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제1권 제18장 악한 도구의 용도와 목적
칼빈은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절대주권섭리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불경한 자들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의도를 진술한다. 특히 신학계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허용’이란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규정함으로써 악한 도구에 대한 하나님의 진의를 피력한다.
첫 번째, 칼빈은 하나님의 ‘행하심’과 ‘허용하심’에 대한 문제의 요인을 “사탄과 모든 불경스러운 자들이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고,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의를 주도하셔서 무엇이든 하나님께 선하게 보이는 목적을 이루시며 그들의 악행을 사용하셔서 그의 심판을 시행하신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납득 할 수 없는 문제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칼빈의 말대로 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작정섭리를 논할 때,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악하게 쓰시고는 그것에 대해 심판하신다는 점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반박한다.
칼빈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악의 도구로 사용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형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피력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지와 명령으로 말미암아 눈이 어두워졌는데도 그렇게 눈이 어두워졌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이 곧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 아주 부당하게 보인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일이 하나님의 의지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허용하심으로 되어지는 것이라는 식으로 말을 바꾸어 난제를 피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그 일을 행하는 장본인이심을 노골적으로 선언하셔서 그런 회피 방법이 헛된 것임을 보여주신다.
칼빈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반박하기를, 보편적으로는 악행 자들의 행위를 하나님께서 허용했다고 말하지만, 칼빈은 허용이 아니라 노골적인 주권의지의 행사라고 단호하게 증거한다.
그리고 칼빈은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몇 가지의 구체적인 실례를 제시하는데, 사단을 통해서 혹독한 시험을 치르게 한 욥의 시련에 대해서 “욥은 자신이 모든 재산을 약탈당하고 가련한 처지가 된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하신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사탄 자신이 일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열쇠를 쥐고 계시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노력을 돌려서 자신의 심판을 시행하시는 것”이라고 말하며,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제거할 의도를 갖고 있었고, 빌라도와 그의 군졸들이 그들의 미친 생각에 합세하였다. 그러나 모든 불경자들이 행한 일은 그저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제자들이 엄숙하게 기도하는 중에 고백하고 있다.(행4:28)”고 증거하며, “성경은 하나님께서 친히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고(출9:12), 또한 그 마음을 더욱 고집스럽게 만드셨고(출10:1), 굳어지게 하셨음을(출10:20, 27, 11:10, 14:8)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증거 함으로써 하나님이 실질적으로 모든 일을 주관하고 계심을 논증했다. 물론 이외에도 성경에 많은 증빙자료들이 있지만 칼빈의 논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하나님의 뜻(의지)이 모든 일의 원인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섭리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택한 자들 속에서 그 힘을 드러낼 뿐 아니라, 버림받은 자들을 강제로 복종케 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계획과 도모하는 바를 결정짓는 원리임을 제시한 것이다.
칼빈의 주장에서 악한 도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허용적 작정’이란 용어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손상을 입히는 처사로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작정보다 인간의 범죄가 우선 할 수도 없고, 악행이 독자적으로 실행될 수 도 없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작정의 범주를 벗어나 발생되는 역사란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악행과 범죄를 하나님의 허용으로 처리한다는 것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견주어 볼 때 성립될 수 없는 방식으로 보여진다. ‘허용(許容)’이란 말은 허락하고 용납했다는 뜻인데, 결국은 하나님께서 용인하셨고, 지시하신 것과 같은 의미라면, 그 역시 악행에 대한 책임규명이나 심판에 대한 문제는 동일한 맥락에서 제기 될 것이며 만약 ‘허용’을 확정되지 않은 상황으로 이해한다면 섭리의 주체에 관한 부분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부분들에 대한 명확한 개념정리가 안 되었기 때문에 ‘신(神)과 인간의 협력’이란 용어도 파생되고, 자유의지의 유무에 관한 이론도 난무하는 것이다. 칼빈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작정은 실질적이며, 완벽하고, 그 어떤 대상과 협의하거나, 아담의 범죄와 같이 난처한 입장에서도 외면하지 않으며 모든 면에서 섭리의 주체로서의 적극성을 갖고 있다고 본다.
