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제1권 제16장 창조와 섭리의 불가분의 관계
칼빈은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에 연이어 창조주요 섭리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이치를 증거한다. 칼빈은 이원론에 기초한 이신론(理神論)과 우연론 그리고 운명론에 대해 비판을 가하며,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대한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를 견지(堅持)하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피력한다.
첫 번째, 칼빈은 철학자들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주창한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철학자들의 이론은 “피조물들이 우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막을 것이 없고, 사람이 자기 의지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막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 신은 게을러서 활동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상상하는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의 주장, 그리고 “신(神)이 공중의 윗부분을 다스렸고 아랫부분은 운명에 맡겨두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으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발견한 다음에는 곧바로 그가 또한 영원하신 통치자시요 보존자시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천체의 틀과 그 각 부분들을 보편적인 운동을 통해서 운행하실 뿐 아니라, 심지어 작은 참새 한 마리에 이르기까지(마10:29) 그가 지으신 모든 것들을 지탱시키시고, 양육하시고 보살피시는 분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칼빈의 말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초월해 계실 뿐만 아니라 피조세계를 직접 통치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피력한다. 하지만 이신론(deism)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 피조세계를 인간에게 양도하시고 자연은 스스로의 법칙에 의해서 운행된다는 견해이다. 이 주장은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끝내시고 하늘에 좌정해 계시며 피조세계와 인간의 역사 속에서 더 이상 간섭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신론 사상은 카톨릭의 교황주의를 확고히 하는 데 기여한다. 교황주의의 근간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그의 후계들에게 권세를 이양하심으로써 교회의 수장인 교황에게 절대권세가 부여된 것에 있다. 결국 이신론(理神論)은 신(神)을 공간의 범주에서 이해하여 내재신과 초월신(超越神)으로 구분 짓고 그 중에서 내재신(內在神)을 부정하며 초월신 만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초월’과 ‘내재’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공간을 초월해서 편만(遍滿)하고 충만(充滿)하신 영원한 신(神)이심에도 불구하고 피조세계의 공간에 예속되어 지배를 받는 존재로 오판한 것이다. 일부 보수주의신학자들도 하나님의 존재영역을 표시할 때 하늘과 땅 즉, 초월과 내재를 혼용해서 사용한다. 이러한 용어사용은 하나님이 자칫 공간에 구속되는 존재로 오해받을 수 있는 소지가 있다. 하나님은 이곳저곳에 국한되는 분이 아니라 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초월과 내재라는 용어보다 ‘영원’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다.
그리고 칼빈은 운명론과 우연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은밀하신 계획에 따라 되어 진다는 것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생명이 없는 물체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물론 각기 본성적으로 자신의 특성을 부여받았지만 언제나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그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그저 도구에 불과하며,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것들을 그의 뜻하시는 만큼 효력을 발휘하게 하시고, 그 자신의 목적에 따라서 그것들을 이런저런 식으로 힘을 발휘하게 하시는 것이다.
칼빈의 주장대로 운명론에서는 섭리 주체가 불분명하며 목적과 방향이 없으나, 작정론에서는 섭리의 주체로서 하나님의 존재가 분명하며 그의 목적을 따라 만사가 운행된다.
운명론은 세상만사가 미리 정해진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고 하는 사상으로서 숙명론이라고도 한다. 특징은 세상의 모든 일에 논리적인 인과(因果)관계 같은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자신의 죽음이 정해진 날에 죽도록 운명지어져 있기 때문에 어떤 노력이나 주의를 기울여도 재앙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체념해 버린다. 운명론은 정해진 운명이 모든 삶을 지배한다고 믿기 때문에 모든 일에 대해 동기부여가 취약하고, 삶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목적의식이 결여됨으로써 냉소적이며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한다. 결국 운명론은 삶에 대한 나태와 범죄에 대한 방관으로 삶에 대한 적극성 상실과 자기반성이 결여됨으로써 허무주의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작정론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있고, 뜻을 이루기 위한 목적과 기한이 정해져 있다. 작정론자들의 행동윤리는 하나님의 뜻이 선하고 가치로운 것이기 때문에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삶 자체가 의미있고 소중한 것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한 뜻을 향한 동일한 목표의식이 설정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이 나타나며 만사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작정론자였던 바울도 이러한 하나님의 선한 뜻을 깨달았기에 죽음과 삶 모두를 긍정적으로 수용했으며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치열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작정론은 만사가 하나님의 계획(작정, 뜻)대로 섭리된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며 열정적으로 살아가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삶의 원리이다.
