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09-06-08 18:0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제1권 제15장 창조된 인간


칼빈은 14장에서 거짓된 신(神)의 허구성과 하나님의 절대성을 대비하여 설명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극명하게 증거했다. 그리고 본 장에서는 거짓 신과 비교될 수 없는 영광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상태와 기능을 설명함으로써 하나님의 본성과 인간의 피조성을 논증하고 있다.
  칼빈은 태초에 흠이 없는 원시의(原始義)의 상태로 존재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 황송하게도 질그릇에 불과한 아담에게 생명을 주셨고, 뿐만 아니라 불멸의 영혼을 거처하게 하셨으니, 아담으로서는 그의 창조주의 크나큰 자비하심에 영광을 돌려야 마땅할 것이다.

  인간 창조에 대한 칼빈의 논점은 하나님께서 타락이전의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생기로 영혼을 소유하게 하셨으므로 피조 된 인간에게 부여된 ‘영혼의 실체’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증거하려고 한다. 칼빈은 영혼의 실체를 입증하는 데 있어서 첫 번째, “선악을 분간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응답하는 양심”이라고 주장하며, 인간의 정신에 부여된 고귀한 재능들에 신(神)적인 것이 가미된 것으로 “천지와 자연의 비밀들을 탐구하며 그 이해력과 기억력으로 온 시대를 조감하고, 모든 사물을 각기 적절한 순서대로 정리하고 과거에 근거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데에서 나타나는 인간 정신의 영민함”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칼빈은 인간의 영혼이 실체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간의 ‘양심’과 ‘정신’을 통해서 증명하고자 한다.
  칼빈의 주장대로 인간의 영혼이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틀림없다. 칼빈은 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인간의 양심과 정신을 논거(論據)로 제시했다. 하지만 짐승들도 미미(微微)하지만 잘못했을 때 가책을 느끼고 주인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칭찬받을 만한 행동을 했을 때에는 당당한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에 대한 실체를 짐승도 공유하는 양심으로 입증하기에는 불분명하다. 그래서 영혼의 실체를 입증하는 데 있어서 다른 피조물과 완전히 구별해서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종교성에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피조물 가운데서 인간만이 본성적으로 종교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성과 종교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보유할 수 있으며, 이 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인간의 영혼이라고 본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인간을 영적인 존재라 하는 것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정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인간에게만 생기를 공급하셨고, 생기로 완성된 인간을 생령(生靈)로 규정했다. 생령체의 인간은 영(靈)이 살아있는 상태를 의미하며, 이 영적 기능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교통(交通)을 가능하게 하는 종교적인 성질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영혼의 실체는 종교성을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다.
  두 번째,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창조과정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 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부패한 본성의 회복’으로 증거하고 있다. 즉, “중생의 목적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곳에서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3:10).”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은 “타락하기 이전 아담에게 드러난 인간 본성의 완전한 탁월함”이라고 말함으로써 인간 영혼의 완전성을 주장한다.
  칼빈은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결과인 것으로 말하는데, ‘부패한 본성의 회복’이란 명제를 통해서 밝히는 방법이 소극적으로 보인다. 좀 더 적극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규명했으면 한다. 먼저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형상에 대한 개념을 정의해야 한다. 형상의 사전적인 뜻은 관념을 구상화(具象化)하여 나타난 모양과 크기 등을 말하지만, 성경적인 의미는 어떤 크기(size)나 모형(type)과 같이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신령한 것이다. ‘형상’이란 단어가 성경에 최초로 표기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단어를 일반적인 형태나 모양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영적, 육체적 존재를 모두 포함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즉,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은 인간이 이성과 의지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과 순종을 향해 행동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성경은 죽으면 삼일 만에 부패하는 외형적인 육체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저주 받기 이전의 완전한 형상을 말한다. 타락 이전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에 의해서 만들어진 생령(生靈)이다. 즉, 생령은 피조물에서 취한 흙에 하나님의 생기를 공급하여 완성된 것을 말하며, 하나님의 생기는 하나님의 고유한 본질로서 생명의 원천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짐승을 창조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생기도 불어넣지 않으셨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셨으며,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생기’를 공급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창조의 배경에서 살펴보면, 외형적인 형태나 모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적이며 본질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영(靈)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는 말에서도 언급하듯이, 영은 보이는 물체가 아니며, 어떤 형태로 표시하거나 제작할 수 없는 내면적인 것이다. 마치 공기나 인간의 생명을 어떤 형태의 그림이나 조각으로 형상화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형상’이란 외적으로 드러난 어떤 형태나 모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과 결부된 내면적인 것임을 뜻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내면세계를 성경신학적인 관점에서 정리한다면, 첫째,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시나,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를 부여받은 생령으로 창조되었다. 즉,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부분은 보이는 형상이지만 흙으로 지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기’를 공급하심으로써 생령이 된 것은 내면적인 형상을 뜻한다. 둘째, 하나님은 절대 자존적인 자유의지를 지니셨다면, 인간은 절대 의존적인 종속의지를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다. 셋째, 하나님은 영원 자존적으로 존재하는 분이시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기운을 힘입어 피동적으로 존재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로 존재하며 하나님께 종속된 의지로 사역하고, 하나님의 기운을 힘입어야 생존하는 존재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세 번째,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형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영혼의 기능들을 열거한다. 여기에서 칼빈은 영혼의 가장 주된 활동을 “하늘의 생명을 사모하는데 있다.”고 밝힌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오성(이성)과 의지라는 두 가지 기능이 있음에 공감하면서 “오성(이성)이 하는 일은 인정할 만한 것과 인정하지 못할 것으로 사물을 구별하는 데에 있으며, 의지가 하는 일은 오성이 선하다고 인정한 것을 택하고 따르며 또한 오성이 인정하지 않는 것을 거부하고 그것을 피하는 것에 있다”라는 이론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칼빈은 오성(이성)과 의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에 지성을 주셔서 그것으로 선과 악을,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하셨고, 또한 이성의 빛을 안내자로 주셔서 우리가 피해야 할 것과 좇아야 할 것을 구별하게 하셨다.

