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0-06-25 23:0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경의 언어<7> 시간의 본질 볼 수 없나?


있음과 없음은 존재론의 용어이다. 볼 수 있음은 알 수 있다는 의미와 바로 통한다는 사실을 이 글 <5>의 기독교 목차관에서 서술하였다. 볼 수 있음의 근거는 계시이다. 이 의미는 보이니까 볼 수 있는 것이지 보이지 않으면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지엽적인 해설은 신경이 보게 하니까 눈으로 보는 것이고 근본적인 해답은 천지의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주시니까 볼 수 있다는 것이다(행17:24~31). 이러한 성경적인 존재론에 기초하여 시간의 본질을 분석하고자 한다. 그 분석의 중심은 존재론적인 측면에서의 기한성이나 한계성이다. 이 중심에 붙은 것이 인식론적인 측면의 상대성이다.

1)일정한 때 시(時)

 일정하다는 것은 하나로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음이다. 때가 일정하고 고정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 그 누구라도 이 때를 조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한 번 정해진 것에서 앞뒤가 바뀌지 않는 것이 바로 때의 특성이며 본질이다. 이렇게 일정한 때의 본질을 무시무종이라는 무한성으로 보는 관점도 있지만 과연 그러한가?

 ①해를 손마디에 견주어 봄
 
 옛날부터 이 때 時를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하였지만 간단하지 않았다. 어떤 책에서는 이 時를 풀이하려고 하지 않는데 이 뜻의 어려움을 짐작하게 하는 점이다. 보편적으로 날 일(日)과 절 사(寺)의 합성자로 보고 해설을 한다. 절 寺의 뜻을 관청이나 집으로 풀이한다. 날 日과 절 寺의 결합으로 된 時는 관청이나 절에서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풀이하는 것은 어원이 지니고 있는 그 자체 외에 종을 친다는 상황을 덧붙여 해설하는 셈이다. 어떤 고증학자들은 이 寺를 손에 물건을 쥔 모양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이 時의 문자는 현대 중국어에서 날 日의 오른쪽에 흙 土가 사라지고 마디 촌(寸)만 남아 있다. 어떤 때를 의미하는 것에 마디 절(節)과 함께 사용되는 것이 많다. 예를 들면 계절(季節)과 특정한 날에 붙는 節이다. 그것의 더 구체적인 예로 유월절과 광복절과 성탄절과 같은 것들이다. 날을 나타내는 해와 손마디 특히 엄지(拇指)와 관련지은 때 時에서 핵심적인 뜻이 해와 마디로 결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세월이 빠르고 짧음을 많은 이들이 실감나게 고백하였다. 그 시간을 경시하지 말라(一寸光陰不可輕)는 어떤 학자의 말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공감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그 의미는 교육에 있어서 중시되고 있다. 이렇게 때나 날에 관련된 마디의 의미에는 시종이 분명하고 낮과 밤이 연결됨의 상징이 들어 있다. 이렇게 문자의 어원적인 면과 글자가 사용되어온 역사적인 면에서 이 時자에 마디 寸이 해와 어우러진 심장한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때 時는 여러 면에서 손마디에 연관되고 있다. 촌음(寸陰)이나 촌각(寸刻)과 같은 것이며 세월의 짧음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 이 時는 손마디나 대나무마디와 같은 것에 해나 날을 비교하거나 비유하여 견주어 보는 것과 관계되고 있다.     

 ②한 마디 안에 있는 한 점

 한 해와 한 달 그리고 일시는 모두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한계는 모두 하나의 마디와 같다. 존재적인 측면에서 마디는 기한과 한계가 있다. 마치 마디와 같은 시간을 측정하는 기준과 방법은 지역마다 시대마다 차이는 있었다. 음력과 양력이 있고 또 시차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시간에 분명한 목적과 기한이 있음을 성경은 강하게 선포한다(전3:1~8). 모든 목적은 총체적인 하나의 목적과 연결된다. 과거의 목적이 있고 현재의 목적이 있으며 미래의 목적이 있다. 그 모두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같은 하나이다. 성경의 내용 구조가 구약의 언약과 신약의 성취로 짜여져 있으며 하나님을 여호와로 계시한다. 이 계시는 성경이 계시하는 신은 살아 존재하신다는 하나의 목적에 집중되고 있다. 또 인류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듯이 모든 때의 기준은 예수의 오심이다. 애급의 400년과 바벨론의 70년 그리고 거룩한 성을 위한 70이레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이 모든 때는 지엽적으로 성도를 위하여 근본적으로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사43:21). 다니엘서의 한때와 두 때와 반 때(단7:25, 단12:7)와 계시록의 그와 같은 때(계12:14)도 모두 성도를 위해 준비된 때이다. 누구를 위해 결국 종(timing)은 울리나? 태초부터 심판의 때까지 이 모든 시기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거룩한 성이나 성도를 위하여 정해진 것이다. 때를 아는 것은 지혜와 밀접하다. 시편의 한 기자는 성도의 날들을 셀 수 있도록 지혜로운 마음을 주실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시90:12). 성경은 태초부터 심판까지의 시간이 마치 한 마디의 선과 같으며 그 모든 때가 하루의 점과 같다고 선포한다. 

2)양자의 사이 간 (間)

 양자(兩者)는 시공세계에서 관련이 있는 두 쪽의 사람이나 사물이다. 특히 시간과 공간은 항상 동반되기 때문에 시공(時空)이라고 붙인다. 여기서 양자의 사이는 이처럼 결합되어 있는 시공이나 인간 등의 사이(between)이다.   

 ①특정한 두 점의 연결

 이 間은 양쪽의 창문이나 문틈에 햇빛과 달빛 등이 비치는 것이다. 시간이면 두 시점의 간격이고 공간이면 두 지점의 거리이며 인간이면 양쪽의 사이다. 이 모두의 시종은 마치 양쪽에 각각 찍힌 특별한 두 점과 같다. 모든 사람의 날 때부터 갈 때까지 그 시간은 특정한 공간과 인간이 모두 함께 있다.

 ②시간과 공간과 인간

 위의 특정하다는 뜻에서의 핵심은 그것들을 정하신 주체가 어떠한 분인가 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주이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인류와 모든 민족(인간)을 하나로부터 만드시고 그들을 온 땅에 살게 하셨으며 그들이 사는 때(시간)와 거주지의 경계(공간)를 정하셨다(행17:26). 이 시간은 공간을 위해 함께 하고 그 시간과 공간은 모두 인간을 위해 함께 있다. 성경은 이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지음을 받았다고 강조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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