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제3부 (11장~19장) 성도의 칭의
칭의의 결과
칼빈은 19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밝힌다.
자유의 문제는 의롭다 하심의 가르침에 뒤따라 붙는 것이므로, 의롭다 하심의 힘을 올바로 깨닫는 데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는 것이다. (중략) 앞에서도 이따금씩 이 자유의 문제를 언급하곤 했었으나, 여태껏 미루어 오다가 지금에 와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다루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중략) 이 자유를 구실로 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의 마음을 아예 흔들어 놓고 도무지 절제 없는 방종에 빠지거나, 아니면 모든 선택과 질서와 억제력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 경원시하고 반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자에게 율법이 전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올바른 것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양심이 율법을 생각하고 따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계속해서 우리를 가르치고 권면하고 강권하여 선(善)을 행하도록 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전혀 다른 것이므로, 이 두 가지를 아주 조심스럽게 구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체는 경건을 향한 일종의 갈망(aspiration) 이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거룩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엡 1:4; 살전 4:7; 참조, 살전 4:3). 율법의 기능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자극하여 순결함과 거룩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다.
칼빈은 타락한 죄인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결과로서의 자유를 규정하는데, 자유의 부작용으로 인한 무절제와 방종을 경계해야 하고, 억제력을 위해서 율법의 기능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은 나태할 수 있으며,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으므로 무엇에게도 정죄 받지 않는 상태가 되어 방종할 개연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예정론을 운명론으로 오판함으로써 나태와 냉소와 방탕의 문제를 제기할 뿐만 아니라 자유와 방종의 기준과 개념에 대해서도 혼선을 빚고 있다.
일반적인 자유의 개념은 자기 좋은 대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을 뜻하지만, 기독교의 자유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종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종속(從屬)의 개념은 단면만을 보면 부자유한 것처럼 판단되지만 종속시키는 대상에 따라서 의미는 달라진다. 전능하신 분에게, 신실하신 분에게, 주권자이신 분에게, 자비하신 분에게, 영원하신 분에게 종속된다는 것은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평안하고, 믿음의 대상이 있기 때문에 안정되고, 사랑에 충족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일평생 영원히 감동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와 같이 앞에서 언급된 하나님께 종속되어 보호받으며 감동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가 아니겠는가. 바울은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는 말로 자유를 규정하고 있다. 예수의 말씀처럼 진정한 자유를 깨닫고 누리게 하는 원천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데서 확보된다.
성경은 자유의 파노라마이다. 구약의 백성들은 죄, 사망, 노예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었고, 신약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성도, 자녀, 성전, 교회가 되었다.
이와 같이 성경적인 자유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종속되어 의와 생명을 얻게 됨을 뜻한다. 이러한 자유는 죽음의 공포, 죄책감, 욕망의 포로에서 벗어나 어떠한 여건과 상황과 환경에서도 두려움과 불안과 초조함에 억압되지 않으며 진정한 평강과 행복을 누리게 하는 원동력이다. 성도의 생활은 진정한 자유를 통한 행복감에서 열정이 솟구치고, 나태하지 않으며, 더욱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를 갖추어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의 개념으로 인한 무질서와 성도의 방종에 대한 염려는 기우(杞憂)이다.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칭의
최종적으로 칭의에 대한 논의를 정리하면, 칼빈은 칭의에 대한 개념을 인간의 공로나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님을 주창하면서 오직 믿음에 의한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칭의의 진가를 높이기 위해서는 자기의 의를 비우고 인간의 공로를 자랑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義)만 추구하라고 한다. 칼빈은, 율법적인 의를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으므로 인간은 자기의 공로에 의한 상급을 요구할 권리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의로 실현된 진정한 자유를 누리라고 주창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칭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義)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조건 없이 의롭다함을 얻게 하는 계시의 수단이다. 하나님의 계시적 의도는 창세 전에 세우신 계획대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택한 자들에게 의의 성취사역을 실행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하는데 있다. 의(義)는 하나님의 뜻으로서 그리스도의 언약과 성취를 통해서 확고해지며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한자들에게도 실현되는 성취사역이다.
칭의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한 관점에서 정의되고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AD 354~430)은 믿음과 선행의 복합적인 요소에 의해서 성립되는 칭의로 정리한다.
인간은 믿음에 의해서 구원되는 것으로 말했지만 이 믿음은 또한 선한 것을 행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카리타스와 결합되었고 그 안에 표현되어 있다는 생각을 덧붙였다. 사랑을 일으키는 행위들은 공로로 인정받을 만한 것들이며 이에 대해서는 뒷날에 보상을 받을 것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중략) 구원의 실제적인 근거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닌 은혜뿐이지만 은혜의 사역 가운데서 주목을 끄는 것은 밖으로부터 와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그리스도의 의보다는 각 개인의 생활 가운데서 일어나는 변화이며, 이 변화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새로 태어난 사람들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은, 칭의는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은혜인데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언되는 칭의의 법정적인 선포보다는 생활의 변화에서 나타나는 실제적인 의미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의미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롭다하시는 판단과 선언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의(義)의 성질은 판단과 평가에 한정된 것만 아니라 의로운 생활까지 실천하게 하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야고보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21~23)라는 글에서 믿음의 행위를 통한 아브라함의 의(義)를 설명한다. 야고보의 논리는 아브라함을 의롭게 평가하신 믿음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게 하신 다음, 그 성숙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제물로 드린 행위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칭의의 쟁점은 드러난 현상적인 행위에 대한 판단보다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여겨주시며, 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총제적으로 인식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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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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