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제2권 제6장 중보자 그리스도의 필요성
“첫 사람 아담의 타락 이후로는 중보자를 떠나서는 하나님에 대한 그 어떠한 지식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되지 못했다(롬1:16, 고전1:24).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시대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그러므로, 성경이 한결같이 구원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라고 가르치는 그분(요10:9)의 은혜가 없이, 불경건한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 무작정 하늘을 개방시키는 자들의 우매함이란 얼마나 악한지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중보자를 떠나서는 결코 옛 백성들에게 자비를 보이신 일도 없고, 그들에게 은혜에 대한 소망을 주신 일도 없다. 율법에 나타나 있는 희생 제사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시행하시는 속죄 이외에는 다른 어디에서도 구원을 찾지 말아야 할 것을 신자들에게 공공연하게 가르쳐 주는 것이지만,
비록 왕과 백성들이 사악하게도 그들에게 베풀어진 약속을 거부하였고, 마치 하나님의 맹세를 고의적으로 무시하려는 것처럼 처신하였으나, 구속주께서 그의 정하신 때에 오실 것이므로 결코 그 언약이 무효화되지 않을 것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 中
칼빈은 6장에서부터 11장에서 타락한 인간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그리스도의 구속을 소망해야 한다고 말한다. 율법은 인간이 죄인임을 드러내게 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며, 이것은 율법과 복음을 통해서 명백하게 계시되었다고 증거한다. 그는 이러한 맥락에서 구약과 신약은 유사점이 있고, 모형과 실체로서의 차이점이 있음을 증거한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에게 중보자의 필요성과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구속사신학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구속사신학의 틀은 인간의 타락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보상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구속사 신학의 취약점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인간의 구원은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원리나 사역을 총체적으로 증거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취약점을 갖고 있다. 집필자는 칼빈의 구속사 신학과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을 대비하여 계시신학을 좀 더 확고한 체계로 정립하고자 한다.
칼빈은 6장에서 중보자(中保者)이며 구속주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증거한다.
첫 번째,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당신의 지혜를 나타내셨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이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중보자를 힘입어야 된다고 말했다. 모든 시대를 망라해서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그를 통하지 않고는 생명에 이를 수 없고, 오직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의 생명을 이어받을 수 있다고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첫 사람 아담의 타락 이후로는 중보자를 떠나서는 하나님에 대한 그 어떠한 지식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되지 못했다(롬1:16, 고전1:24).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시대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그러므로, 성경이 한결같이 구원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라고 가르치는 그분(요10:9)의 은혜가 없이, 불경건한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 무작정 하늘을 개방시키는 자들의 우매함이란 얼마나 악한지 모르는 것이다”
칼빈의 주장은 믿음의 주체이며 중보(仲保)이신 그리스도의 역할을 명백히 하였고, 이방종교와 종교다원주의적인 구원관과는 확실한 차별을 둔다. 칼빈에게 있어서 중보는 유일한 것이며 오직 그리스도여야 한다는 주장에 한 치의 오차가 없다. 그러나 당시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은 교황을 중보자의 위치에 두고 그리스도의 고유권한을 침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적(神的) 대리인을 자처하기까지 했다. 이와 유사한 형태로서 종교다원주의의 구원관이 있다.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의 유일성과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속자이신 것을 부인하면서, 기독교 밖에 구원이 없다는 교리는 신학적인 독단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예수를 절대화, 우상화시켜 다른 종교적 인물을 능가하는 일종의 제의(祭儀)의 인물로 보아서도 안되고, 타종교에도 스스로의 구원의 길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칼빈의 주장은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의 교황 중보사상이나 종교다원주의자들의 구원관을 단마디로 배격함을 알 수 있다. 집필자도 칼빈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중보자는 유일하신 그리스도밖에 없기 때문에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가 될 수 없다. 물론 구약시대에는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의 인물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중보의 역할을 했었다. 하지만 구약의 중보자들은 실체적으로 성취하실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적인 역할로서 필요한 자들이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실 주체이며,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한 중보자로서 구속사역을 담당하실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분으로 족하며 유일무이한 것이다.
중보는 헬라어 메시테스(mesivth")이며, 계약의 성립이나 언약의 비준을 위해서 둘 사이에 개입하는 자이거나, 전달의 매체이기도 하다. 즉, 중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의 매개이며 도구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시켜주는 자를 뜻한다. 중보는 하나님의 본질이 영원하기 때문에 시간, 공간, 형상으로 계시된 피조세계에서는 필수적이다. 타락 이전에는 인간이 생령체로 존재했었기 때문에 중보의 역할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타락이후부터는 하나님과의 소통이 차단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내세우셨다. 이것은 중보의 혁신적인 패러다임으로서 하나님의 실존을 가장 확실하게 증거하는 통로이다. 그래서 성경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이며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성취로 구성되게 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께서도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24:44)고 언급하셨다.
