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0-12-04 15:2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제2권 제8장 십계명에 대한 해설


“주께서는 그의 율법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일을 이루신다. 첫째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정당한 권세가 자신에게 있음을 말씀하시는 동시에, 자신의 신성을 높이 우러러 받들 것을 촉구하시며 그런 경건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신다. 둘째로, 자신의 의의 규범을 공포하신 다음, 우리의 무능력과 우리의 불의함을 책망하신다.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든 -그는 오직 의로운 것만을 요구하실 수 있으므로- 본성적인 의무로 알아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과실이 된다.

주께서는 자신의 의에 대한 존경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의에 대한 사랑과 악에 대한 혐오가 우리 마음에 젖어들게 하시기 위하여 약속과 위협을 덧붙였다.
 
우리를 모든 면에서 강권하시고자, 그는 그의 계명들을 순종하며 지키는 자들에게 현재의 삶 속에서의 축복과 영원한 복락을 약속하시며, 동시에 계명들을 범하는 자들에게는 현재의 삶 속에서도 재난이 있을 것임은 물론 영원한 죽음의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위협하시는 것이다.

주께서는 완전한 의의 규범을 제시하시면서 그 각 부분들을 모두 그의 뜻과 연관지으심으로써, 순종보다 그를 더 기쁘시게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께서 의(義)의 전체를 포괄하는 그의 율법을 두 부분으로 나누신 것은, 첫 번째 부분에서는 특별히 하나님의 위엄을 예배하는 일에 관계되는 신앙의 의무들을 다루시며, 두 번째 부분에서는 사람들과 관계되는 사랑의 의무들을 다루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중략) 그리고 두 번째 돌판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것에 걸맞게 인간 사회에서 어떻게 우리 스스로 처신해야 할지를 가르치신다.

1계명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 이 세상의 삶의 모든 활동들의 유일한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사악한 미신을 경계하여, 우리의 생각이 참되신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서 온갖 잡신들을 좇아 이리저리 방황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2계명 새긴 우상이나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태만을 각성시키는데 도움이 되게 하고, 남편의 의무를 다하면서 아내에게 사랑과 정조를 요구하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백성들의 배교를 경계하신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20:5)라는 구절은 “여호와의 의로우신 저주가 너무 위중하여 악인의 머리 뿐 아니라 그의 가문 전체에 임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3계명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이름의 위엄을 높이 받들기를 바라신다.

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주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 계명의 의식적인 부분이 폐지되었다는 것이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이시므로, 그가 계심으로써 모든 예표들이 사라지는 것이며, 그가 실체(實體)이시므로, 그가 나타나심으로써 모든 그림자들이 뒤로 숨는 것이다. 단언하건데, 그리스도야 말로 참 안식의 성취이시다.
이러한 사실은 어느 하루 동안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하여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지기까지 우리의 삶의 전 과정을 다 포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날짜를 지키는 미신적인 행위를 철저하게 삼가야 마땅한 것이다.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주께서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굴복을 사용하셔서, 점차로 우리를 모든 정당한 굴복에서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모든 굴복이 동일한 원리를 지니기 때문이다.

6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여호와께서는 인류를 일정한 통일성으로 함께 묶어두셨으므로 각 사람마다 모든 사람의 안전에 유념해야 한다.

7계명 간음하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 정숙(貞淑)함과 순결을 사랑하심으로 모든 부정함을 멀리해야 한다.

8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우리는 각 사람이 소유한 것이 그저 우연히 그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만유의 주께서 분배해 주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진리이신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미워하시므로 우리가 서로 속임이 없이 진실을 행해야 된다.

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 전체가 사랑으로 가득하기를 원하시므로 사랑과 반(反)하는 모든 욕망을 우리 마음에서 제거하여야 한다.

이제는 율법 전체의 목적을 정리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곧, 의를 실현시켜서 하나님의 순결하심을 본받아 그것에 합당하도록 인간의 삶을 형성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자신의 성품을 묘사해 놓으셨으므로, 누구든지 거기서 명령하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게 되면, 말하자면 자기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본문 中

