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3권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하나님의 나라
미래에 대한 확신과 현재의 고난에 대한 이해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또 한 가지의 개념을 성경신학적 관점 에서 정리해 보자.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인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시 간의 연속선상에서 직선적인 개념으로 해 석하면 안 된다.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 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는 교훈을 한다. 이 말은 하나님께는 시간 이 길고 짧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점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 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 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는 의미로 하나님의 영원성을 증거한다. 이 말 은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할 시초부터 만물을 심판할 종말 때까지의 전체기간(시 간)을 한눈에 조망하고 있다는 뜻이다. 영 원이란 큰 원(圓)안에 하나의 작은 점이 있 는데 이것은 시간을 내재적으로 초월한 영 원세계의 관점에서 순간에 불과한 것이고, 이 점을 펼치면 시작(창조)과 끝(종말)이 형 성되는데 이것은 피조세계의 관점에서 설 명되는 것이다. 따라서 천 년이 하루 같다 는 개념은 펼쳐진 시간을 한 점(點)으로 이 해하는 영원의 관점이고, 하루가 천 년 같 다는 것은 하나의 점을 과거, 현재, 미래의 관념으로 펼쳐놓은 시간의 개념이다.
성경에는 시간을 내재적으로 초월한 영 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이미 완료된 상태로 묘사하거나 아니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태 또는 미래에 완성될 것으로 설명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마 3:2) 는 “가까이왔느니라”라는 헬라어 엘기조인 데 능동태 완료형이며, 가까이 이르다는 의 미로서 천국이 이미 현존하고 있음을 의미 한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마 6:10)라는 말에서도 “임하옵시며”는 헬라어 엘코마이 인데, 과거 능동태로서 ‘존재하다’, ‘나타내 다’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왕국이 나타나기를 구하라 는 예수님의 기도이다. 현재형으로 “또 여 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는 말은, 공간적 개념이지만 이미 제자들의 내 부에 하나님의 나라가 현존하다는 뜻이다. 또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 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 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는 말씀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현존하고 있으며, 그 곳에 제자들의 거처할 곳을 준비하겠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에도 존재 하고, 미래에 준비될 것을 함께 함의하고 있는 의미이다.
성도의 생활은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한 개념을 바르게 이해해야만 현세에서도 천 국을 누릴 수 있고, 미래의 소망도 확실하 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는 의미로 증거한다. 천국 생활의 현 재적 개념은 먹고 마시는 세속화에 있는 것 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 의 뜻을 중심으로 생각함으로서 마음의 평 강과 기쁨을 누리는데 있는 것이다. 기독교 는 현세를 무시한 내세지향주의도 아니고 내세를 무시한 현세지향주의도 아니다. 온 전한 성도의 생활은 피조세계가 주에게로 돌아가기를 소망하며, 현세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선한 일 하면서 사는 것이다.
성도 생활의 자세
네 번째, 칼빈은 성도의 생활에 대해서 현세에서의 하나님의 선물과 소명에 충실 한 자유로운 삶에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현세에서의 하나님의 선물은 현실적 인 축복이며 환경의 형통과 재물의 풍요로 움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도의 생활은 하 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축복을 소명에 맞도 록 사용하면서 사는 것이라 말한다.
칼빈은 극단적인 사고의 위험성을 방지 하기 위해 성경에 나타난 일반적인 규범을 지켜야 한다면서 바울의 말을 인용한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네 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 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 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형제들아 내 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 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 니라 (고전 7:26~31).
하지만 칼빈이 채택한 바울의 인용문은 로마의 핍박으로 인한 환란의 때를 대비한 말씀으로서 칼빈은 환란에 대처하는 바울 의 권고를 성도 생활의 규범으로 채택하여 청교도적인 청빈생활을 주창하고 있다. 그 는 청빈 생활의 당위성을 촉구하기 위해서 물질에 대한 관점과 그에 따른 성도의 자세 를 설명한다.
우리로서는 다음과 같은 원리를 따라야 할 것이 다. 곧, 하나님이 섭리로 베풀어 주시는 것들을 사용할 때에 그것들을 만드시고 주신 하나님의 목적에 맞추어서 사용하면 잘못을 범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창조하신 것 은 우리를 망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중략) 첫째로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 을 지으신 분을 알고 또한 그의 은혜에 감사를 느끼도록 가르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붙잡는 것이 육체의 정욕을 억제하는 한 가지 길 이다. (중략) 현재의 삶을 멸시하며 천국에서 누 릴 그 영원한 삶을 묵상하는 것 보다 더 확실하 고 빠른 길이 없다. (중략) 가능한 한 적게 탐하 며, 반대로 사치를 제거하는 것은 물론 지나치게 풍부한 상태를 모두 끊어내며, 또한 도움이 되는 것들이 오히려 방해거리가 되지 않도록 부지런 히 경계하는 것을 우리의 끊임없는 목표로 삼아 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그들의 궁핍한 상태를 인내로 견디기 를 배워서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심으로 고통을 받는 이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주님은 우리들 각자가 인생의 온갖 활동을 하는 가운데 우리 각 자의 소명(召命:부르심)을 기억하고 존중할 것 으로 명하신다는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이처 럼 자기의 소명을 이루는 일을 삶의 목표로 두는 사람만이 적절히 틀이 잡힌 삶을 살아간다 하겠 다. 자기에게 지정된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온 당치 못하다는 것을 잘 알므로, 경솔하게 충동적 으로 움직이지 않고, 자기의 소명에 합당한 정도 이상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천한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자기의 의무를 저 버리고 사사로운 생활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렇 게 하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정해 주신 일과 사 명을 저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칼빈의 주장은 물질을 사용할 때는 하나 님의 목적에 맞는 생활의 원리를 네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알 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 때 육체의 정욕 을 제어하게 된다. 둘째, 현재의 삶을 멸시 하며 영원한 삶을 묵상해야 한다. 셋째, 탐 욕과 사치와 지나친 풍요를 경계해야 한다. 넷째, 가난한 자들은 궁핍을 인내로 견디기 를 배워야 한다. 다섯째, 소명을 기억하고 존중하며,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온 당치 못하다. 필자는 물질로 인한 가난과 풍요, 현세와 내세에 대한 이분법적인 구도 의 대비적인 발상보다는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목적을 통한 가치관의 정립 과 주어진 현실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수납 할 수 있는 성경의 해석체계를 확보하는 것 이 합당하다고 판단된다. 이 두 가지의 개 념과 의미를 확고히 정리함으로서 성도 생 활의 올바른 자세를 확립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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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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