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제2권 제1장 원죄론(原罪論)
칼빈은 1장에서, 죄는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타락과 반역으로 형성되었기에 원시상태에서부터 부패하였음을 강조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원죄의 기원과 본질 그리고 죄의 전달과 원죄의 정의와 본질에 대해서 정리하고 있다.
첫 번째, 칼빈은 죄의 본질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내리신 무서운 형벌의 원인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즉 하나님께서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은 아담에게 죽음의 선고를 선언한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칼빈은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하신 금과법(禁果法)은 아담의 순종여부를 시험하여 그가 하나님의 명령 아래 있다는 것을 입증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라고 밝힌다. 그리고 죄의 동기는 ‘교만’이고, 기원은 사탄의 유혹과 아담의 불신앙(infidelity)에서 기인된 것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신 것은 그의 순종을 시험하여 그가 과연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 아래 있다는 것을 입증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는 한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약속을 주셨고, 또한 반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즉시 죽으리라는 끔찍한 경고를 주셨는데, 이것이 아담의 믿음을 입증하고 실행하게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대체 무엇을 수단으로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스스로 자초했는지를 어렵지 않게 추리할 수가 있다. 사실, 교만이 모든 악의 시작이라고 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선언은 지극히 올바르다 하겠다.
아담이 하나님의 권위에서 반역한 것은 그가 사탄의 유혹에 사로잡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한 그가 진리를 멸시하여 거짓에게로 돌아섰기 때문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신앙이 타락의 뿌리였던 것이다.
칼빈의 주장대로 선악과는 아담의 믿음과 교만에 대한 시험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교만에 대한 시험을 위한 것이라면 그 결과가 너무 가혹하다. 그렇다면 선악과는 왜 만드셨는가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선악과의 성격을 살펴보면, 인간이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선악에 대한 판단자가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선악의 개념에 대해서 박용기 목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절대이성적 판단에 따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좋으심’을 ‘선’이라 하고 ‘싫으심’을 ‘악’이라는 의미로 정의한다. 그리고 선한 것과 악한 것에 대해서는 선한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좋으신 것’ 곧 좋으신 대상을 말한다. 따라서 ‘악’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싫으심 그 자체를 말하고, ‘악한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싫으신 것’ 곧 싫으신 대상을 말한다. 그리고 ‘좋으심’이나 ‘싫으심’이 관념적 실재(觀念的 實在)라면, ‘좋으신 것’이나 ‘싫으신 것’은 구체적 실재(具體的 實在)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선’이나 ‘악’은 관념적 실재이며 ‘선한 것’이나 ‘악한 것’은 하나님의 생각 속에 관념적으로 실재하기도 하고, 인간의 내면에 실재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인간이 선악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기능인 선과 악에 대한 가치판단 즉, 인간이 자신의 기준에서 선악을 분변하게 된 것임을 뜻한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선악의 기준이며 판단의 주체이신데,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서 선악의 가치를 판단하는 주체가 된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이 선악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도전으로 상대자 인간에게는 결코 형성되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순종과 교만을 시험하고자 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절대자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심판으로서 ‘죽음’이란 판결은 과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아담을 죽이셨고(창2:17), 그의 후손들도 영적으로 죽은 상태 즉, 죄 중에서 죄인으로 출생하게 하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선악과 사건은 아담의 믿음에 대한 시험과 순종의 여부를 시험한다는 주장 보다는 하나님께서 왜 그러한 시험을 하셨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단순히 믿음과 순종의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 선악과를 설치해 놓으셨다면 그야말로 형벌이 너무 가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어떻게 하실 것을 다 인지하고 계셨을 텐데 왜 그러한 시험을 하셨을까 하는 의구심만 증폭되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총체적이며 근본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단순하게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과 믿음 그리고 순종의 여부를 지켜보기 위해서라는 구속사적 관점은 하나님의 섭리의 초점을 인간에게 맞춘다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통해서 드러난 영광의 선포와 하나님 자신의 존재증명에 집약되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신 후 그들에게 삼대언약을 세워 주신 것이다. 이 언약은 단순히 인간에게 부과한 문화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알게 하시려는 자기계시의 원리인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간에게 언약을 세우셨고, 그렇게 언약을 세운 인류의 시조가 범죄로 인하여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첫 아담에게 세우신 언약을 둘째 아담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히 성취하심으로서 하나님이 여호와로 존재하심을 명백하게 알게 하신 것이다.