두 번째, 칼빈은 하나님의 뜻의 단일함에 대해서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으니, 과연 놀랍고 말로 형언키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 일도 이루어 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자의(自意)로 허락하시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전능자로서 악에서 선을 이루실 수 없다면,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이 행해지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불경한 자들을 사용하여 목적을 이루실 때도 공의로운 작정에 기초하여 섭리하신다는 근거를 “성부께서 성자를 내어 주셨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몸을 내어주셨으며, 또한 유다는 그의 주님을 내어 주었으니, 이렇게 내어 주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사람은 죄악 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모두 똑같이 내어 주었으나, 그 내어줌의 동기와 목적이 동일하지 않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심지어 악인의 마음속에서도 자신이 원하시는 모든 일을 이루시고 그들의 악행에 대하여 책임을 물으시니, 이런 판단에 대해서 누가 감히 떨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친히 살피실 때에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할 수 있었는가, 혹은 그들이 실제로 어떤 일을 했는가 하는 것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행하고자 하는 뜻이 무엇이었는가를 보시며, 그리하여 목적과 뜻을 염두에 두신다고 하였다.”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했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작정섭리의 단일성을 증거하는데, 하나님은 자의에 의해서 작정대로 섭리하시며, 불의한 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에 대한 단일성을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좀 더 풍성한 진술이 필요하기에 선악에 대한 개념을 확고히 하고자 한다. 앞의 단원에서 취급한 바 있지만, 선악은 인간의 관점에서 취하는 윤리도덕적인 개념이 아니다. 박용기 목사는 선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절대이성적 판단에 따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좋으심’을 ‘선’이라 하고 ‘싫으심’을 ‘악’이라는 의미로 정의한다. 그리고 선한 것과 악한 것에 대해서는 선한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좋으신 것’ 곧 좋으신 대상을 말한다. 따라서 ‘악’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싫으심 그 자체를 말하고, ‘악한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싫으신 것’ 곧 싫으신 대상을 말한다. 그리고 ‘좋으심’이나 ‘싫으심’이 관념적 실재(觀念的 實在)라면, ‘좋으신 것’이나 ‘싫으신 것’은 구체적 실재(具體的 實在)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선’이나 ‘악’은 관념적 실재이며 ‘선한 것’이나 ‘악한 것’은 하나님의 생각 속에 관념적으로 실재하기도 하고, 인간의 내면에 실재하기도 한다.
박용기 목사의 말은 ‘선악’이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 이해되거나 사용되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한 신학적인 차원에서 조망해야 되는 용어이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선악을 윤리도덕적인 차원에서 접근함으로써 선은 착하고 유순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기준으로 이해하고, 악은 불량하며 포악한 것으로 단정한다. 이러한 선악의 개념으로는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간다는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고, 하나님의 작정섭리를 이루어 가는 과정의 단일성을 체계화하는데도 허점을 보이게 됨으로써 결국 이분법적 구도에 의해서 선악을 규정짓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선악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고 나쁜 개념이기 때문에 선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며 악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싫은 것이다. 따라서 합력해 선을 이룬다는 뜻은,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작정해 놓으신 계획을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대로 ‘선’은 좋아하는 방법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좋고, ‘악’은 싫어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지니까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섭리는 선악 간에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때문에 좋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선악의 개념을 바르게 정립하지 못하면 항상 악함이 걸림돌이 되어, 어떻게 좋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악신을 들어가게 하실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렇게 가혹하게 다룰 수 있는가?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게 된다.
