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제2권 제2장 노예의지
칼빈은 인간의 자유의지론을 논의할 때 발생하는 두 가지의 위험성에 대해서 어거스틴의 견해에 동감하고 있다.
첫째로, 사람은 자신에게 올바른 것이 있다는 것이 완전히 부인되면 곧바로 그 사실을 안일에 빠질 기회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의구할 능력이 전혀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그것을 아무리 추구해도 전혀 소득이 없다고 생각하여, 마치 그 일이 자기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인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둘째로,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사람에게 공로를 돌리면, 그것은 곧바로 하나님의 존귀를 빼앗는 것이 되며 결국 그로 인하여 사람이 자기에 대한 뻔뻔스러운 과신(過信)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멸망에 빠지고 만다.
어거스틴의 말은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미리 포기해 버릴 것이고, 작은 일이라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자만하여 멸망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우려처럼, 자유의지는 인간의 삶과 행동을 지배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며 동시에 자기를 포기할 수 있는 순기능과 패배의식이나 현실도피, 자만심을 유발하는 역기능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자유의지에 대한 관점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주장하는 펠라기우스나 알미니안 학파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 학파로 양분된다.
일반적으로 자유의지(freewill)는 행동과 결정을 조절하거나 의지의 선택권을 뜻한다. 철학적으로는 자유의지와 이 세계는 애초에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고 인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주장하는 결정론을 다 수용하는 양립가능론(compatibilism)과 결정론(determinism)만을 주장하는 양립불가론(incompatibilism)이 있다.
자유의지에 대한 신학적인 정의에 대해서, 크리소스톰(Chrysostom:354∼407)은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우리의 능력에 맡기셨으니, 이는 선택에 대한 자유로운 결정권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요, 또한 원치 않는 자는 억제하시지 않으시고, 원하는 자는 받아 주신”다라고 말했고, 제롬(Jerome:345∼419)은 “우리의 일은 시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일은 완성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오리겐(Orgen:185∼254)은 “선과 악을 분간하는 이성의 한 기능이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의지의 한 기능”으로 규정했고,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4∼1274)는 “선택의 능력은 지성과 욕구의 혼합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욕구 쪽으로 기운다”고 말했다.
위 신학자들의 주장을 정리하면, 크리소스톰과 오리겐 그리고 아퀴나스는 인간의 독자적인 의지로 취사선택(取捨選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고, 제롬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불가항력적인 범위에서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다는 뜻이다.
기독교의 보편적인 견해는 후자를 견지(堅持)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므로 인간의 열심과 하나님의 도움을 병행하면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경험철학과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을 신앙하게 된다. 그 결과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열심을 과도하게 요구하게 되고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진다는 기복적인 신앙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어거스틴(Sanctus Aurelius Augustinus, 354∼430)은 “최초의 상태(Original state 타락전), 즉 최초의 인간이 창조된 그때에는 사람이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의지는 비단 행동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선악 간의 선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류의 자유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posse non peccare)을 의미했다. 이것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부여받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신적 은혜의 도움으로 인한 것이었다.
인간에게 선을 선택하는 자유를 준 것은 최초의 은혜(prima gratia)뿐이었다. 그러나 자유는 타락의 가능성을 또한 포함하고 있었고, 자유의지는 최초의 죄를 자초하고 말았다. 이 타락은 인간이 교만한 마음에서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돌이켜 악의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생활 속에서 카리타스(Caritas)는 큐피디타스(Cupiditas)로 바뀌어졌으며, 이로써 인간은 은혜의 선물은 물론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의 일부인 자유를 상실해 버렸다. 그러므로 타락은 인간이 선을 선택하는 자유를 상실해 버렸음을 의미한다. 이제 그에게는 이 자유 대신에 죄에 대한 강요가 있을 뿐이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posse non peccare)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능력(non posse non peccare)으로 변하였다. 인간의 타락에 있어서도 그것은 아담의 불순종의 결과로 각 사람에게 전달되었다. 말하자면 타락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실제적으로 유전되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자연적 전달을 통하여 인간의 악한 욕망 역시 세대를 거듭하면서 계속 만연되어 왔음을 믿었다.”
어거스틴 역시 인간이 타락 전에는 완전한 자유의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선을 행할 수 있는 의지를 상실하였고 죄의 강요에 의해 함몰되었다고 말했다. 어거스틴의 핵심 사안은 최초의 인간은 완전한 자유의지를 갖고 있었으나 타락한 이후부터는 악을 선택하는 의지만이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타락의 책임과 타락 후의 악행의 책임을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의 결과로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의 결단이나 결정은 이성과 의지 또는 욕구가 독자적인 작용으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깨달아(지성) 느끼며(감성) 결단(의지)하게 되는 유기적인 체계에 의해서 총체적으로 운용되는 인격적인 작용이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정의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관건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선택과 결정의 주체가 된다는 점이다. 인간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충돌하게 되며 하나님의 속성을 침해할 수 있는 오해의 소지를 낳게 된다.