  칼빈의 말은 인간의 영혼이 이성과 의지에 의해서 자율적으로 선악에 대한 판단과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로 규정된다는 뜻이다. 물론 칼빈의 주장도 타당하며 이성과 의지가 영혼의 기능에 포함된다는 말도 맞지만, 좀 더 심층적인 구분이 필요하다고 본다.
  인간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는 피조물에서 취한 흙과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생기이며, 산(生) 영(靈)과 육(肉)으로 조성된 생령체(生靈體)이다. 영과 육으로 구성된 인간의 기능은 영(靈), 혼(魂), 마음(心), 감각(感覺), 육(肉)으로 구체화된다.
  영(靈)은 피조물 중에서 인간에게만 존재하며, 하나님의 생기에 의해서 생존한다. 영(靈)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죽은 상태로 존재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중생한 것으로 구분된다. 참된 인간임의 표시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종교행위의 모든 것이 영적기능에 달려 있다.
  혼(魂)은 영(靈)과 마음이 일치된 작용의 결과로서 정신과 이성 그리고 사고의 기능이 있다. 정신은 물질적인 것을 초월한 영적인 기능으로 사물을 깨닫는 일체의 작용을 담당하며 이념을 구성한다. 이성(理性)은 논리적이며 원리적인 사유능력을 의미하며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사고(思考)는 추리하는 기능이며, 문제 해결의 과정에서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심리적인 작용을 뜻한다. 그리고 정신과 이성의 연결 작용에서 의지(意志)가 발동하며 사물에 대한 이성적 판단으로 결단을 단행하게 한다. 이 기능이 발달하면 고집이 세며 일명 소신파로 불리운다. 이성과 사고의 연결 작용에서 지성(知性)이 활동하고, 인지(認知)와 깨닫는 기능이 나타난다. 지성이 발달하면 냉철하고 차가운 일명 지성파로 불린다. 사고와 감각이 만나면 감성(感性)이 나타나는데, 사고와 감각의 작용에 따라서 일어나는 느낌을 뜻한다. 현대사회의 심각성은 감각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이 확산되는 데 있다. 감각은 사고의 지배를 받아서 통제되고 사고는 영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데 진리의 실종은 현대인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교회의 예배도 진리중심의 영적 예배보다는 극도의 감각기능을 자극시켜 오히려 사고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마음(心)은 영과 육을 잇는 연결기능을 한다. 마음이 영에 속하면 정신, 이성, 사고의 작용을 발휘하고, 마음이 육에 속하면 감각 작용을 일으킨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에게 두 마음이 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으며, 두 마음은 마음 자체가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의 마음이 영과 육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작용함을 의미한다. 감각(感覺)은 사물을 시각, 후각, 청각, 미각, 촉각을 통하여 대뇌에 전달되어 느끼는 신체기능이다. 대부분의 정보는 오각을 통해서 두뇌에 입력되어 망각과 기억의 장치를 통해서 처리된다.
  육(肉)은 근육, 뼈, 내장, 신경, 두뇌 등의 물질로서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몸이며, 행동의 기능 작용을 수행한다. 불신자들은 보이는 육을 가장 가치롭게 여기며, 육체의 소욕을 충족하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여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이렇게 인간은 영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완벽한 피조물로서 영적인 존재이며, 그 기능에 있어서 인간만이 가지는 독특한 작용을 분석해 보고 영혼의 실체를 입증해 보았다.
  네 번째, 칼빈은 인간의 영혼이 이성과 지성 그리고 의지의 기능이 있음을 확고히 밝힘으로써 아담의 타락에 대한 책임론을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아담은 자기가 원하면 얼마든지 설수가 있었는데,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로 타락한 것이다. 그가 그렇게 쉽게 타락한 것은 그의 의지가 이쪽저쪽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었고 또한 끝까지 변치 않고 인내하는 능력이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과 악을 선택하는 일은 전적으로 그의 자유였다.

