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5-10-28 22:4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기독교강요 이해


제 3 부 (11장~19장) 성도의 칭의
칭의의 상태
두 번째, 칼빈은 칭의가 그리스도의 신성에 의해서 실제로 의롭게 된다는 오시안더의 주장에 대해 신랄하게 반박한다.
오시안더는 첫째로, “의롭다 하심을 받다”라는 말을 값없이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된 다는 뜻만이 아니라 실제로 의롭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며, (중략) 둘째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의가 되신다고 강조하지만, 이는 그가 제사장으로서 죄를 속죄하심으로써 우리를 대신하여 아버지의 진노를 푸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요 생명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어 있는 상태로 우리가 지각하는 두 가지-즉, 칭의(稱義:justification)와 성화(聖化:sanctification)-도 서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은혜 안에 받아들이시든지 간에 동시에 그들에게 양자의 영을 베풀어 주셔서(롬 8:15) 그의 능력으로 그들을 자신의 형상으로 다시 만드는 것이다.
오시안더의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오 사람이시므로 그가 우리를 위하여 의가 되신 것은 그의 인성(人性)이 아니라 신성(神性)과 관계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설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의가 되셨다 손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의가 되셨다는 바울의 말씀(고전 1:30)과 그것을 과연 어떻게 조화 시키겠는가? 우리를 위해서 의가 되시는 일은 중보자에게만 독특하게 나타나는 역할인 것이다.
위의 글을 정리하면, 오시안더는 의롭다함을 입은 자는 실제로도 의롭게 된다는 주장이며, 그리스도께서 의가 되신 것은 제사장 사역을 담당하신 인성(人性)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신 신성(神性)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칼빈은, 칭의는 법정적인 의(義)지만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의롭게 성숙하게 되는 개연성이 있음을 밝히고 그리스도의 의의 사역이 인성이 아니라 신성이라면 신성은 성부와 성령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중보사역의 독특성이 상실된다고 피력했다.
하지만 그리스도 사역 자체는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사역하시는 것이 때문에 굳이 인성과 신성을 구분지어 설명할 필요는 없다. 만약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인성에만 국한 시킨다면, 신성은 어떤 때에 어떻게 분리되어 각각 개별적으로 역사하는가, 그리고 신성의 사역과 인성의 사역은 무엇을 기준으로 구분되며 어떤 일로 확정되는가에 대한 의문이 증폭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본질적인 속성으로서 말씀이신 하나님을 뜻하며, 인성은 신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셔서 계시를 목적으로 사역하시는 총합적인 섭리의 방편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경대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요 1:1) 라는 것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성 은 신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이고, 그리스도의 사역은 전 생애의 행적을 통해서 계시를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성의 측면에서 사역을 이해하려는 오시안더의 주장이나 신성과 인성을 구분해서 증거하려는 칼빈의 의도 모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판단된다. 그리스도 사역의 총체는 예수가 구약의 언약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신성이 담당했는가 아니면 인성이 담당했는가가 쟁점이 아니라 논의의 핵심은 “그리스도” 자체를 증거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칭의의 성격
세 번째, 칼빈은 행위가 칭의에 유효하다는 스콜라신학자들의 가르침을 논박한다.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나 바울이나 모두 동의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무지 율법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의로운 신분을 얻는데 필수적인 그 행위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들이 우리에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교황주의자들은 일반 평신도나 신학자들이나 모두 이 문제에 대해서 이중으로 속임을 당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믿음을 자기들의 공로에 대해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시기를 기다리는 양심의 확신이라 부르기 때문이요,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의를 전가시켜 주시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데 성령께서 도움을 주시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중략) 롬바르드는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방법이 두 가지 라고 설명한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인데,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서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사탄이 죄로써 우리를 포로로 잡고 있었는데 그 사랑을 통하여 그 죄가 소멸되기 때문에 사탄이 우리를 정죄할 구실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위의 인용구에서 교황주의자들의 오류를 살펴보면, 믿음에 대해서 “양심의 확신” 즉, 인간의 의지결단에 따른 신념으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의 의지에 따라서 의가 실행된다는 견해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칭의에 대한 교황주의자들의 주장은, 인간의 결단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써 의로운 자들은 당연히 상급을 요구할 자격이 부여되고, 인간의 신념에 의해서 거룩한 삶을 추구해 나갈 때 성령이 도움을 줌으로서 의가 구체화 되며, 인간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야만 의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 자신의 행위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물리치고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그리스 도의 완전하심만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우선, 하나님은 죄인의 비참한 처지 이외에는 자신 의 긍휼을 불러일으킬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보시고 그를 긍휼히 여기사, 황송하게도 자신의 순결하고도 값없이 베푸시는 선하심으로 그 죄인을 받아들이기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심을 깨닫는 지각을 죄인에게 주셔서, 그로 하여금 자기의 행위에 대해 절망을 갖게 하고 동시에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맡기도록 하시는 것이다. 죄인이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서 자기가 하나님과 화목 되었음을 깨달을 때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소유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의의 중보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을 때에 죄인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다.
아무리 성자들이 사랑을 행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니 그 불 완전한 것이 어떻게 공로로 인정되는 근거가 될 수 있겠는가? (중략)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 자들은 행위의 공로와는 상관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칼빈은 교황주의들을 의식하면서 믿음에 의한 칭의는 인간의 행위를 전적으로 무시하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그리스도의 완전성에서 기인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교황주의자들의 선행은 불완전한 것이 되며, 선행의 공로도 인정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공로에 의한 칭의는 불가능하다고 반박 하는 것이다.
칼빈은 교황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인간의 공로와 선행의 불완전성을 확실하게 논박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중보사역 그리고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에 대해 필자도 칼빈의 주장에 공감한다. 그러나 인간의 선행과 공로가 아니라면 믿음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에 대해서는 좀 더 확실한 체계가 필요하다. 칼빈은 칭의의 논의 맥락을 인간의 상태와 의지로부터 취급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간의 신념과 믿음, 자유의지와 선행,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노력이 상호대응관계에서 취급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의 범주 역시 필자가 앞의 단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인간의 타락에서 출발하면 안 되고, 창세전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을 근거로 해서 총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만 칭의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은 물론 하나님의 존재확증과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라야 칭의는 믿음의 결과가 아니라 선택의 결과이며, 믿음은 은혜의 본질이 아니라 은혜의 수단인 것을 확고히 할 수 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여호와의 영원성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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