중보사상은 성경의 특수한 사건이나 단편적인 구절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신구약 성경 전체에 망라(網羅)되고 있다. 이것은 해석학적으로도 중요한 사안인데,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성경전체를 메시아 중심의 관점에서 접근하지 못하고, 메시아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특정 사건이나 언급된 문구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시편 전체를 메시아사상으로 이해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메시아를 연상할 수 있는 편(篇)이나 구절에만 집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역사서에서도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같이 특별한 인물이나 노아의 방주, 홍해사건 등과 같이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건들만 확대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논리체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부분에 집착하거나 단편적인 문장에 치우치면 안된다.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으로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세우신 언약(창1:28)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하실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에 대한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우신 나라창건의 언약은 둘째 아담 그리스도가 오셔서 성취하실 것에 대한 모형적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구약성경은 그리스도로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에 대한 언약이다. 신약성경은 예수 자신의 성취사역(사복음서)과 성령의 성취사역(행~계)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성경은 중보의 모형인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계시이며 신약성경은 중보의 실체인 그리스도에 대한 성취계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유일하신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수께서도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요14:9~10)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유념할 것은 중보자의 필요성이다. 즉, 중보자의 필요성이 인간의 타락 때문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말이다. 구속사 신학은 논리의 출발이 인간의 타락을 기점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속시킨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이와 같이 개진되는 구속사신학의 맹점은 마치 섭리의 초점이 인간의 타락과 구원에 맞추어지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학은 타락한 인간과 그리스도의 구속이라는 등식에 의해서 성경을 구원사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은 하나님의 구원사를 섭리의 목적으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성취를 통한 자기계시를 근간으로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시고 타락 이전에 이미 일방적으로 3대 언약을 수립하셨다(창1:28). 그리고 언약을 성취하시는 여호와이심을 계시하기 위하여 타락한 아담과 관계없이 둘째 아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하신다. 이것이 성경의 해석학적 원리이며 계시의 핵심이다. 중보의 중요성은 단순히 타락한 인간의 구원 차원보다는 좀 더 심층적이고 본질적이며 총체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데 있고, 그 원리는 중보 즉, 언약과 성취에 있으며 중보자는 유일하신 독생자 그리스도이심을 체계화해서 인식해야 된다는 뜻이다.
두 번째, 칼빈은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중보자를 통해서만 주어졌음을 제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중보자를 떠나서는 결코 옛 백성들에게 자비를 보이신 일도 없고, 그들에게 은혜에 대한 소망을 주신 일도 없다. 율법에 나타나 있는 희생 제사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시행하시는 속죄 이외에는 다른 어디에서도 구원을 찾지 말아야 할 것을 신자들에게 공공연하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칼빈은 구약성경의 내용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음에 대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말이 모든 민족에게 구원을 가져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갈3:14, 16), 율법 하에서도 거룩한 조상들이 믿어야 할 대상으로 항상 그리스도를 그들 앞에 제시하셨고, 다윗과 그의 후손들과 세우신 언약 역시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이시기로 작정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는 필요성이 약화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칼빈의 해석학적 관점대로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중보적인 구원사를 피력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의 구원사가 일관되게 소개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가죽 옷을 입혀서 구원하시고(창3:21), 노아를 홍수로부터 구원하시고(창6:17~19), 거짓말한 아브라함을 애굽의 바로에게서 구원하시고(창12:17~20),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생활(출6:6~7)과 바벨론의 포로에서 구원하시고(선지서), 창세전 선택하신 백성들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다(요5:24).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아담, 노아, 아브라함, 이스라엘 백성들, 선택한 백성들을 무엇 때문에 구원하셨는가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시행하기 이전에 구원의 대상자들에게 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 이전에 아담에게 나라 세워 주실 것을 먼저 언약하셨다(창1:28). 노아시대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도 노아에게는 심판을 모면하여 구원해 주실 것을 미리 언약하셨다(창6:18~20). 아브라함은 바로에게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으나, 그의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사라의 태를 보존하시어 구원하신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할 것을 앞서 언약하셨기 때문이다(창12:1~5, 12:17, 17:15~1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학대에서 해방시키고(창15:13~14), 바벨론의 포로에서 해방 시키신 것도(신32:, 삼하 7:13) 열조 아브라함과의 언약대로 나라를 세워주고 보존하기로 약속하신 것(창12:1~5)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구원사를 본다면, 하나님의 구원 이유를 인간의 타락에서 찾기 보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성취의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의 언약과 성취의 구조에서 성경을 조망한다는 것은 인간의 타락과 구원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론적인 측면보다는 원리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섭리의 기초는 하나님의 언약으로부터 출발하고, 언약을 성취하심으로서 당신의 존재를 계시하는데 목적이 있다. 구속사는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이며 인간의 타락역시 구속을 이루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인간의 타락과 구속은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적인 측면에서 취급해야만 성경이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 선명해진다. 