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5-10-28 22:1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기독교 신앙의 원형


3. 신학적 치유의 방향
1) 서구신학을 넘어서, 그 기여와 한계
보수주의신학의 한계
반면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받는 개혁신학 혹은 넓은 의미로 보아 보수주의신학, 좀 더 현대적인 의미의 복음주의신학의 형편은 어떠한가? 보수주의신학은 16세기 종교 개혁을 지나면서 종교 개혁자들이 깨달은 구속사적 진리성을 고백의 형식으로 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은 그것을 점차 절대화하는 경향을 띠었고 그것이 이른바 교의신학이라는 형태로 발전되었다. 교의(dogma)는 역사적 차원에서 볼 때 매우 소중한 신학적 유산이다. 교의는 언제나 교회를 훼손하려는 이단들의 도전 앞에 교회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하여 만든 진리 깨달음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성경의 포괄적인 해석과 총체적인 맥락에 의해 새롭게 규정되고 재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 이 작업을 함에 있어서 보수주의자들은 충분한 성찰과 고려가 미비했다.
17세기 신앙고백을 정비하여 교회를 지켜가려는 틀을 완비하기도 전에 18세기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를 최고봉으로 하는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교회는 그들의 화려한 인식론적 무기와 자연과학적 도전 앞에 주눅이 들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들과 응전할 강력하고도 세련된 무기를 가지지 못하고 이전의 교리적인 방어벽 안에 안주했다. 그 결과 19세기를 지나면서 점차 거세지는 학문적인 도전 앞에 보수주의 신학은 신학적 응전의 분명한 입지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자유주의신학은 서구 대학을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J, E, D, P로 대변되는 문서설이 점차 그들의 절대적인 교의로 둔갑하기 시작했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치 학문적 유아로 취급을 당했다. 이것이 서구신학의 비극의 역사였다.
보수주의신학은 그런 와중에 종전의 교리를 붙들고 교리교육을 통해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했고 그것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볼 때 유아적인 행태로 비추어졌다. 이런 와중에 바르트가 방대한 분량을 통해 자신이 종교개혁신학의 적자임을 주장하는 자기 방식의 현란한 교의신학을 주장하고 나오자 보수주의자는 자신들의 교리적 작업의 초췌함을 느끼며 거듭된 열등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보수주의신학은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신학자들로부터는 성경보다는 교리를 우상화한다고 비판받고, 또한 바르트 주의자로부터는 비논리적이며 비학문적인 교리에 매달려 있다고 비판받는다. 실상 보수주의신학의 교의신학은 충분히 그런 비판의 빌미를 가지고 있다.
바르트 신학의 태풍이 20세기 초반을 휩쓸고 지난 사이에 보수주의 신학은 구라파에서는 점차 목소리가 사라졌고, 청교도 신학의 기세가 남아있는 미국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른바 근본주의(fundamen-talism)란 이름으로 자유주의 신학과의 신학논쟁이 있었다. 그들은 성경에서 몇 가지 중요한 교리적 내용을 발췌하여 그것을 믿지 않으면 모두 인본주의자라고 비판하는 편협성을 드러내었고, 그것은 결국 반대편에 의해 옹졸하고 축소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후 근본주의자들은 학문적 전선에서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이 사건 이후 미국에서는 근본주의적 경향을 반성하는 이른바 복음주의신학(evangelicalism)이라는 경향이 생겨났다. 넓은 의미의 복음주의는 원래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작정보다는 인간편의 구원경험과 거듭남의 강조, 체계적인 신학적 학문성보다는 복음전도와 선교에 대한 열심, 더 나아가 사회봉사 등과 같은 실천적인 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근본주의 신학에 대한 반성적 움직임의 일환으로 새로운 신학적 작업의 중요성을 표방하면서 20세기 초반을 지나면서 복음주의신학교가 여기저기서 생겨나기 시작했고 최근까지 이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강조하되 성경 그 자체의 통일성 확인을 통한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세계관의 형성이라는 근원적인 작업보다는 현대학문에 대해서는 보다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구원론 중심의 좁은 의미의 복음을 추출하며, 그것을 현대인들에게 이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라는 복음 전도차원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현대 복음주의신학은 현대인들의 입맛에는 그럴듯하게 차려놓았지만, 성경의 총체적인 논리를 통해 드러나는 신관의 정립과 신관에 근거하는 총체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몇 가지 새로운 면모를 띠는 복음주의신학이 다소 영향력을 끼치고 있지만 기독교 진리성에 대한 체계적이고 근원적인 정립이 없으므로 그것은 시대정신과 철학적 논리를 강력한 무기로 하는 인본주의의 도전 앞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천 년 신학의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다.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복음주의신학은 미국의 자본과 힘을 배경으로 하여 한 시대 일정의 영향력과 선교의 사역을 나름대로 감당하였지만 이미 세속주의의 유혹과 현대 학문의 날카로운 역습 앞에 역풍을 맞고 있다. 이미 복음주의신학의 내부에 심각한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요컨대 서구 신학의 대세를 형성하고 있는 자유주의신학은 성경관에서 빗나감으로 그들이 아무리 그럴듯한 논리를 가지고 신학적 주장을 하지만 그것은 이미 인간 이성의 사유와 경험의 산물인 철학적 사상과 논리에 감염된 주장일 뿐이다. 그것은 결코 역사를 작정하신 대로 주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생명의 논리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종교적 경험에 대한 인간의 관념에서 만들어진 주장일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철학자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 1804~1872)가 주장한 대로 신학은 인간의 생각을 투사(projection)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걸맞은 것이다. 그런 주장이야 얼마든지 기독교 밖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은 엄밀히 말해 신학이라는 영광스런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신학을 가장한 철학적 논리일 뿐이다. 이런 철학적 논리를 그 알맹이로 하는 신학의 가르침 속에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신앙이 형성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반면 보수주의신학은 성경의 절대권위를 강조하면서 그 명분을 지키려고 애쓰지만 자유주의 신학의 학문적 논리 앞에 열세이다. 종교 개혁 이후 너무 오랫동안 교리의 틀 안에서 안주해온 나머지 성경 그 자체의 전체적인 논리와 흐름을 이해하는데 너무도 부족했다. 20세기 초반에 들어오면서 보스(G. Vos)이후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의 흐름을 찾으려는 건전한 시도가 있었고, 그 흐름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시도 역시 구속사적 전제에 묶여 있으며 성경의 역사성과 그 흐름을 주목하느라 성경이 지니고 있는 언약성취사적 통일성과 하나님 중심적인 계시성을 구조적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그 결과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의 총체적인 원형을 드러내는 데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구속사적 보수주의신학은 지나온 시대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오는 역할을 나름대로 감당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더욱 포괄적인 성경해석의 원리에 의해 성경 전체를 증거하고자 하는 진리의 세계로 전진하여야 한다. 신학의 정체성과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성경 자체의 논리성을 찾아 그 논리와 근거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증거 함으로써 가능하다. 전통적인 교리는 그 당대에 교회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으로 소중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새롭고도 포괄적인 성경해석에 비추어 전체적인 구조 안에 자리매김 되고 근본적으로 성경 그 자체의 논리구조 안에 재조정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서구 보수주의 신학은 극복되어야 할 한계를 가지고 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규욱 목사 (장안중앙교회)

기독교강요 이해
여호와의 영원성 찬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