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5-05-06 21:4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기독교강요 이해 3권


제2부 (6~10장) 성도의 생활

성도의 생활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삶이며 그것은 신(神)인식의 결과로 나타나는 신앙의 열매이며 신앙심의 표현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삶의 실제이며 의미로 나타난다. 성도들은 현세와 내세를 공유하며 분명한 삶의 목표와 함께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간다. 중요한 점은 성도생활의 표준인데, 기독교적인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사는가, 아니면 종교적인 규범에 얽매여 사는가이다. 종교의 본질은 신(神)과의 교통을 통해서 인간의 본분을 확보하는 데 있다. 진정한 종교는 장차 다가올 미래의 희망만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도 행복을 만끽하게 한다. 진리는 인간에게 그 무엇으로부터 속박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하고, 자유는 가장 최상의 만족감을 영위할 수 있는 평화를 낳게 하며, 이 모든 것은 영원한 세계를 현실에서 공감하여 절정의 행복감을 맛보게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는 종교적인 계율이나 규범에 의해서 윤리적인 생활을 제도적으로 유도하고 강압한다. 기독교 역시 예외는 아니다. 변질된 기독교는 성도들에게 기복적인 사상을 주입하여 열심과 선행을 촉발하고, 상선벌악(賞善罰惡)의 법칙을 관행(慣行)화하여 축복과 저주를 남발한다. 로마 카톨릭은 인간의 죄를 담보로 해서 그에 따른 보상과 선행을 종신토록 강요하고, 개혁주의 교회는 율법을 생활의 표준적인 규범으로 설정해 놓고 성도들의 삶에 직간접으로 개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종교는 인간의 생활과 직결되지만 살아가는 방법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성도의 생활에 있어서 핵심은 어떤 동기와 이유 그리고 목적에 의해서 살아가게 되느냐에 있다. 대부분의 종교는 그들만의 특정적인 규범이 있고 제도와 의식이 존립한다. 그리고 오히려 종교적인 명분과 규범이 신자들의 삶을 지배하게 되며 그 요구에 부응하는 만큼의 보상이 주어지는 인과(因果)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종교는 필요 악(惡)이 될 수 있으며, 신도에게 또 다른 굴레가 되어 억압의 사슬이 될 수도 있다. 종교폭력은 인간의 영혼을 황폐하게 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인권을 착취하는 잔혹한 무기로 돌변한다. 종교사기(詐欺)는 금전적인 피해나 재산상의 손해만 끼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모독하고 영혼을 유린하는 가장 교활한 범죄이다. 종교는 그 특수성 때문에 초법적인 단체로 활동하며 독립적인 체제로 귄익을 보장받기도 하지만, 도리어 이러한 자율성이 탈선을 조장한다. 올바른 종교를 선택하고, 올바른 종교관을 정립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쉽게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제도적인 모순과 합법적인 폭력성 그리고 교리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올바른 기독교윤리를 실천할 수 있는 성도의 생활에 대해서 신학적 견해를 밝힌다. 첫 번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근거를 확보한 다음 동기와 생활의 중심이 마음에 있음을 논거한다. 두 번째,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핵심으로는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사는 것으로 규정한다. 세 번째, 내세에 대한 명상을 통해서 현세의 감사와 영생에 대한 올바른 동경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과 영생을 사모함으로서 위로받을 것을 촉구한다. 네 번째, 현세에서의 하나님의 선물과 소명에 충실한 자유로운 삶을 제시하고 있다. 필자는 칼빈의 생활신학을 정리해 보면서 그의 문제점과 성경신학적인 기독교윤리에 입각한 성도의 생활관을 정립해 본다.

성도생활의 동인
첫 번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근거와 동기 그리고 변화의 성과와 완전을 위한 노력에 대해서 증거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선한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으로서의 근거가 중생에 있다고 보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동기를 밝히면서 선한 생활은 이론이 아닌 실제이기 때문에 결과가 나타나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촉구하고 있다.

중생의 목표는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와 조화를 이루고 일치하는 삶을 살도록 하며,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양자가 된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도록 하는데 있다.

위의 글을 정리해 보자,
첫째, 칼빈은 중생을 골자로 명시하고 있는데, 중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의(義)와 신자의 순종 사이에서 조화와 일치를 이루기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확고하게 증명해 준다는 것이다. 그의 의도는 그리스도인으로써의 드러난 생활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씨를 공급받아 거듭나고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전부터 선택받은 성도임을 입증하는 말로서 아무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고, 선한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중생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중요한 전제이며, 하나님의 자녀임을 입증하는 단서가 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생활을 논하기 이전에 가져야 하는 자격으로 영혼의 중생 여부와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닌가에 관해 언급한다.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구속의 은총을 알게 하여 선한 생활을 하도록 그 이유를 제시하게 한다.
칼빈은 선한 생활이 하나님의 뜻과 성도의 뜻이 일치를 이루는 조화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중생한 자라야만 가능하며, 중생은 타락으로 인하여 죄와 사망 가운데 있던 자들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된 구속의 은총이 함의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그의 논증은 중생과 하나님의 자녀 그리고 성도의 생활이라는 논리의 흐름을 구사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중심으로 개진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칼빈의 신학은 하나님 영광과 절대주권을 체계적이며 일관된 논리로 개진되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필자도 적극적으로 공감하며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진술하는 데 있어서 유념해야 할 부분은, 명령에 대한 순종 그리고 은총과 보답이라는 이분법적 논증방식과 성도이기 때문에 반드시 선한 생활을 해야 된다는 당위성에 대한 것이다. 칼빈은 구속의 은총을 강조하기 위해서 중생의 목적을 명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선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선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에는 전혀 이의가 없지만, 선한 생활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한다는 것은 신학적인 문제의 소지를 드러낸다. 구원의 확증은 성도의 마음에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확증을 통해서 먼저 하나님 여호와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에 있다.
구원의 확증은 선한 행위에 따라 측정되거나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구원의 확증이 선행으로 입증되어져야 한다면, 성도는 죽는 순간까지 일평생 선행에 대한 극도의 긴장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성도의 생활은 마음에 기쁨과 평화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심리적인 부담과 압박을 가져온다. 성도의 생활은 선택받은 것에 대한 증명 차원이 아니라 성도의 성숙 과정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선택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숙하는 만큼 아버지의 선한 뜻을 추구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선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3권
제5장 면죄부와 연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