두 번째, 칼빈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특별섭리를 논거한다. 칼빈은 피조세계에서 발생하는 자연현상에 대해서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천명한다.
하나님의 확실한 명령 없이는 단 한 방울의 비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리고 새가 공중을 날아다는 일이 하나님의 명확한 계획에 따라 지배를 받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선지자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높은 곳에 거하시면서도 자기를 낮추사 천지에 일어나는 일을 모두 살피신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칼빈의 주장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 일치하며 필자도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칼빈의 신학사상은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 중심적이며, 하나님 절대주권적이다. 하늘과 땅에서 발생하는 모든 현상들, 즉, 가뭄과 홍수, 풍년과 흉년, 사고와 안전등의 모든 상황과 사건은 하나님의 작정에 기초한 하나님의 섭리역사이다. 좀 더 보충해서 말하면, 먼지 날아가는 방향이나 나비의 날개짓까지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말의 의미는 피조세계 전 영역에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행사되지 않는 곳이 없으며, 일의 비중이나 규모와 상관없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의 범주는 시공을 초월하여 충만하기 때문에 세상만사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벗어나서 되는 일은 결단코 없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전능성에 손상이 될 것이며, 전지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는 치명타를 입게 될 것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생사와 관련해서 “사람들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성의 성향에 따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지만, 사람 자신이 자기가 바라는 곳으로 움직여 가는 것이라고들 이야기 한다” 는 것에 대해서 “선지자와 솔로몬이 권능만이 아니라 선택권과 결정권까지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반박한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선택결정권을 정면으로 다음과 같이 논박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결정 없이는 세상의 그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지극히 우연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하나님께 속하는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가령 길가의 나무에서 한 가지가 부러져서 지나가던 행인이 맞아 죽는 일이 일어났다고 하자. 이보다 더 우연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주께서는 전연 달리 말씀하신다. 곧 하나님께서 친히 그 사람을 살해자의 손에 넘기셨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출21:13).
그리고 어떤 자들이 높아지고 또 다른 자들이 낮은 처지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밀하신 계획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의 말대로 하나님의 작정섭리는 인간이 출생하기 이전부터 세우신 계획에 따라 분초도 어김없이 완벽하게 성취된다. 에서와 야곱의 생애도 이미 태중에서 작정하신대로 섭리하셨고, 선지자 예레미야를 부르신 것도 태중에 잉태되기도 전에 이미 예정하셨으며, 인간에게 신령한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도 창세전에 이미 결정하신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출생하기 이전부터 인생사를 계획해 놓으셨고, 계획대로 출생시켜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치밀하게 섭리하심을 뜻한다. 어느 인간도 자기의 혈통과 출생 그리고 모양과 인생 전반의 역사를 자신의 설계대로 할 수는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는 자들은 마치 인생을 자기의 계획과 결정에 따라서 창출해 가는 것으로 착각한다. 어느 인간도 스스로의 의지로 판단하거나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인간에게 그러한 자유의지가 있다면 스스로에게 명령하여 기억하고 망각하는 두뇌 기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이므로 무슨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선택하거나 결정할 수 없으며, 일의 성과나 결과를 독자적으로 계획하거나 성취할 수 없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칼빈은 작정론을 진술함에 있어서 스토아 철학의 운명론과 차별성을 둔다. 하나님의 작정섭리는 모든 만사가 철저한 계획에 의해 진행됨으로써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섭리됨을 뜻한다. 그리고 운명론 역시 자연현상이나 인생사가 ‘정해진’ 운명이기 때문에 변경할 수 없다는 이론이다. 즉, 작정론과 운명론의 동일한 점은 모든 만사가 ‘정해진’ 대로 진행된다는 것이며, 확정된 사건과 현상 그리고 역사를 인간이 변경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작정론과 운명론을 혼동하거나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또 한 가지 문제점은 ‘우연’에 대한 이해이다. 