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0-12-04 14:5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제2권 제3장 타락한 인간의 본성


"사람에게 있어서 영적인 것이 아닌 것은 모두가 육신적인 것이다. 그런데 중생을 통하지 않고서는 성령에 속한 것을 전혀 가질 수 가 없다. (중략) 사람에게서 나오는 모든 생각들이 어리석고, 경박스러우며, 미쳤고, 사악하다고 조롱을 받고 있으니, 사람의 지성이 그야말로 무거운 창으로 찔리는 격이다.

사망의 깊은 골짜기에 던져져 있는 영혼의 경우는, 악의 짐을 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선한 것이 철저하게 결핍되어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 본성의 부패한 상태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부패한 본성을 깨끗이 씻는 은혜가 아니라 내적으로 그 부패성을 억제시키는 은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섭리로써 본성의 사악함을 억제하셔서 그것이 행동으로 터져 나오지 않도록 하시되, 그 본성을 속에서 정결하게 씻지는 않으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을 막아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이 - 그렇게 할 수 있는 동안에 -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야 합니다. 어떻게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선한 것은 무엇이든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악한 것은 무엇이든 여러분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의 역사하심으로 되는 일을 하나님과 우리가 협력하여 이루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은혜가 모든 선행에 먼저 작용하는 것이며, 의지는 은혜의 인도자로서 앞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추종자로서 은혜의 뒤를 따라 가는 것이다.

선행의 첫 부분은 의지이며, 나머지 부분은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강한 노력인데, 이 두 가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지에 대해서나 그것을 이루려는 노력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우리의 것으로 주장하게 되면, 그것은 여호와의 것을 빼앗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의지를 도우신다고 말하면, 결국 무엇인가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지를 만드신다고 말하면, 우리의 의지 속에 있는 모든 선한 것들이 다 우리 바깥에서 비롯된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1) 최초에 주어지는 은혜를 정당하게 사용할 때에 그 뒤에 이어지는 은혜들로 상급을 받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이는 마치 사람이 자기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효력 있게 만드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2) 상급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안 된다는 것. (중략) 그런데 그들은 역사하는 은혜와 협력하는 은혜를 서로 구분하는 낡아빠진 사고를 악하고도 부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본문 中

  칼빈은 앞의 단원에서 자유의지에 따른 인간의 원죄를 정리했으며, 본장에서는 원죄의 결과로 나타난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설명과 중생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는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었으나, 타락한 이후의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음을 판단하기 위해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중생한 성도에게 악의 발동을 억제하시는데, 이것은 신(神)과 인간의 협력적인 관계에서의 성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성도의 선행과 선택한 백성은 끝까지 보호하신다는 견인(堅忍)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며,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역임을 강조하고 있다. 중생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사람에게 있어서 영적인 것이 아닌 것은 모두가 육신적인 것이다. 그런데 중생을 통하지 않고서는 성령에 속한 것을 전혀 가질 수 가 없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악행의 영혼의 대해서는 “악의 짐을 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선한 것이 철저하게 결핍되어 있는 법이기 때문”이라고 규정한다.

  칼빈은 부패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심판의 목적에 해당하는 로마서 3장을 인용하기 보다는 1장 18절에서 30절까지에 나타난 타락한 인간의 본성 상태를 거론함이 적절했을 것 같다. 그래야만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설명이 명확할 것이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은 상태를 가리키며, 모든 인류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뜻한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 상태는 범죄행위와 상관없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죄인의 상태를 뜻한다. 바울은 이 상태를 하나님께서 마음의 정욕대로 내어버려두신 상태, 부끄러운 욕심대로 내어버려두신 상태,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신 상태라고 규정했다. 이와 같이 타락한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없으며,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사악한 상태임을 단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내면에 실존해 있던 죄가 밖으로 표출되는 범죄는 모든 인간이 동일한 행태를 보이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서 개별적이며 특수한 형태를 띤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은 범죄 행위에 대한 원인은 선의 결핍으로, 반면 선행에 대한 원인은 “우리는 인간 본성의 부패한 상태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로써 악의 발동을 억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악행은 선의 결핍에서 기인되고, 선행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말이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선의 결핍에서 발생하는 악행은 인간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며, 선행은 하나님의 은혜의 개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방식은 이분법적인 사고의 전형으로 보인다. 타락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은 악행과 선행 모두에 대한 선택권이 없음을 뜻하기 때문에 단마디로 말하면, 타락한 인간에게는 노예의지만 있을 뿐이며 어느 것도 마음대로 선택하거나 결정할 수 있는 의지가 없음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선행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분법적인 논조로 설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개념의 혼선을 초래하고 있다.