  칼빈은 아담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부과한다. 그리고 자유의지와 책임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사람에게 인내를 주셔서 본래의 상태대로 유지되게 하실 수 있었는데도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는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감추어져 있다. 우리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탐구하기를 절제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일 것이다.

  칼빈의 주장에서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칼빈의 논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완전하고 무흠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타락’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적 결과이므로 전적으로 인간에게 책임이 있음을 주장한다. 칼빈은 이 논점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영혼의 실체’와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영혼의 기능’을 열거하며 논증하였다. 이 부분에서는 칼빈의 이론이 상당히 체계적이며 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성경적인 깊이를 더해 갈수 록 확실한 것으로 드러나며 그 증거에 대한 제시 또한 만족할만하다.
  하지만 자유의지와 책임론은 신학적으로 민감한 부분이며, 예정론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서로 상충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절대주권과 자유의지의 개념정립에 따라서 죄의 책임론도 상반된 학설이 대두된다. 이러한 신학적 배경에서 절대와 상대의 개념부터 정리해 본다. 절대(絶對)란 용어는 대립되거나 비교될 것이 없는 상태나, 구속과 제약을 받지 않고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상대(相對)는 절대자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란 스스로 존재하시며 모든 만사를 작정(뜻, 계획)대로 섭리하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상관관계는 절대와 상대의 역학구도 속에서 창조주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상대적인 존재는 절대자에게 완전히 종속된 상태에 있으며, 그 어떤 일이나 존재 자체에서도 자율적인 것은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 만약 절대자의 의지나 계획과 상관없이 상대자가 독자적으로 행동하거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절대자에 대한 도전이며 그 자체로 이미 절대자는 절대자로서의 의미가 무색해 진다. 그러므로 어떤 철학적, 종교적, 신학적인 이론을 논거 하더라도 절대의 개념은 변질될 수 없으며, 절대자의 존재는 영원히 존속됨을 인정해야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엄밀히 말해 절대자에게 완전히 종속된 의지임을 인지해야 한다. 흔히들 어항 속의 물고기에 대한 예를 들면서, 어항 속의 물고기는 자유롭게 헤엄치고 먹이를 먹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항은 어디에 위치해 있으며 물고기의 생사는 누구의 손에 달려 있겠는가. 어항 속의 물고기 역시 본인은 자유를 만끽하지만 이것은 절대자에게 종속된 상태에서 작용하는 의지일 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죄에 대한 ‘책임’의 소재이다. 책임은 상대적인 관계에서 성립되는 용어이며, 법률적인 용도에 따른 제재를 떠맡는 일이다. 즉, 상대자가 절대자에게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가 상대자에게 일방적으로 부과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또한 책임이란 뜻은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쌍방 간의 계약이나 합의가 전제되며, 그것을 위반한 자에게 부과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종속적인 자유의지에 의해서 실행된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 책임은 절대자에게 전가할 수 없다. 만약 책임이 절대자에게 전가될 수 있다면 절대자는 이미 절대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대한 책임 소재는 분명히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난 당사자 간의 문제이므로 절대자에게 전가할 수 없다.
  창세기에 나타난 인간의 타락 사건에서 보면, 범죄의 과정은 사단이 여자를 유혹하고, 여자는 사단의 유혹대로 범죄하며, 남자는 여자의 권유에 의해서 공범이 된다. 범죄의 순서는 사단과 여자 그리고 남자의 순으로 자행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범죄자들을 심리(審理)하실 때는, 먼저 남자인 아담을 불러서 심문하고 다음은 아담의 아내인 여자, 마지막으로는 여자를 유혹한 뱀의 순서로 책임소재를 확인한다. 그런데 뱀은 남자와 여자같이 범죄의 동기와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지 않고, 자신이 범죄의 주체인 것을 인정하며 더 이상의 원인이나 책임소재 운운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가장 간교한 들짐승을 만들지 않았어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지 않았어도, 그 나무를 동산중앙에 설치하지 않았어도, 유혹을 받을 때 간섭하셨더라면…… 하는 등의 의구심이 남는다. 뱀은 이런 문제를 언급할 수도 있음에도, 더 이상의 핑계나 책임소재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뱀과 여자와 남자는 모두 피조물이며, 상대적인 존재이며, 절대자에게 완전히 종속된 상태이기 때문에 감히 절대자 하나님께 범죄의 소재에 대해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절대주권의 영향력은 일방적이며 협의가 없이 철저히 작정대로 행사하는 특성이 있다. 자유의지와 죄의 책임 문제는 신학적으로 난해한 부분이 산재해 있지만, 본고에서는 절대와 상대의 개념을 통해서 재조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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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제16장 창조와 섭리의 불가분의 관계
제1권 제14장 하나님과 거짓 신(神)의 구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