인간의 타락과 그로 인한 유일하신 중보자 그리스도를 주장하는 칼빈의 논리는 구속사적 맥락에서 보면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중보자 그리스도의 사역목적을 타락한 인간의 구원에 두느냐 아니면 언약을 성취하시는 여호와의 자기계시에 설정하느냐는 판단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칼빈은 구약의 믿음과 소망은 약속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약속의 내용은 이사야 7장 4절을 근거로 해서 “비록 왕과 백성들이 사악하게도 그들에게 베풀어진 약속을 거부하였고, 마치 하나님의 맹세를 고의적으로 무시하려는 것처럼 처신하였으나, 구속주께서 그의 정하신 때에 오실 것이므로 결코 그 언약이 무효화되지 않을 것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중요한 논점은 ‘약속’의 내용인데, 칼빈은 선지자들의 예언(합3:13, 왕하9:19)을 인용할 때도 역시 나라의 회복과 백성들의 구원을 상기시키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포괄적이며 원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물론 선지자의 예언이나 다윗과의 약속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명시하고 있으며 이것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결부시켜 해석하는데 까지는 무리가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과 구원을 약속하셨으며 섭리하시는가에 있다. 약속의 동기를 단지 타락한 인간의 구원이나 하나님의 은총에만 결부시키는 것은 편협된 발상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약속을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과 회복을 약속하기 이전에 먼저 체결하신 언약이 있다. 이 언약은 모든 섭리의 근간이며 모든 약속의 원천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역사를 이 언약에 기초해서 섭리하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시고 3대 언약(창1:28)을 세우셨다. 이 언약은 둘째 아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하실 것이며 그가 오실 때 까지 유효하다. 문제는 아담의 타락이후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歷史)인데,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에 기반을 둔다(창12:1~5, 17:1~9). 단 이 언약의 성격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에 대한 모형인 것이다. 모형적인 언약이 필요한 이유는 아담에게 세우신 실체적인 언약을 그리스도로 하여금 성취하실 때 까지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조건적으로 구원사역을 베푸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열조와 맺으신 은혜언약(3대 언약) 때문이다. 그래서 백성들의 범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방적인 구원사역을 베푸신 것이다. 바울도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3:16~17)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율법을 범하였고 그 결과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아주 진멸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 그 이유는 바로 열조와 세우신 언약 때문이며, 그 언약을 인간들의 범죄행위와 상관없이 성취하심으로서 여호와이심을 확증하신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언약을 성취하시는 여호와의 존재를 계시하는데 근본적인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네 번째, 칼빈은 하나님을 믿게 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필수적이라 한다. 칼빈은 “경건으로 향하는 첫 걸음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그의 나라의 영원한 기업에 이르도록 우리를 모아들이시기까지 우리를 돌아보시고 다스리시고 양육하신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있다”라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설명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없이는 하나님을 아는 구원에 이르는 지식이 불가능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칼빈은 믿음의 중요성을 구원의 하나님과 결부시켜 설명한다. 칼빈의 주장대로 믿음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구원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물론 성경에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구원 그리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는 다양하고 면밀하게 다루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도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12:2)라고 언급하듯이 믿음은 그리스도의 구원과 하나님을 연관 짓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중요성은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이며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기능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접근하기 보다는 언약성취사적인 체계로 이해하는 것이 계시의 본질에 부합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땅위에 보내신 것은 창세전부터 작정하신 계획을 드러내심으로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계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 계획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우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인데, 첫 아담에게 언약하신 실체적이고 신령한 나라이다(창1:28).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그리스도로 성취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씨로 생육 번성시키시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세상을 정복하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권세로 교회를 통치하게 하신 것이다. 이것에 대한 모형적인 계시는 아브라함에게 세우신 3대 언약대로 아브라함의 씨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고(창~민30:),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시며(민31:~삿) 유다 지파의 홀을 따라 다윗의 왕가를 통해 나라를 창건하시고 보존하신 것이다(룻~에).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말씀으로 존재하셨다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셨다. 말씀으로 존재하시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구약의 언약을 총체적으로 성취하심으로서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 여호와의 존재를 명백하게 증거 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역의 본질이며 계시의 절정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직접적으로는 영생에 이르게 하는 수단이고,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는 유일한 통로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믿음에 대한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의 관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하나님을 안다는 협소한 의미보다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그리고 사역을 이해한다는 보다 포괄적이고 근본적이며 계시적인 관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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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
제2권 제7장 율법을 주신 목적 |
제2권 제5장 자유의지론에 대한 반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