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제 3 부 (11장~19장) 성도의 칭의
선행과 칭의의 상관성
칼빈은 14장에서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에 대해서 밝힌다.
어느 누구라도 행위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고 오 히려 반대로 사람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사랑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그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은 과연 매우 올바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와 건전한 스콜라 신학자들 사이에 별 논쟁이 없다. 다 만 한 가지, 그들이 “칭의”라는 용어에 성령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율법에 순종하도록 하시는 갱신의 역사 (renewal)를 포함시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사실 그들은 중 생한 사람의 의에 대하여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 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번에 화목되지만 그 후에는 선행 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되며 그 선행 의 공로로 말미암아 받아들여진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신자의 평생 동안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의(義) 이외에 다 른 의(義)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중보자로 남아 계셔서 아버지를 우리와 화목시키시며, 그의 죽으심 이 또한 영구한 효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깨끗이 씻으심과 보속하심과 속죄하심, 그리고 완전한 순종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불법한 것들이 가리워지 는 것이다.
위의 글에서 스콜라 신학자들의 주장은 하나님과 의 화목과 선행의 공로를 통한 의인의 완성을 주장 하지만, 칼빈은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일관되게 주 창하면서 그들의 이론을 반박한다. 스콜라 신학자 들의 주장 이면에는 인간은 자유의지에 의해서 선 행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에 따른 인간 스스로의 업 적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처 음부터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음을 말하고, 인 간은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임을 증언하고 있으며, 인간의 공로와 업적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행 동임을 명시하고 있다.
인간의 선행과 공로주의 사상은 인류의 타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선행과 공로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와 주권이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어떤 상 황에서나 인간이 섭리의 주체로 자리한 결과이다. 인간은 죄 중에서 잉태하여 출생한 존재이기 때문 에 행동과 상관없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선행(善行)을 운운한다는 것은 인간의 존재가 어떠한 것인 지를 모르는 무지함에서 오는 것이다. 일반적인 선 행의 개념은 사회적인 통념이나 시대의 문화에 따 른 윤리 도덕적인 착한 행동을 뜻한다. 하지만 기독 교적인 선행은 인간이나 사회의 기준에 따른 판단 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행동을 의미한 다. 이 말은 인간의 행위를 하나님이 판단하신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관점에서 선행과 악행을 구분한 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잉태되어 일생동안 죄인으 로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 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 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 렀느니라”(롬 5:12)고 증거하며,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고 증거한다. 바울의 말대로 인간은 죄 인이기 때문에 선(善)을 행할 능력이 없고, 행하는 것마다 죄가 된다는 사실과 단 한 사람도 여기에서 제외될 수 없음을 확고히 해야 한다.
혹자들은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서 착하고, 준법 정신이 강하며, 이웃에게 좋은 일 하는 것을 선하다 또는 선행으로 단정한다. 하지만 기독교적인 선과 선행은 개념을 달리한다. 선은 하나님의 좋으심이 며, 선행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행동을 뜻한 다. 반대로 악은 하나님의 싫어하심이고, 악행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싫어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인 류의 시조인 아담은 사단에 미혹되어 하나님과 같 아지려는 동기에서 선악을 알게 되는 열매를 따먹 게 되었고, 그 결과 인간이 판단의 주체가 되어 선 과 악을 결정짓는 과오를 범하게 된 것이다. 선악을 아는 일은 하나님의 고유권한이며, 하나님만이 선 악을 판단하시는 주체인데, 인간이 하나님의 위치 에서 판단하고 심판하는 섭리의 주체가 된다는 것 이다. 이것이 인간의 악행이며, 인간에게 죄가 되 는 것인데, 이러한 죄의 속성을 본성적으로 지닌 인 간이 어떠한 행동을 한다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선 행(善行)이 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본능적으로 자기의 행동을 미화하거나 업적을 과시하려는 욕구를 갖고 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은 자신 의 제물이 자기가 판단할 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 다고 생각함으로서 동생을 살해했다. 평가의 주체 는 가인이 아니라 하나님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제물이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울분으로 살인범 죄를 자행한다. 노아의 홍수이후에는 심판을 모면 한 인류가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 짐을 면하자”(창 11:4)라는 모의를 한다. 이 사건은 인간의 공로와 업적을 과시하려는 최초의 직설적 인 표현이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스스로 주체가 되려하고, 인간의 행위에 대한 평가도 자기들 스스 로의 기준에서 판단하며, 끊임없이 인간의 업적과 공로를 과시하려고 한다.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의 선행사상 역시 이와 무관 하지 않다고 본다. 타락한 인간의 죄성을 갖고 선행 이 가능하다는 발상도 기발하고, 그것을 선행으로 단정하여 업적을 평가받으려는 시도 역시 과도한 억지이다. 성경은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 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고전 1:29)이라는 말과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고후 10:17)라는 말로써 일축한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인정받고, 구원에 이르게 했 기 때문에 인간은 자랑할 것이 없으며, 설령 자랑하 려면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치하(致賀)하라고 말한 다. 더군다나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입 어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타락한 죄인에게 서는 그 어떠한 선(善)도 발견할 수 없으며, 생각과 마음조차도 이미 죄로 정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 한다면 바리새인과 같은 공로와 업적을 과시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의 출발은 창세전 부터 기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작정된 사안으로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 하고 흠이 없는 의로운 자로 작정하셨다는 말이다.
공로주의의 문제점
칼빈은 15장에서 인간의 행위의 공로에 대한 자랑 은, 의를 베푸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구원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린다고 한다.
행위로 말미암아 의를 얻기 위해서는 율법을 완전무결하게 다 준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상의 완전함의 정 상(頂上)에 올라 있어서 책할 과실이 전무(全無)한 상태에 있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는, “창세전에”, 곧 영원 전부터, “그리 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되, 우리 자신의 공로대로가 아니라 “그 기쁘신 뜻대로” 하셨다고 말하며(엡 1:4~5), 또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망의 저주 에서 구속함을 받았고, 멸망에서 자유함을 얻었다고도 말하 며(참조, 롬 8:17; 갈 4:5~7), 그의 피로 말미암아 화목되었다 고도 말하며(롬 5:9~10), 그리스도의 보호하심 아래 들어갔 으므로 멸망의 위험에서 해방되었다고도 말하며(요 10:28), 그렇게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았으므로(참조 롬 11:9) 우 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영생에 참여한 자들이 되었고, 소 망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칼빈은 인간이 완전무결하지 못하면 행위로는 의 로워질 수가 없다고 말하면서 적극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주창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완전하지 못 하기 때문에 행위로 의로워 질수가 없지만, 하나님 께서는 당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서 창세전부터 그 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을 의롭게 선택하셨으 며,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고, 영생에 참여한 자 되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게 하 셨다고 밝힌다. 그의 증언은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 하는데 있어서 획기적이며 예정론을 주창하는 신 학자다운 면모를 보인다. 이에 대해 찬사를 보내지 만, 필자의 아쉬움은 칼빈의 신학논리가 일관되게 작정과 예정 그리고 성취의 도식으로 개진되지 못 한다는데 있다. 칭의의 논리도 처음부터 작정-예 정-언약-성취의 계시적인 원리에 입각해서 전개 되었다면 죄-타락-구원의 구속사적 범주에서 탈 피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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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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