두 번째, 칼빈은 죄의 오염과 원죄의 정의, 본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죄의 오염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곧 그의 영혼의 죽음이었다. 그가 하늘과 땅의 자연 질서 전체를 부패시켰으니, 자신의 반역으로 자기의 모든 후손을 멸망에 몰아넣었다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아담의 후손들에게도 죄책이 부과된다는 것은 “전염의 기원은 바로, 첫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풀어 주신 은사들을 지니고 있거나 잃어버리는 것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의 후손 모두를 위한 것이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다는 사실에 있는”것으로 단정한다.
칼빈은 원죄(原罪)를 “영혼의 모든 부분들에 퍼져있어서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만들고 또한 성경이 말씀하는 육체의 일(갈5:19)을 우리 속에 일으키는바 우리 본성의 유전적 타락성과 부패성”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원죄의 타당성을 “우리는 이것을 마치 우리는 죄가 없는데 억울하게 아담의 죄책을 떠맡아 지게 된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되고, 우리가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저주 속에 얽혀들어 갔기 때문에 아담이 우리를 죄책이 있게 만들었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원죄에 대한 칼빈의 주장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온 세상과 인류가 저주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그 죄에 대한 책임은 후손들에게까지 부과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칼빈의 이론에서 모순이 발견된다. 물론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온 인류가 죄 중에서 잉태되고 출생하였음으로 그에 대한 죄의 책임을 감수해야 하는 처지에 있음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후손들이 담당해야 하는 죄책의 원인에 대해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후손들이 죄책을 담당하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라고 말했으나, 뒤에서는 아담으로 인해서 죄의 책임이 우리에게까지 전가되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후손들에게까지 죄책을 부과하신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며 직접적인 원인은 아담에게 있다는 말이다. 칼빈의 주장대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인류의 죄책은 하나님의 뜻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칼빈의 사상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기초한 확고한 신본주의적인 발상이며 성경이 바로 이렇게 말하고 있으므로 필자는 적극적으로 동감한다.
칼빈 신학의 사상적인 핵심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극대화 시켜 일관되게 전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칼빈은 하나님의 뜻을 기초로 해서 일관된 논리를 전개하다가도 가끔은 인간의 의지를 섭리의 주체로 부각시키는 허점을 보인다. 죄책의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담의 후손들이 죄책을 담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강조하면 되는데, 아담에게 원인을 전가하고자 하는 논조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차라리 인간의 의지와 책임을 말하기 보다는 생육하고 번성을 위한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설명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강조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일 것이다. 모든 만사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고 그 뜻에 반(反)하는 어떠한 세력과 주체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고히 해야 하는데도 그렇지 못한 부분이 안타깝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책임소재에 대해서 명확한 개념이해와 그 구분점이 모호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어거스틴은 아담의 죄로 인해 후손들이 오염되어 타락으로 인한 사망의 형벌을 받게 되었고, 타락한 천사들과 결탁함으로서 불경건한 반역에 따른 징벌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타락 이전 아담의 상태에 대해서는 범죄의 가능성과 함께 스스로의 선택이 가능한 의지의 결정권도 있음을 주장하며 타락을 교만으로 규정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 초기의 위대한 신학자로서 기독교 교리를 정립하는데 막중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신학사상 역시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을 강조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의 행동을 타락한 천사와 결부시킨 것과 아담 타락의 원인을 단순히 인간의 교만으로 단정한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타락한 천사라는 표현은 미숙한 설명으로서 성경에 위배된다. 성경에는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음으로서 인간의 범죄가 타락한 천사와의 결탁에 따른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판명된다.