  선(善)의 결핍이란 주장은 아퀴나스의 사상에 기초한 발상이며, 성경적인 해석으로 보기 어렵다. 선의 결핍은 선에 대한 욕구가 부족하다는 뜻인데, 이 말은 인간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개연성이 남아있다는 뜻이 된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선에 대한 욕구가 완전히 말살되어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다. 칼빈의 주장대로라면 영적으로 죽어버린 인간에게도 미약하나마 선행의 욕구와 능력이 잔존해 있다는 말이 된다. 칼빈은 앞에서 부패한 인간의 상태는 전적으로 죽었음을 밝힌 바 있는데, 선의 결핍이란 용어를 사용한다면 전적으로 부패하여 죽어버린 인간의 상태와 상충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했던 칼빈의 견지에서 본다면 선의 결핍이란 말보다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주관하심으로 설명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절대주권은 모든 면에서 독자적인 주관이나 권세 그리고 활동을 용납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뜻과 의지 그리고 영역과 능력에 있어서 어떤 것도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거나 무시할 수 없으며 용인될 수 없다. 여기에 죄라고 해서 하나님과 무관하게 성립된다거나, 사탄이나 인간의 독자적인 욕구와 판단에 의해서 자행될 수 있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욥기서는 사탄이 하나님의 주도면밀한 계획과 예속된 상태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확실히 증거한다(욥1:12, 2:6).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창조 시에 종말을 예고하셨으며(사46:10), 시작과 끝을 작정하신대로 섭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작정과 주권을 벗어나서 되는 일은 그 어떤 것이라도 있을 수 없다. 심지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사악한 일도 하나님의 계획(뜻)안에서 성립된 일임을 인식해야 한다.

  타락한 인간의 상태를 근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존재 상태를 명확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타락한 인간의 상태는 영혼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고 죽은 상태로서 선행에 대한 가능성은 전무(全無)하며, 오직 악행만을 실행할 수밖에 없는 죄인의 모습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에베소서 2장 3절에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언급했다. 예수께서도 타락한 인간의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도 될 수 없으며 어떤 선행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거듭나야 할 것을 강조한 바 있다. 거듭난다함은 중생을 뜻하며,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남을 의미한다. 중생은 헬라어 팔링게네시아(paliggenesiva)이며, ‘존재로의 복귀’라는 뜻으로 타락이전의 인간 상태로 복귀함을 의미한다. 이 말은 타락 이전의 인간은 생령체로서 영(靈)이 살아 있었으나, 타락으로 인해서 죽어버렸고 죽어버렸던 영이 다시 살아남을 뜻한다. 중생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죽어버린 영(靈)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하는 용어로서 ‘거듭났다’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중생 역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일뿐만 아니라 거듭난 영혼이 자라나며 성숙하게 되는 성화(聖化)의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거듭났다고 해서 즉시 완전해진 것은 아니며, 단지 죽었던 영이 되살아난 것임으로 성장과 성숙의 지속적인 성화단계가 필요하다. 따라서 중생한 영혼을 지닌 성도는 두 마음 즉,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게 되며 이 모두는 하나님의 섭리 영역 안에서 발생되어 지는 것이다. 바울은 두 마음의 갈등으로 괴로워하는 자신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죄인임을 깊이 있게 깨닫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을 누리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의 고백을 한 바 있다. 또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불신자들의 악행이나 신자들의 선악간의 행동 모두에 전적으로 역사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상태를 원인(原人)과 타락인 그리고 중생인으로 분류해서 자세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첫째, 원인(原人)은 타락 전 인류의 시조로서 선(善)하고,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에 의해 살아가는 생령(生靈)으로 창조되었다. 생령체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과 싫어하시는 것을 동일하게 공유했던 상태의 인간이다. 그리고 영적 기능이 살아 있었기에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과 함께 의사소통도 가능했으며, 사탄과의 관계에서도 그러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불어넣은 생기(生氣)인데, 이 생기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인간이 생존하는데 원천이 된다. 즉,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기운이 주어졌기에 가능한 것이며, 이 기운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 모두의 생존을 전적으로 지배하며 주관한다. 하나님의 생기로 존재하는 인간의 상태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만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인간에게는 독자적인 의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타락인은 아담이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은 후 선과 악을 알게 되어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를 뜻 한다. 선악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만 보유하고 계신 고유권한이다. 그런데 범죄로 인하여 인간에게도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기준이 내적 본질이 되었다. 인간이 선악을 판단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하나님의 생각에서 멀어져 인간 자신에게 좋은 것이 판단의 기준으로 고착화 되었고, 인간의 판단은 하나님의 생각과 상반되며 충돌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즉 악한 것이 인간의 내면에 실재적으로 자리하게 된 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때부터 타락한 인간은 공중권세 잡은 사탄에게 종속되어 사탄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사탄은 어두움의 권세를 지배하며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로서 아담이 사탄에게 유혹을 받아 그에게 순종하면서부터 그의 종이 된 것이다. 타락한 인간이 사탄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의지 역시 사탄에게 종속된 노예의지가 된 상태인 것을 뜻한다. 즉, 타락한 인간은 영적으로 죽게 되어 생령체가 육체로 되었고, 육체의 욕심에 따라 인간 중심의 선악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사탄에게 종속되어 사망의 상태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이 상태 역시 인간에게는 독자적인 자유의지가 없으며 사탄에 매여 조종 받는 노예의지만 존재하게 된다.
 
