 언약(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은혜언약으로 일원화시켰다. 그런데 바르트가 신학에서 ‘행동’을 명료하게 제시한 것은 개혁파 신학에서는 이례적인 것이지만, 인문학에서는 추구된 체계의 흐름이다.

이러한 흐름은 유대교의 이해를 ‘율법주의’에서 ‘정통행동(Orthopraxy)’으로 변환시킨 것에 있다. 그런데 ‘행동’을 강조하는 바르트는 이러한 흐름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바르트 뒤를 잇는 학자들은 기독교가 믿음을 강조하는 정통(Orthodoxy)이 아닌 행동이 동반한 정통행동(Orthopraxy)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정통행동의 원형이 유대교에 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원형인 유대교처럼 기독교도 정통행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교를 ‘율법주의’에서 ‘행동’으로 변경한 학자는 모세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 1729-1786)인 것으로 보인다. 유대교를 ‘정통행동(Orthopraxy)의 종교’로 규정하는 시도는, 유대인 계몽주의 사상가 Moses Mendelssohn이 기독교가 유대교를 ‘율법주의’로 오독해 왔다고 평가하며 새롭게 제안한 이해이다. 이 규정은 유대교의 윤리적 구조를 설명하는 데에는 유효할 수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결정적 사건을 해명하지는 못한다. 기독교가 유대교를 ‘율법주의’로 규정해 온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의 사유의 원천을 모세 율법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조상이 형성한 전통 체계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에서 1세기 유대인의 의식을 규정하지 못하는 순간, 기독교 신학은 더 이상 기독교 신학일 수 없다.

Moses Mendelssohn은 유대교를 ‘계시된 종교(Revealed Religion)’가 아니라 ‘계시된 입법(Revealed Legislation)’으로 규정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계시하신 것은 ‘무엇을 믿으라’는 교리적 신조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규정하는 구체적인 삶의 규범, 곧 ‘미츠보트(mitzvot)’이다. 따라서 유대인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는 핵심은 공통된 신앙 고백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공동의 실천과 행동 양식에 있다. ‘정통행동(Orthopraxy)’이라는 개념은 프랑스 로마 가톨릭 철학자 모리스 블롱델(Maurice Blondel, 1861-1949)의 ‘행위의 철학’에서 결정적인 사상적 토대를 얻은 것으로 평가된다.

유대교의 정통행동(Orthopraxy)과 블롱델의 행위 철학은 인간과 공동체의 실천에서 출발하는 행동 중심 사유이며, 바르트의 신적 행동(Akt Gottes) 사상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출발점은 다르다. 그러나 ‘믿음이나 교리보다 행동과 사건을 우선시하는 근대 이후의 행동주의적 전환’이라는 거대 담론의 차원에서는, 이들 모두를 동일한 사상사적 흐름 안에서 파악할 수 있다.

바르트가 교의학을 인간의 인식작업으로, 교의학을 그리스도교 교회의 한 기능으로 규정하는데, 그 행위는 인간의 행동 안에서 인식이 형성되는 신의 행위이다. 바르트의 특이점은 인식이 인간 안에서 발생한다고 하지만, 그 인식의 대상과 근거는 인간 안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바르트의 이중구조는 사고를 명료화하기보다, 계시를 전제하지 않는 사고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의도된 순환 구도로 보인다. 이 구도는 바르트의 신학에서 일관되게 나타나지만, 철학적 관점에서는 순환 논리 오류의 위험을 피하지 못한다.

바르트의 난점은 난점이 아니다. 그것은 바르트가 신학에서 ‘행동’을 도입시키는 것이 독단적인 것이다. 개혁신학 성화 구도에서 행동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 구속, 피의 은혜에 집중하는데, 바르트는 행동을 도입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논리의 첫 부분에서 ‘행동’을 말하고 있다. ‘믿음행동’이라고 하지만, 바르트에게는 “행동(Akt Gottes) 후에 믿음이 발생한 것”이 될 것이다. 신의 행동으로 믿음이 발생한다고 하니 은혜스럽게 보일지 모른다. 자기 신학을 명백하게 고백할 수 있다면 바르트의 신학이 개혁파 신학에 심각하게 부딪힌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개혁파 신학에서 은혜는 복음선포와 성례와 함께 성령으로(per verbum et cum verbo) 수여되는 특별한 선물이다.
바르트는 설교를 강조한 신학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을 강조하는 학자이다. 하나님의 행동이 없는 성경은 의미가 없고, 하나님의 행동이 함께하면 하나님 말씀이 된다. 우리는 합당한 설교자가 정확무오한 성경을 읽고 선포한 복음에 성령께서 함께 역사하심(전하는 자) 그리고 성령으로 하나님 말씀을 듣는 합당한 백성(듣는 자)에게 은혜를 수여하는 구도를 갖는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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