사단은 하나님께 완전히 종속된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 악한 일에 부리는 도구일 뿐이지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반역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악(惡)은 하나님께는 관념적 실재이고 인간에게는 구체적 실재이지, 어떤 실체가 아니다. 즉, 악과 사단을 동일선상에서 이해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작정섭리의 단일성은 하나님의 뜻이 일정한 것에 기초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방해나 자연환경이 장애요소가 될 수 없으며, 어떤 상황이나 사건도 일정하신 뜻을 이루기 위한 방법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그리고 불의한 자들까지라도 하나님의 작정에 기초하여 도구로 쓰시는 것이다. 칼빈은 불의한 자들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문제에 고심한 것 같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불의에 대한 공의의 심판을 강조함으로써 악행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며 하나님의 작정섭리에 대한 단일성을 증거한다.
여기에서 공의에 대한 성경신학적인 개념을 정리해야만 하나님의 작정섭리에 대한 단일성의 골격을 확고히 할 것 같다. 공의(公義)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는 법률적으로 선언된 판결로서 선악의 제재(制裁)를 공평하게 하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품성이다. 성경신학적인 관점에서의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의 행동 결과에 따른 판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뜻(작정, 계획)에 의한 하나님의 공정한 판결을 의미한다. 공의의 핵심은 선악의 제재를 공평히 하는 판결의 기준이 문제이다.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의 기준은 인간의 행위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다. 즉, 하나님이 사랑하기로 작정한 자는 선한 자로 판단되고(선택),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기로 작정한 자는 악한 자가 된다(유기).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섭리로서 창세전부터 계획된 선택과 유기에 근거한다. 창세전부터 세워진 하나님의 계획은 인류에게 언약을 통해서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공의는 언약을 기준으로 시행하신다.
성경의 예를 들면, 노아에게는 일방적으로 은혜를 깨닫게 하심으로 의인되게 하시어 믿음으로 방주를 제작하게 하여 심판을 피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자기들의 좋은 대로 사람의 딸들과 혼인한 인류를 물로 심판하신다. 아브라함은 애굽 왕에게 아내를 누이라 속였으나, 질책은 바로 왕이 받고 아브라함에게 아내도 되돌려 주고 오히려 많은 재물도 얻게 하는 판결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섭리였다. 이 판결이 공의로운 이유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언약을 받은 자였으나 바로는 언약이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 대한 판결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비도덕적인 것이다. 즉, 아브라함의 행위는 윤리적인 기준에서 보면, 거짓말로 아내를 누이라 속인 부도덕한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편에서 편파적인 판결을 내리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서 핵심은 판결의 기준이 인간의 행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판결의 기준이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다면 아브라함과 바로에게 내려진 판결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공정한 것임에 틀림없다. 에서와 야곱도 하나님께서 이미 태중에서부터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시기로 작정했으며, 그들의 삶의 방식이나 행동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언약대로 섭리하신다(창25:23).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의 역사도 마찬가지인데, 여로보암은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고생하는 민중을 위해서 개혁을 시도한 정치가였던 반면에, 르호보암은 백성들에게 세금을 가중되게 부과함으로써 악한 정치를 시행한 왕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결은 언약의 왕조인 르호보암에게 정통성을 부여하지만, 여로보암의 행위는 악행으로 간주하여 멸망으로 판결을 하신다. 이유인즉, 여로보암은 유다지파도 아니며 언약하신 왕조가 아니기 때문이며, 르호보암은 언약의 왕조로서 이미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자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공의는 철저한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판단이지, 인간의 행위와는 전적으로 무관하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공의는 하나님의 작정대로 심판하심이다. 보편적인 심판은 법률적인 판단에 따라서 인간의 행위를 판단하여 공정하게 판결한다. 하지만 성경적인 공의는 창세전부터 세우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심판하시되, 영원한 언약대로 영원히 심판하신다. 선택된 자는 그리스도를 믿게 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시고, 유기된 자는 그리스도를 불신하게 하여 영원한 사망에 처하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정하고 공의로운 심판이다. 인류의 역사도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정해진 종말을 향해서 직선적으로 진행되지만,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도 인간의 도덕적인 행위와는 전혀 무관하게 작정하신 뜻에 따라 종말에 가서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
제1권 : 맺는말 |
제1권 제17장 섭리의 올바른 적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