칼빈은 본장에서는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 소유했던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타락한 이후의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전적으로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타락이전의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의 유무와 특성을 정리해야만 죄의 책임 문제와 소재를 해결할 수 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1권에서 자유의지의 기원과 상태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에 지성을 주셔서 그것으로 선과 악을,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하셨고, 또한 이성의 빛을 안내자로 주셔서 우리가 피해야 할 것과 좇아야 할 것을 구별하게 하셨다.
아담은 자기가 원하면 얼마든지 설수가 있었는데,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로 타락한 것이다. 그가 그렇게 쉽게 타락한 것은 그의 의지가 이쪽저쪽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었고 또한 끝까지 변치 않고 인내하는 능력이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과 악을 선택하는 일은 전적으로 그의 자유였다.
칼빈은 위에서 밝힌바 대로 타락이전에는 자유의지가 있었음을 천명한다. 그러나 타락한 이후부터는 인간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의지는 상실되었고,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노예의지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람의 지성이 아무리 예리하다 해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한 한 그저 눈먼 상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의 조명하심이 없이는 육체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것을 생각하는 그런 고상한 지혜는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여러분이 가진 선한 것은 무엇이든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악한 것은 무엇이든 여러분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타락한 인간의 성질을 규명하고 있다.
자유의지의 유무(有無)에 관한 문제는 죄의 책임과 관련되고,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서로 상반된 개념으로서 신학적인 난제라 할 수 있다. 기독교 강요 1권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칼빈도 아담 타락이전의 자유의지에 관해서는 확고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자유의지와 관련된 문제로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무력해져서 안일과 나태에 빠지게 되고, 자유의지가 있다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도전하게 되어 하나님의 존귀를 빼앗게 되는 결과가 된다. 칼빈은 이러한 극단적인 사고 때문에 발생되는 위험성에 대해서 대안을 제시한다.
첫째로, 사람에게 선한 것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며 또한 지극히 비참한 빈곤이 사방으로 에워싸고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요, 둘째로, 그에게 결핍된 그 선(善)과 그가 빼앗긴 자유를 사모하도록 가르쳐서, 사람 자신이 최고의 덕을 소유했다고 상상할 경우보다도 그 일에 더 힘쓸 수 있도록 강력한 자극을 주는 것이다.
자유의지가 없음으로 발생하는 방종과 나태에 대한 칼빈의 처방에는 강제성이 엿보인다. 인간으로 하여금 열심나게 하는 것은 적극적인 방법으로 보이지만 강요나 노력을 종용하게 되는 부자연스런 해법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은 인간의 인격적인 작용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조성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는 현상적으로 잠시 드러나는 문제 때문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는 좀 더 심층적인 연구를 통해서 하나의 원리로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인간의 자유의지가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것이라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형상 따라 창조된 것이라는 데서 찾는다면, 하나님의 형상 따라 창조된 인간에게도 독자적인 자유의지가 주어진 것이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만 속한 절대의지를 두 의지의 작용으로 인정하는 것이 되고, 절대의 개념에 상충되는 이론이 된다.
이 부분은 신학적인 난제로서 칼빈 역시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을 하나님의 절대개념에서 이해하면, 피조물인 인간에게 부여된 의지는 절대자 하나님께 종속된 의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형상은 본질적이며 절대적인 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된 인간의 형상은 현상적이며 상대적인 것이다.
본질과 현상이란 뿌리와 가지의 관계에서 발생되는 것과 같이 근본으로부터 파생되며 근원적인 생명력에 의해서 생존하는 것임을 말한다. 그런데 가지가 독자적으로 행동하며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발상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영역을 벗어나서 독자적으로 존재하거나 자의적으로 판단, 행동한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
자유의지에 관한 기원은 아담 때부터이다. 하나님께서 동산중앙에 설치해 놓은 선악과를 아담이 뱀의 유혹에 의해서 따먹고 나타난 현상이다. 뱀이 아담에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는 말로 유혹했다. 이때부터 인간은 하나님과 동등한 주권을 소유한 줄로 착각하여 만사를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판단하게 된다.