굳이 인간의 범죄의 원인을 성경신학적으로 정리한다면, 어둠의 권세를 장악하고 있는 사탄에 의해서 육체가 지배를 받기 때문에 중생한 자라 할지라도 범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리고 아담의 타락원인을 ‘인간의 교만’으로 단정하기에는 좀 더 신학적인 배경설명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교만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도덕적인 용어로서 잘난체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아담의 교만은 단순히 잘난체하려는 윤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탄의 유혹에 따라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신(神)적 권위에 도전한 욕망에서 기인된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인 관점에서 교만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것으로 감히 하나님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같이 주권자가 되려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은 너무도 합당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루터(Martin Luther, AD1483∼1546)는 원죄에 대해서 “단순히 인간에게 본래의 거룩성이 결핍되어 있는 상태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실질적인 타락의 형태이며 완전한 인간 위에 남겨져 있는 흔적”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불의와 범죄에 대한 구분을 “성경에서 불의(unrighteousness)와 범죄(iniquity)는 서로 다르다. 믿는 자는 의롭고, 믿지 않는 자는 불의하다고 말하는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불의는 불신앙의 죄,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의(義)의 결여이다. 믿지 않는 자는 불순종하고 불순종하는 자는 불의하다. 범죄는 사람들이 경건에 대한 스스로의 어리석은 열심 속에서 스스로에 대하여 갖는 자기 의라는 죄이다. 또한 범죄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는 소홀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여 자기 소견에 선하게 보이는 것을 행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또한 선행과 악행의 기준과 범죄의 본질을 “사람이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한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결정적으로 아실 수 있는데 그 행한 일이 과연 선한지 어떤지를 사람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사실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사람의 아주 위험스러운 오만이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기에게 이득이 있는 것만을 이기적으로 구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범죄의 골자요 실체”로 밝힌다.
루터는 원죄의 원인을 거룩성의 결핍에서 찾지 않고 타락 자체의 실제성으로 보았다. 그리고 선악의 판단과 실행할 수 있는 의지의 출처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는 견해는 대단히 개혁적이며 성경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칼빈과 루터는 종교개혁의 투철한 정신에 입각해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과 주권이 있음을 천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불의와 범죄를 구분하는데서 루터의 고민이 엿보인다. 루터와 칼빈 외에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죄를 원죄와 자범죄로 구분하여 원죄는 아담의 죄로 자범죄는 후손들이 범하는 죄로 규정한다. 루터 역시 이 부분이 명쾌하지 않기 때문에 죄를 불의와 범죄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다. 불의는 불신앙에 대한 죄이며, 범죄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단정한다. 루터는 불의와 범죄에 대한 원인을 불신앙과 신앙으로 구분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물론 불신앙이나 죄인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도 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죄를 좀 더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안타깝지만 아담이 타락한 이후의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인간의 어떤 행동에 따라서 죄의 성립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상 죄인임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드러나는 행동에 따른 윤리도덕적인 죄의 유무와 그것에 따라 죄의 경중을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이 부분은 본 단원의 결론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죄의 일반적인 원인에 대해서 “어떤 결함이 있는 행위이다. 따라서 그것은 행위로서 그 원인을 가지고 있다. 죄의 원인은 의지이다. 그리고 결함이 있는 한에 있어서도 원인을 갖는데, 그것은 마땅한 올바름의 결핍”으로 단정한다. 죄의 외부 원인은 “인간은 제일 원인인 신에 의해 지탱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모든 인간적 행위는 그래서 인간의 것이자 또한 신의 것이다. 그러나 결함있는 행위의 죄는, 행위라는 점에서는 신에게서 나오지만, 결함이라는 점에서는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발을 절룩거림이 신경 중심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결함있는 다리에서 나오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원죄의 형성과정을 “아담의 모든 후예들은 아담을 머리로 하는 집단의 구성원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같은 본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아담과 동일한 인격이다. 따라서 그는 오직 그러한 본성밖에는 물려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후예들은 모두 ‘본성의 죄’라 불리우는 ‘원죄(原罪, peccatum originale)’를 지니게” 된 것으로 밝힌다.