  셋째, 중생인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를 가리킨다. 타락한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며 육체에 매여 죄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데, 이것을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고 하며, 이 상태에 있는 인간을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하신 것이 중생이다. 영(靈)이 되살아나서 거듭나기는 했으나, 인간은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에 두 의지(마음)가 작용한다. 하나는 성령의 소욕이고 또 하나는 육체의 소욕이다. 성령의 소욕은 선행을 추구하게 하고, 육체의 소욕은 악행을 탐하게 한다. 그러므로 중생인 역시 독자적인 자유의지로 판단하고 결단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두 의지의 작용에 의해서 마음과 행동이 조정 받는다.

  결국 인간은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께만 종속된 종속의지를 보유했고, 타락한 이후에는 사탄에게 종속된 노예의지를 갖게 되었으며 중생한 상태에서는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에 매인 두 의지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인간에게는 독자적인 의지가 없으며 종속의지 또는 노예의지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즉, 모든 인간은 불신자와 신자로 구분되며 신자는 성령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고 불신자는 사탄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있으며, 사탄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종속된 피조물로서 악행의 선봉장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위의 내용과 맥락을 같이해서 칼빈의 견해를 살펴보면 그의 주장에 동감하게 되며 철저하게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중생한 백성들의 신앙의 성숙을 도모하는 것과 선행을 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것 모두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명백히 밝혔다.

"오직 하나님 자신의 역사하심으로 되는 일을 하나님과 우리가 협력하여 이루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거스틴도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의지로 협력하는 것이 아님을 천명했다.

"은혜가 모든 선행에 먼저 작용하는 것이며, 의지는 은혜의 인도자로서 앞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추종자로서 은혜의 뒤를 따라 가는 것이다"