위에서 나타난 아담의 타락 과정을 살펴보면, 죄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상적인 원인만 가지고 죄의 책임을 인간에게 부과한다면,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상충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물론 죄의 책임을 절대자에게 전가한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는 이치임이 명백하다.
이유인즉, 절대자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 책임추궁을 받을 수도 없거니와 책임을 져야 될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임은 절대자가 상대자에게 일방적으로 부과하는 것이지, 그 어떤 상황에서든지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하고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는 아담의 의지가 종속적인 것임에 유념해야하며, 종속적인 존재는 절대자 하나님께 책임을 추궁하거나 전가할 수가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아담이 종속적인 의지로 범행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라는 근거 또한 모호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절대주권 섭리에 의해서 아담이 타락했어도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할 수 없으며, 아담의 종속적인 의지로 범행했었어도 아담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해서는 어거스틴과 칼빈의 주장처럼 인간에게 독자적인 의지가 없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어떠한 피조물도 스스로 존재하거나 독자적인 의지의 선택이 용인(容認)될 수 없음을 전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자유의지라는 용어도 어거스틴의 주장처럼 노예의지나 종속적의지로 명명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칼빈과 같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이론에 대해서는 좀 더 치밀한 분석과 해명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전혀 없음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아담의 타락을 분기점으로 해서 설명한다. 즉, 타락 이전에는 자유의지가 있었지만, 타락 이후에는 자유의지를 상실한 노예의지의 상태라고 밝힌다.
이렇게 타락을 기점으로 해서 자유의지를 구분하는 이유는 첫째, 타락의 책임이 인간의 자유의지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하려는 것이고, 둘째, 타락이후의 인간에게는 노예의지 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이 선을 추구하는 일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명백히 선언하는 것이며 셋째, 인간이 자의로 악한 일을 선택하고 자행하는 것은 타락으로 죄의 종이 된 상태에서 발생되어 진 것으로 간주하려는데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은 타락과 악행의 책임을 인간에게 부과하는 것으로써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먼저 노예의지를 주장하는 학설에 대해서 검토해 보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주장인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다고 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의지가 동일한 성질의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의지의 소유자이고, 인간은 철저히 하나님께 종속된 상태의 종속(노예)의지이다.
종속된 상태는 하나님의 절대의지에 의해서 작용하는 수동적인 작용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독자적인 의지가 전무한 것임을 뜻한다. 하지만 어떤 학자는 하나님께서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 독자적인 자유의지를 허용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유의지의 허용(許容) 역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양립될 수 없는 개념상의 충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타락 전에 자유의지가 있었다는 말도 성립되지 않는다.
절대의지의 개념은 만사와 만물이 절대자의 확정된 뜻(작정, 계획)에 따라 한 치의 오차나 다른 의지의 개입과 세력에 방해받지 않으며 주도면밀하게 작용하고 섭리되는 능력까지 함의된 것을 뜻한다. 절대의지는 어떤 명분이나 상황에서도 다른 의지의 발휘를 인정할 수 없으며 존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포함한다.
허용(許容)이란 말은 허락하고 용납하다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만약 아담에게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결단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허용했다면 이것 역시 두 의지가 존립하게 됨을 의미한다. 어떤 학자들은 어항 속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물고기의 비유를 들면서 자유의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어항 속 물고기는 어항을 관리하는 관리자의 손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자유의지에 대한 쟁점은 하나님의 ‘허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는 어떤 성질의 것인가라는 과제의 해결에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용했다고 해서 인간에게 독자적인 의지가 주어졌다는 것은 ‘절대의지’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절대의지라는 개념은 단하나 창조주 하나님께만 속한 것으로써 그 어떤 것에도 독자적이거나 자율적인 의지를 용인할 수 없으며 성립될 수 없는 성질을 갖고 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주창하는 칼빈의 갈등도 절대와 상대라는 개념상의 충돌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점은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해서 완전히 종속된 것이라면 마치 어떠한 선택권도 행사할 수 없이 조정 받는 로봇(robot)이나 허수아비와 같은 인간상 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의구심이 기우인 것은 로봇과 인간의 현격한 차이에 있다. 로봇은 기계적이고 비인격적인 물체이지만 인간은 하나님께서 인격적인 작용을 통해서 깨달아 느끼며 결단하게 하시는 생명체이며 인격체이다.