아퀴나스는 죄의 제일 원인을 신(神)의 영역으로 규정하지만 결함은 인간에게 있다고 말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이 신경조직과 아픈 다리 부분이 각각 독자적으로 움직인다고 말한다.
아퀴나스의 견해는 다분히 이분법적이며 비상식적이다. 우선 인간의 신체 조직만 보더라도 인간의 모든 신체는 두뇌와 신경조직에 의해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말초의 어떤 기관도 신경조직과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아퀴나스는 더군다나 인체기관에서 독자적이란 말이 성립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발의 절룩거림이 신경중심이 아니라 다리 자체에서 기인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고를 갖게 된 원인은, 행위는 신(神)에게서 나오고, 결함은 인간에게 있다는 이분법적인 체계로 고착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중의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사탄의 영역을 독자적이며 공간적으로 구분하여 이해하려는데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善)의 대명사이며 사탄은 악의 축으로 설정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선하고 세상은 악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사고야 말로 상대적으로 인식하는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 이원론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지극히 유기적이며, 인간은 모든 의지의 결단과 행동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생기를 힘입어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바울은 이에 대해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라고 밝힌다. 하나님에게는 빛과 어둠이 일반이며 선악간의 일을 합력해 선으로 이루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피조세계 뿐만 아니라 만유를 통치하시며 만유에 충만하신 분이시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유기적이며 일원론적인 체계에 의해서 인식해야만 한다. 그 어떤 인간이나 물체 또는 상황도 하나님과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독자적으로 행동하거나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확고히 해야 한다.
인간의 죄가 거룩성이나 선(善)의 결핍에서 기인된다면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문제가 있게 된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 항상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을 언급하셨다. 여기에서 “좋았더라”라는 말은 히브리어 토브에서 유래했으며, 형용사로는 ‘좋은’, ‘선한’, 명사로는 ‘좋은 것’, ‘선’, ‘이익’, ‘번영’, ‘복지’를 의미한다. 문맥상으로 보면 좋았더라는 선한, 좋은 것, 선(善)으로 표기 하는 것이 타당하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기 때문에 좋다는 뜻이다. 절대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선)에 결핍된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의 판단력과 전능성에 관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무능한 인간에게는 당연히 결핍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고 충족하기 때문에 결핍이란 용어가 성립될 수 없다.
원죄에 대한 이론을 성경신학적으로 정리하자면, 칼빈의 말대로 죄를 원죄와 자범죄로 구분하는 것에는 아담의 죄를 짓지 아니한 그의 후손들에게 억울함을 갖게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죄를 아담이 지은 원죄와 당사자가 직접적으로 지은 죄(자범죄)로 구분함으로서 원죄에 따라 부과된 책임에 대해서는 부당성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성경에 근거해서 단호하게 논박할 수는 있지만 좀 더 합리적으로 설명해야 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성경신학적인 정의와 함께 죄와 범죄에 대한 올바른 규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의식하면서, 과연 원죄는 아담의 후손들과 무관한 죄로서 후손들에게 일방적으로 부과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원죄와 자범죄의 성질이 다르다는 것인가, 동일하다면 굳이 원죄와 자범죄를 구분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설령 원죄와 자범죄가 동일하다면 유사한 성질의 죄를 아담과 인간 개인의 죄로 구별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여기에서 만약 원죄와 자범죄가 서로 상이하다면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원죄는 아담이 지은 죄이며, 이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것으로 말미암고, 자범죄는 그의 후손들이 직접적으로 저지르는 죄로서 율법을 범한 결과로 단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제 부터 죄가 전가되었다는 것은, 무슨 죄를 전가 받았으며, 아담의 후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전가 받은 죄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임을 세분화하여 정리해야 할 것이다. 원죄는 아담의 범죄행위이며 자범죄는 인간 개인의 행위에 따르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방법은,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으로서 원죄와 자범죄가 성질을 달리하고 서로 다른 범주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있다. 그래서 원죄는 나와 무관한 것으로 느끼거나 아니면 아담 한 사람의 실수 때문에 온 인류가 희생양이 된 것 같은 억울함도 생긴다.