  위의 인용구에서 확인하듯이 칼빈과 어거스틴은 선택과 믿음 그리고 선행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절대주권적인 역사임을 확고히 했다. 하지만 다수의 신학자들은 거듭난 성도들의 성화(聖化) 교리에 있어서 신(神)과 인간의 협력적인 관계를 주장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바, 즉 “구원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만으로 일어나지만 인간이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중략) 오로지 은총만이 역사함은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을 포함하지 이를 배제하진 않는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개신교 신학에서 종교개혁 때보다 더 강하게 부각되었고 이로 인하여 종차들 간에 상호이해의 기회가 증대되었다.”라는 말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결단이 상호협력적인 관계에서 성립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로마 카톨릭 신학의 대부 격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은총은 인간을 신의 마음에 들게 만드는 은총(성화은총)과 예컨대 기적들의 선물처럼 ‘거저 주어지는 은총’(이것은 우리 인격의 기능과 공로들을 넘는 선물들이고 우리를 최선의 구원에 공동 협력자로 만들어 준다)으로 나뉜다.”라고 설명한다. 아퀴나스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임에 틀림없지만 최선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노력과 협력이 동반되어져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보수주의 신학자들도 공공연하게 ‘인간의 협력’을 정당화하고 있다. 박형용 박사는 “사람이 성화의 공작에 협력한다고 말할 때에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이 일에 한 개인이 독립적인 동작자이어서 이 일을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일, 부분적으로 사람의 일을 만든다고 함은 아니다. 이 말의 의미는 다만 하나님이 부분적으로 이성적 실유로서의 사람을 기구로 하여 그의 기도와 지능에 의한 성령과의 협력을 요구하여 성화의 공작을 시행하신다고 함이다. 성화에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의 영(靈)과 협력하여야 된다는 것은 성경이 밝히 보여 주나니(롬12:9, 16, 17; 고전6:9~10. 갈5:16, 22)”라고 말했다. 박형용 박사는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인간의 협력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성을 도구로 활용하여 협력을 요구하시기 때문에 인간은 반드시 이에 협력해야 된다는 것이다. 보수주의 신학자 J. 머레이 역시 “성화에 있어서 우리는 성령께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명령적이다. 우리는 물론 성화의 전 과정에서 우리 행위가 협력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협력’에 대한 문제점은 첫째,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개념의 미숙에 있으며 둘째, 성경의 ‘명령문’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는 앞에서 설명했기 때문에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지만 ‘명령문’에 대해서는 새로운 정립이 필요하다고 본다.

  성경의 명령법은 사역동사의 형태로 사용되며 명령의 주체와 시행자가 따로 분리되어 이분법적인 구도에서 시행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명령이 있다. 이것을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 명령문이다. 그런데 명령형은 명령형태의 동사를 의미하며 사역동사의 형태로 활용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명령’의 개념에 대해서 명령하는 자와 그 명령에 복종 또는 불복종의 이중적인 관계로 이해하고 있다. 신정통주의 신학자인 바르트(Karl Barth: 1866~1968) 역시 그의 윤리관에서 “은혜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요구한다. 은혜의 직설법은 은혜의 명령법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인간의 복종이나 불복종이 남아있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과 인간의 이원론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며 결국에는 인간의 행위와 윤리에 집착하는 신학을 낳게 된다"

  위의 인용문에 나타나듯이, 성경의 명령문은 이분법적 도식에 의해서 명령자와 수행자가 독자적으로 활동하거나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명령’은 절대명령으로서, 절대명령이란 뜻은 명령하신 절대자가 인간의 인격적인 작용을 통해서 하게 하신다는 의미임을 명심해야 한다.

" ‘~하라’라는 명령문은 ‘~케 하다’ 또는 ‘~하게 하다’라는 사동(使動)표현으로서 ‘~으로 하여금 ~하게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명령문 형식의 교훈이나 권고는 상대적인 관계에서의 명령이 아니라 명령의 주체자인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인간의 지정의(知情意)를 작용하게 하심으로써 실행됨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칼빈의 주장과 같이 하나님의 은총과 성화(聖化)는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적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자적이고 절대적인 주권에 의한 것이 확실하다.

  이에 대해 칼빈은 “선행의 첫 부분은 의지이며, 나머지 부분은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강한 노력인데, 이 두 가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지에 대해서나 그것을 이루려는 노력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우리의 것으로 주장하게 되면, 그것은 여호와의 것을 빼앗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의지를 도우신다고 말하면, 결국 무엇인가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지를 만드신다고 말하면, 우리의 의지 속에 있는 모든 선한 것들이 다 우리 바깥에서 비롯된 것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3장에서 취급되는 인간의 본성 상태는 원인과 타락인 그리고 중생인 모두에게 자율적인 의지가 없으며 하나님께 종속된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제2권 제4장 하나님의 섭리 영역(領域)
제2권 제2장 노예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