로봇을 살아있다거나 인격체로 간주하지 않는 이유는 로봇은 인간이 조작해 놓은 프로그램에 의해서 작동될 뿐이지 이성적인 기능과 감성 그리고 의지의 결단력을 갖고 판단하거나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도 하나님의 작정하신 계획(프로그램)에 의거해서 섭리되지만, 하나님의 형상 따라 창조된 인간은 지정의(知情意)를 통한 인격적인 작용에 의해 활동하고 존재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무지하여 하나님을 인지(認知)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의지에 따라서 판단하고 결단하는 것으로 오해하는데 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의지는 피조만물 모든 영역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은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으로 존재할 수 없음이 명백하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성경의 용어 가운데서 ‘하게 하신다’는 사역동사(Hiphil)가 있다.
구약성경에서 ‘하게 하신다’는 말은 히브리어 원문으로 ‘아싸’이며, 이는 ‘일하다’, ‘행하다’, ‘만들다’, ‘형성하다’, ‘이루다’를 뜻하며, 그 기본의미는 ‘행하다’, ‘만들다’라는 뜻이다. ‘아싸’라는 단어는 많은 표현에서 항상 동일한 기본 개념을 지니고 있는데 하나님께 사용되면 흔히 역사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강조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하게 하신다’라는 문구들은 구약성경신학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 즉 하나님은 초월적이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그의 주권적인 목적을 이루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알게 하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으로 그노리조(gnwrivzw)이며, 기노스코(ginwvskw:알다, 이해하다)에서 유래하였으며, 이는 ‘알리다’, ‘알게 하다’, ‘명쾌하게 알게 하다’라는 뜻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대하여 명쾌하게 알게 하셨다는 뜻이다.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한 신인식(神認識)의 문제가 인간의 이성이나 노력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절대주권적인 사역에 따라서 주어진 결과임을 뜻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구약의 주어는 ‘하나님’, 신약의 주어는 ‘예수’이다. 그리고 사역동사는 ‘~하게 하신다’이다. 이 말은 하나님과 예수께서 모든 일의 주체가 되어 하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 ‘~하게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절대주권자이심을 확증시켜주는 아주 요긴한 단어라 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계시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게 하신다’라는 동사만큼 절대주권을 극명하게 설명하는 단어는 없다. 성경에서 ‘하게 하신다’는 사역동사만 분명하게 인식해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운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역동사 하나가 정확하게 해석된다면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운행과 역사의 이치가 오직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주체(主體)와 객체(客體)가 분명하게 구분되어지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속성이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둘째, 모든 만사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해서 전적으로 집행된다면 인간이 굳이 열심히 살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나태와 안일에 대한 문제이다. 이러한 생각 역시 절대주권이라는 용어의 개념이 확실하게 정립되지 못한 결과이다. 절대주권의 범주는 열심과 나태, 선행과 악행 모든 면을 포함한다. 혹자들은 열심, 적극성, 선한 일, 사랑 등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나타나지만, 나태, 소극성, 악한 일, 미움 등은 인간이나 사탄의 역사로 간주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어느 한편에만 치우쳐 섭리하시거나,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일을 적당히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어 가시는데, 이것이 절대주권섭리인 것이다. 하나님께는 선악이 일반이기 때문에 이분법적인 사고체계나 윤리적인 흑백논리에 의해서 판단하면 안된다. 상대적 존재인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선과 악은 극명히 대조가 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선은 좋아서 좋은 것이며, 악은 싫어하시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즉, 선악간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에서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죽음의 잔을 피하고 싶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고백한바 있다. 물론 이러한 이론에 대해서 혹자들은 하나님을 모독한다거나, 죄의 조성자로 단정하려 할 것이다. 하나님을 인간의 차원에서 윤리적인 기준으로 이해하려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와 속성을 편협 되게 규정할 수밖에 없다. 빛과 어둠을 동일하게 판정하시는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상반된 개념으로 인지하는 인간의 기능과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에서 이해하려는 것이 모독하는 것이지 어둠을 지배하는 빛의 근원으로 이해하는 것은 타당한 자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사탄은 하나님께서 악한 일에 쓰시는 도구에 불과하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거나 권세에 대항할 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욥을 시험하게 하기 위한 도구였다. 사탄은 불택자들을 유혹의 욕심에 빠지게 하고, 때로는 택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욕심의 노예가 되게도 한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악신(惡神)을 통해서 망하게도 하신다. 예수의 제자였던 베드로도 사탄이 역사할 때 스승의 죽음을 가로 막으려 했으며, 나중에는 스승을 부인(否認)하였다. 이와 같이 사탄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활동하는 피조물에 불과하며, 악한 도구로서 하나님의 권세에 완전히 종속되어 악한 일만을 집행한다.