성경에도 가끔 ‘우연히’란 단어가 사용되지만, 운명론자들은 대부분의 사건들을 ‘우연’으로 처리함으로써 일이나 삶의 동기와 목적이 없이 막연한 삶에 대해서 회의(懷疑)나 체념을 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다만, 일어나는 일들의 질서, 이유, 목적, 필연성 등이 대부분 하나님의 목적 속에 감추어져 있어서 인간의 생각으로는 파악할 수가 없으므로, 그런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분명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우발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산 속에서 강도를 만나 죽은 사람의 예를 들면서 죽음의 모든 정황을 보고는 성격상 우발적인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섭리가 권위를 발휘하여 그 목적으로 향하게 하였음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칼빈은 철저히 하나님의 작정을 주창하고 있지만, 작정과 운명 그리고 일의 성격상에 있어서 계획적인가 아니면 우발적인가에 대한 설명이 미흡하다. 이것을 성경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좀 더 분명하게 대비되는 부분과 차이점을 확인 할 수 있다. 운명론은 자연현상과 인생사의 주체, 발생되는 일의 이유와 목적이 불분명하고 확인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작정론은 섭리의 주체가 하나님이고, 동기는 작정하신 계획을 이루기 위함이며, 그 이유는 언약성취의 섭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한 것에 있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기 위한 것에 있다. 또한 운명론은 섭리의 체계가 없고, 우발적이며, 체념적이다. 반면에 작정론은 섭리의 주체, 동기, 이유, 목적이 분명하고, 그에 따른 확고한 체계를 구성하고 있으며, 목적에 따른 섭리의 이면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열정적인 삶의 기반이 된다. 이러한 작정론의 체계는 즉흥적이거나 상황에 따라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확정된 하나님의 작정계획에 기초한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세우신 작정계획을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이스라엘의 열조인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역사를 섭리해 가신 것에서 확증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의 구조가 언약(구약)과 성취(신약)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성경의 체계를 통해서 만사가 하나님의 작정대로 섭리되어진다는 사실을 확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 기초해 볼 때 ‘우연’이란 어떠한 사건이나 환경 또는 일이나 상황에서도 성립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연(偶然)은 뜻밖에 저절로 된다는 의미로서 하나님을 모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바르게 인식한다면 성립될 수 없는 없는 용어임이 분명하다. 물론 성경에도 ‘우연히’란 용어가 몇 군데 사용되고 있다. 첫째, 과실로 인해 사람을 죽였을 경우에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히브리어는 페타([t'P)이며 ‘갑자기’, ‘불시에’라는 부사로서 ‘고의적이 아닌 것’임을 뜻한다. 둘째,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일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는데, 이는 히브리어 미크레(hr,q]mi)이며 ‘우연한 만남’, ‘일어나는 일’이라는 의미로서 여기에서는 경위를 가리키는 맥락에서 ‘일어나는 일’이 적합한 표현으로 본다. 셋째, 소(牛)의 진행방향에 따라서 길흉을 점치는 상황에서 ‘우연히’란 단어가 사용되는데, 이것 역시 히브리어 ‘미크레’이므로 동일한 의미이다. 즉, 젖을 뗀 지 얼마 되지 않은 암소가 새끼가 있는 곳으로 가야하는데, 도리어 벧세메스로 향한다는 것은 짐승의 본성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넷째, 사울이 살해되는 장면에서 소년과 사울의 만남에 대해 ‘우연히’란 말을 사용하는데, 히브리어로는 카라(ar;q)이며 ‘만나다’라는 뜻으로서 소년과 사울의 만남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다섯 째, 이스라엘 왕 여호사밧은 전쟁터에서 변장하여 무리 속에 섞여 있었으나 ‘우연히’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내용인데, 여기에서 우연히는 히브리어 톰(!T)이며, ‘완전함’, ‘충분함’을 뜻하는 말로서 화살의 정확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우연히’란 단어는 돌발적이거나 뜻밖에 저절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다른 용법으로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우연히’란 단어가 어원적으로 뿐만 아니라 맥락적으로 보더라도, 섭리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는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과실 치사한 자의 생명을 보호하시는 것이며, 언약대로 유다 지파에서 왕을 출생시키기 위해서 룻과 보아스를 만나게 한 것이고, 하나님의 언약의 증표인 언약궤를 지정된 장소로 이동하게하기 위해서 암소를 주관하신 것이며, 하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사울을 죽게 하기 위해서 소년을 만나게 하신 것이고, 이스라엘 왕조는 삼사대만에 망하기로 이미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변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죽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의 역사를 볼 때 모든 섭리가 하나님의 작정과 언약에 기초해서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듯이 피조세계의 모든 섭리는 하나님의 작정계획에 따라 발생하고, 수립되고, 전개되는 것임을 확증할 수 있다.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
제1권 제17장 섭리의 올바른 적용 |
제1권 제15장 창조된 인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