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3권
회심의 위치
회심(回心)은 언약성취사의 맥락에서 보면, 영원세계에서의 하나님의 작정(예정)에 따라서, 믿기로 작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종합적인 체계에 포함된 것이다. 부르심의 범주는 중생과 회심과 믿음의 과정이 시간차 없이, 순간적이며 단회적인 하나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신학자들 중에는 구원의 서정을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소명, 중생, 회개, 믿음,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화’의 도식에 편중해서 고착화된 이론을 전개한다. 칼빈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구원의 서정을 전개하며, 구원의 요건에 대해서는 믿음에 의한 중생과 회개를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필자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 물론 성경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해서 확고히 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행위나 노력으로는 의롭다함을 얻거나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지, 믿음이 중생이나 회개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구원사적 맥락에서 구원의 서정을 개진하다 보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된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첫째, 구원의 서정을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서 인식하고 있으며, 둘째, 구원의 요건 가운데서 단회적이고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소명, 중생, 회개, 믿음, 칭의’와 또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성화’와 ‘견인’을 하나의 개념으로 묶어서 설명하지 못하는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단회적이고 순간적인 ‘회개’의 개념을, 일평생 지속되는 성화의 문제와 결부시켜 혼선을 빚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성경적인 맥락에서 구원의 서정을 재정리해야 함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성경은 구원의 서정과 관련된 문제를 ‘성화’(聖化)라는 명제를 중심으로 해서, 성화의 출발과 과정 그리고 결과로 정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화의 정의는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에 처한 자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변화된 것임을 뜻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불신자에서 성도(그리스도의 지체)로, 이방인에서 하나님 나라의 권속으로 인정되고 변화된 것임을 의미한다.
또한 성화의 근거는 전적인 하나님의 작정에 기초한 것이며, 그 뜻을 성취하는 주체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사역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성화사역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예정)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기인된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 8장 30절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위의 인용구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는 말씀이 소개되는데, 이것은 성화의 근간이 되는 문구이면서 영원세계에서의 작정사역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바울이 설명하는 하나님의 작정사역은 피조세계에서 실현되는 성화(聖化)의 목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창세전부터 복주시기로 작정하신 이유는 당신의 기쁘신 뜻에 기초하신 것이다. 그 목적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대로 복을 주시고 성취하심으로서 인간의 타락과 관계없이 신령한 복을 주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한 것에 있으며, 그 결과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에게 확증시켜 주시고(엡 1:17-18), 선택된 인간으로 하여금 그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는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엡 1:5-6).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작정하신 복[기업](엡 1:11)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리스도로 성취된 교회를 뜻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창세전부터 복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은 이미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라는 문장이다. 바울은 도달하거나 들어가는 지점을 지적하는 목적격 전치사인 ‘되게’를 사용함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된 것이 창세전부터 이미 확정된 사안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미 아들로 확정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된 그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심으로서 완성된 것이다.
여기에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는 말은 과거 능동태 동사로서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화롭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인간 편에서는 영화롭게 되어가는 성화의 과정에 있지만, 시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이미 영화로운 결과물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작정계획과 섭리내용은 하나님의 관점 즉, 영원한 세계에서는 영원히 성취완료된 상태이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피조세계에 계시하는 과정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개념을 통해서 설명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베드로 역시 영원한 개념에 대해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라고 언급한다. 이 말은 인간에게는 하루가 짧게 천년은 길게 느껴지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천년과 하루가 한 경점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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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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