절대의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이분법적인 도식으로 사고하려는 우리의 인식체계의 전환이 필요하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나쁘고, 악한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역사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신다. 여호수아는 선악간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임을 천명했다. 가룟 유다의 반역과 예수의 고난과 죽음까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작정하신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탄을 도구로 사용하시고, 망하게 하실 자를 망하게 하신다. 이러한 절대주권을 보유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규정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열심과 나태 그리고 선행과 악행뿐만 아니라 흥망성쇠를 총체적으로 주관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포괄적인 의미이며 성경적인 결론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식한다면 인간의 나태나 악행의 방지를 위해서 고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히 쓰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간과하면 안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를 부분적으로 볼 것이 나니라 종합적으로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탕자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았으면 아들은 탕자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탕자가 된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탕자의 위치에서라야 아버지의 사랑을 확실히 깨닫게 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태와 악행이 무조건 나쁜 것이라는 선입견은 금물이다. 그렇다고 나태와 악행을 방조하거나 부추기는 것은 더욱 아니다. 모든 일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면 모든 것이 은혜를 깨닫게 하는 과정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을 통해서 구속의 은총은 물론이거니와 타락과 무관하게 언약을 성취하시는 여호와의 성실성을 계시한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 속였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아내도 보호받고 재물도 얻게 됨으로써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확신과 찬양을 하게 된다. 사사시대에는 반복적인 백성들의 불순종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사사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잘못을 뉘우치게 하시며 하나님의 은혜를 깨우치게 하신다. 다윗은 무수한 전쟁의 위기과 우리야의 아내를 간통하는 수치스런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자비하심을 깨닫고 은혜의 영광을 노래한다.
남북의 분열시대에는 유다지파의 범죄와 부패에도 불구하고 열조와의 언약대로 왕조를 끝까지 보존해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게 한다. 신약시대에서도 불의한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무조건적으로 의롭게 여겨주신다. 이렇게 섭리하시는 이유인즉, 인간의 죄와 실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기 위함에 있다.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고백했으며 그렇다고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죄를 자행하고 정당화하려는 것은 악한 생각으로 단정했다.
집필자의 논점은 인간의 마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관하심에 있으며, 선악간의 행동이나 사탄의 역사까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섭리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으로서 빛과 어둠, 선과 악 모두를 주관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여호와로 경외하게 하시려는 단일 목적과 의미를 갖고 섭리하심을 재인식해야 한다.
셋째, 인간의 선택과 결정에 따른 책임론인데 이점은 이미 기독교강요 1권에 밝힌 바 있다. 자유의지와 책임론은 논리상의 모순과 죄의 조성 문제가 결부된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악행과 선행의 모든 책임을 인간이 져야하지만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충돌하게 된다. 반면에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종속된 상태에서 인간이 범죄 했다면 하나님께 책임이 전가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신학적인 난제인데, 이에 대해 박용기 목사는 “성경이 말하는 종교적인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만 성립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법에 의하여 정죄하시고, 인간은 주신 법을 불순종할 때에 죄가 성립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법을 제정하신 자로서 범법자(犯法者)를 정죄하시는 죄의 조성자(造成者)요, 인간은 법을 순종해야 할 자로서 범법한 죄의 조성자이다. 그러므로 죄란 법을 세우신 하나님이나, 순종해야 할 인간 양자 사이에서만 성립이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혹자들은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간주한다고 촉각을 곤두세우지만, 이는 하나님이 범법자를 정죄하시는 분이심을 총체적인 범주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법을 세우셨고 그 법에 의해서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신다면 죄 자체도 성립될 수 없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의 범죄와 그에 따른 책임의 타당성에 대해서 박용기 목사는 “범죄는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겠으나 포괄적인 결론은 법을 불순종하는 것이 범죄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에 의하여 세우신 법을 인간이 불순종함으로 정죄 받은 것이다. 범죄란 법을 어긴 불순종한 자에게 있어서만 성립이 가능한 것이지 입법자이신 하나님에게는 범죄의 성립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절대주권에 의한 입법자 하나님과 피조된 법의 수행자인 인간과는 상대적 관계가 아닌 절대적 관계이므로 범죄의 성립에 있어서도 절대적이다. 즉 인간 자신만이 입법자 하나님께 대하여 죄가 된다. 절대로 하나님이 인간에 대하여 범죄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께 죄책을 돌리려는 생각은 절대자 하나님께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결과이며, 논리의 커다란 모순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박용기 목사의 말대로 불순종한 인간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것이 확고하듯이 어떠한 명분과 이유에서라도 하나님께는 죄책을 돌릴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
제2권 제3장 타락한 인간의 본성 |
제2권 제1장 원죄론(原罪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