필자는 죄의 구분을 죄의 당사자(當事者)를 중심으로 원죄와 자범죄로 분류하기 보다는 죄의 본질과 의미를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죄를 원죄와 자범죄로 분류하는 것은 첫째, 아담의 원죄와 인류 개개인이 저지르는 자범죄의 죄질을 각기 다른 차원인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둘째, 아담과 후손들의 죄가 원죄와 자범죄로 양분되는 상황이라면 아담의 죄책을 모든 인류가 무조건 담당해야 한다는 점이 부당한 판결로 보여 질수 있다. 셋째, 죄의 책임부과에 대한 성격에 있어서 아담의 죄책과 자범죄에 따른 책임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자범죄는 동일한 죄책을 반복해서 부과하는 것인지를 규명해야 할 것이다.
원죄(原罪)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 한 사람이 자행한 죄를 뜻하며 아울러 죄의 책임을 모든 인류에게 전가(轉嫁)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자범죄(自犯罪)는 아담의 후손인 인간이 개별적(個別的)이며 자발적(自發的)으로 저지르는 죄를 말한다.
그렇다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이나 율법을 범한 후손들의 죄는 비록 범죄의 당사자가 다르고, 환경에 따른 범법한 기준이 다르다 하더라도 그 죄에 대한 책임은 함께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아담의 후손들이 짓는 죄를 자범죄라 한다면 그 자범죄는 원죄와는 어떻게 다르며 그에 따르는 문제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죄를 원죄와 자범죄로 구분하는 전통적인 방식은 죄의 본질을 설명하기 보다는 아담의 범죄와 후손들 개개인이 저지른 행위에 따라 구별한 것이다. 그래서 아담과 후손들의 범죄에 대한 관계가 마치 살인행위와 공금횡령의 범죄가 각각 다른 성향과 죄질을 갖고 있는 것처럼 오인(誤認)하게 한다.
이러한 구도는 아담의 범죄와 후손들이 저지르는 개개인의 범죄가 서로 다른 성질의 것으로 오해하게 되고, 아담의 후손들은 단지 후손이라는 이유로 아담과 동일한 죄를 저지른 것으로 치부되어 억울하기 그지없다. 물론 아담의 범죄와 후손들의 범죄 유형은 각기 다르지만, ‘죄’라는 공통분모 안에 모든 인류가 동일하게 포함되며 죄인이라는 동질의 상태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담의 범죄는 인류 최초의 범법행위이며, 그로 인해 아담의 씨로 출생하는 모든 후손들은 영적으로 사망한 죄인의 상태에서 동일하게 살아가게 된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간과해선 안된다. 여기에서 자범죄로 명명된 후손들의 개인적인 범죄행위는 인간의 내면적인 죄가 표현된 것으로서 그 뿌리는 아담과 모든 인류가 동일한 것이다.
또한 죄에 대한 책임소재나 형벌 역시 아담의 범죄에 대한 책임과 후손들의 자범죄가 다르게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영적으로 사망하는 것이 죄에 대한 선고를 받은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 “정녕 죽으리라”(창2:17)라는 선언에 의해서 생령체의 인간이 육체로 전락하게 된 것을 뜻한다. 단, 인간의 개별적인 범죄행위에(자범죄) 따른 문제는 각기 개인별로 차이가 있으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성경적인 규정은 악과 죄 그리고 범죄로 확실하게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은 범법자와 그의 행위를 중심으로 구분되는 원죄와 자범죄 와는 차별화된다.
아담은 최초의 범법자였으나 그의 후손들도 아담과 같은 죄의 본성을 지니고 출생하였기 때문에 동일한 죄의 본성을 지닌 죄인임에 틀림없다. 또한 행동으로 표출되는 범죄행위의 여부와 무관하게 모든 인간은 죄인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죄를 지어서(범죄)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범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범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동일한 죄인이다. 다만 범죄는 내면적인 죄가 밖으로 드러난 것으로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될 때 은혜를 깨닫게 되는 수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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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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