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6-01-29 20:4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제3부 (11장~19장)  성도의 칭의

칭의와 율법의 관계

칼빈은 17장에서 율법과 복음의 약속이 서로 일치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주께서 그의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 하신 율법의 약속들을 들고 나와서 그 약속들을 완전히 무효로 만들기를 바라느냐고 우리에게 되묻는다.
그러므로 사도는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레 18: 참조, 겔 20:11)라는 유명한 약속이 있으나 그냥 거기서 그쳐버리면 그 약속이 아무런 소용이 없고 또한 없는 것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다(참조 롬 10:5; 갈 3:12), 아무리 거룩한 하나님의 종들이라 할지라도 율법을 지키기는커녕 온갖 과실과 허물로 얼룩져 있기 때문에, 그들조차도 그 약속을 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약속들로 그것들을 대체시키면, 그 약속들은 값없는 죄 사함을 선언하는 것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께 합당하도록 만들어줄 뿐 아니라 우리의 행위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만들어 주게 된다. 주께서 우리의 행위들을 기뻐하시기로 정하실 뿐 아니라, 그의 율법을 준행하는 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축복들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곧, 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communion)속으로 받아들여져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와 화목되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이 씻음 받고 죄 사함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의를 마치 자기의 것처럼 옷 입으며, 하늘의 심판대 앞에서 확신을 갖고 서는 것이다.


위의 글을 정리하면, 교황주의자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가 율법의 약속을 무효화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칼빈은 칭의가 율법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의 축복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게 되는 것이므로 율법의 축복은 그리스도의 축복과 일치된다고 밝힌다. 아울러 칭의의 정의에 대해서는 인간의 공로를 무효화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더 강화시키고 있다.
칼빈의 주장에 보충을 하자면, 율법의 복과 저주는 신약의 성도들에게 직접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오셔서 율법을 성취하심으로서 복과 저주를 실현하신 것이다. 즉, 율법의 복과 저주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실 약속의 내용이지, 성도들에게 주어진 규범이나 그에 따른 상벌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율법의 약속은 그리스도의 성취사역으로 완성된다는 계시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신학의 축이 그리스도 중심에 있음을 확고히 할 수 있다. 또한, 칭의를 정의함에서도,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복을 주셨고 이 은혜의 본질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보낼 것을 언약하시고 언약하신 대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죄로 말미암아 사망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속해서 의롭다 선언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셨다는 것이 계시적 의도에 충실하다고 판단된다. 이것이 바로 신학의 축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까닭이다.

상급의 의의(意義)

칼빈은 18장에서 행위의 의는 상급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우리는 주께서는 행위를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주신 축복들을 신자들의 행위에 대한 상급으로 주시므로, 여전히 주님의 긍휼하심 이외에는 신자들이 축복을 얻을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확실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우리의 행위들이 그런 상급을 받기에 합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성령께서 이런 약속을 해 주셔서 우리의 행위들의 가치를 인정하신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궤변가들은 우리가 밝혀 놓은 목적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공로와 상급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식의 고집을 늘어놓지만, 우리로서는 공로와 상급이 서로 관련이 있다는 식의 상상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상급을 근거로 행위의 공로를 유추해내거나, 행위와 상급을 서로 재거나 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계획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는 값없는 언약이 먼저 있지 않았다면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 전체가 바로 여기에 달려 있는데 - 이 약속이, 다른 약속들도 모두 마찬가지로, 우리를 위하여 아무런 열매도 내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자, 이 사실을 확고하게 의지하고서 우리는 든든한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아무리 우리의 섬김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에서 비롯되는 상급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확신 말이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주의자들의 공로주의와 상급(賞給)사상에 대해서 추호도 여지를 주지 않는다. 공로와 상급의 상관관계를 통해서 행위를 미화하거나 상급의 명분으로 행위를 촉발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칼빈은 선행(善行)의 근거를 값없는 하나님의 언약에서 확보하고, 부족하고 어리석은 인간에게도 영생의 상급이 균등하게 주어짐을 상기시킨다. 칼빈은 창세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을 받았다는 은혜언약사상에 대하여 확고하였다. 필자는 이에 대해 전적으로 동감한다. 이유인즉, 기독교 신학은 창세전 하나님의 작정에서부터 개진되는 언약성취사적 원리에 입각해야만 정당성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 신학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함으로써 행위의 공로를 중시하게 되며, 그에 따른 상급에 초점을 맞춘다. 교황주의자들의 관심은 그들이 의도한 바대로 끌어가기 위한 교묘한 장치로서 인간을 종교에 의한 노예로 종속시키려는 교활한 발상에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향하는 의도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공로주의를 교리적으로 정당화했으며, 피지도층에 속한 자들로 하여금 상벌제도를 교리화 시켜 교인들을 유린하고 있다.

기독교는 먼저 복을 주고 그 복을 깨닫게 하신 다음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종교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복을 주셨고 은혜로 주신 복을 깨닫게 하시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하셨다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이러한 원리는 성경에서 증거되는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복을 주신 후에 타락한 아담을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할 영생과를 먹지 못하게 하시려고 에덴에서 쫓아내셨으며 가죽옷으로 수치를 가리어 주셨다. 아브라함에게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후에 애굽으로 피신했을 때 아내를 누이라 속였으나 바로 왕으로 부터 보호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는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겠다고 약속하신 다음 열악한 환경과 범죄 가운데서도 왕국을 세워주시고 왕위를 보호해 주셨다. 이와 같이 신약에서는 창세전에 복을 주셨던 언약백성들을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속해 주심으로서 은혜의 영광을 깨닫게 하신 내용들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인간의 행위에 따라서 복(福)과 상(賞)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먼저 복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 교황주의자들은 자기들이 마치 복의 주체인 양 축복과 저주의 중보자 행세를 하며 성도들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여호와의 영원성 찬양<전도서>
기독교 신앙의 원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