  칼빈은 율법(계명)의 성격을 “무엇을 요구하시든(그는 오직 의로운 것만을 요구하실 수 있으므로) 본성적인 의무로 알아 복종해야 하는 것”으로 단정하며 규범화한다. 그리고 율법은 하나님에 대한 존경심과 의(義)에 대한 사랑 그리고 사악에 대한 미움을 갖게 하고, 이것을 채우기 위해서 덕행과 거역에 따른 보상과 형벌의 상벌기능도 보유하고 있음을 제시한다. 즉, “주께서는 자신의 의에 대한 존경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의에 대한 사랑과 악에 대한 혐오가 우리 마음에 젖어들게 하시기 위하여 약속과 위협을 덧붙이셨다.” 약속과 위협은 “현재의 삶 속에서의 축복과 영원한 복락을 약속하시며, 동시에 계명들을 범하는 자들에게는 현재의 삶 속에서도 재난이 있을 것임은 물론 영원한 죽음의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밝힌다. 또한 율법은 의(義)의 규범으로써 완전하기 때문에 오로지 복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율법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외형적인 변화도 중요하지만 내적인 변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며, “율법이 영혼과 지성과 의지의 순종을 요구할 뿐 아니라, 육체의 모든 부패한 것을 깨끗이 씻어내고 영적인 것 외에는 아무런 냄새도 풍기지 않는 그런 천사와도 같은 순결을 요구한다”라고 말한다. 천사 같은 순결은 세상 죄를 짓지 않는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함을 뜻한다. 즉 단순히 살인하지 않는 마음과 행동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생명을 위하여 모든 도움을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라는 적극적인 태도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칼빈의 주장을 정리하면, 계명을 도덕법으로 규정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사악을 미워하게 하고, 상벌기능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는 율법을 종교적인 맥락에서 접근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존경심을 함양한다는 점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계명을 도덕법으로 규정한 점에 대해서는 신학적인 재고가 필요해 보인다. 계명은 ‘신의 명령’이란 뜻으로 ‘하라’와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구분된다. 신학적인 의미로는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로서의 모형과 그림자이다. 도덕(道德)이라는 것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며 인간이 집단의 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가야 할 방식과 습속(習俗)에서 발생한 것이고, 덕과 악덕을 분별하는 것을 배우는 과정으로서 예의바른 행동을 뜻한다. 도덕의 발생은 인간의 생활양식이나 전통적인 관습(慣習)의 경험에 의해서 상호간의 공존을 위한 목적으로 집단의 질서나 규범을 정한데서 기인한다. 이렇게 인간이 중심에 있다는 점에서 도덕은 법과 동일한 근원에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지 사회가 발전하고 그 규모가 비대해짐에 따라, 법은 사회적인 외적(外的) 규제로 사용되고, 도덕은 개인적인 내적(內的) 통제의 장치로 분화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구성된 법과 도덕은 사회적인 신분과 경제적인 차등으로 형성된 계급사회에서 정치지배의 유력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즉, 법과 도덕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법은 국가권력을 지배하고, 도덕은 시대의 보편적인 원리를 지배하는 영역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법과 도덕은 인간관계에서 파생된 것이며, 사회질서의 유지와 함양 그리고 권력 있는 기득권자가 약자를 지배하기 위한 제도적이며 심리적인 장치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박용기 목사는 “계명과 도덕은 근본적으로 그 의미가 다르다. 계명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스스로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명하신 계율이라면, 도덕은 인간이 인간 스스로의 질서를 위하여 정한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명과 공자의 도덕은 그 원리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계명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종교적인 계율이라고 한다면, 도덕은 인간과 인간과의 윤리적인 계율인 것이다. 이렇게 계명과 도덕이 그 의미나 원리에 있어서 엄연히 근본적인 큰 차이를 이루고 있는데, 십계명을 도덕법으로 취급하는 것은 커다란 모순이 아닐 수 없다.”고 증거한다. 이 말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은 계명으로서 종교적인 성향을 갖고 있고, 도덕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필요한 윤리적인 계율이란 뜻이다. 이와 같이 종교적인 계율인 계명과 윤리적인 계율인 도덕은 목적과 용도 면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계명을 도덕법으로 규정하는데, 이유인즉 율법(계명)을 보편적인 관점에서 접근했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위에서 언급한바 대로 칼빈은 율법을 인간의 공존을 위한 사회질서확립의 지배수단으로서 규범적인 차원에 이해한 것 같다. 칼빈이 율법을 도덕법으로 규정한 것 자체만 보더라도 통상적인 용도로 이해한 것이 분명하고, 법을 적용하는데 있어서도 범법행위에 따른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칼빈이 규정하는 도덕법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종교적 계율로도 규정되지만, 사회질서유지를 도모하고 범죄예방 및 처벌기준으로도 활용된다는 것이다. 또한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죄인임을 자각시켜서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과 생활규범과 같은 강력한 지배력을 발휘하는 도구가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도덕의 성격을 분석해 보면 율법의 계명을 도덕법으로 간주한 칼빈의 이해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덕의 규범적인 성격을 도덕(道德)과 기독교 윤리적인 건덕(健德)의 차이점에서 살펴보면, 도덕은 신분과 위치 또는 명분과 제도적인 의식 때문에 수반되는 강제성이 내포되어 있지만, 건덕은 사랑의 발로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해서 배려, 이해, 수고하는 것이다. 도덕은 규범에 의해서 지켜야 되는 당위적인 장치를 갖고 있지만, 건덕은 사랑의 힘에 의해서 장성한 분량만큼 행해지는 것을 말한다. 도덕은 싫든 좋든 실행해야 하는 원칙과 내적인 통제성을 갖고 있지만, 건덕은 사랑의 힘에 의한 작용으로써 즐겁고 평안한 마음의 활동이다. 도덕은 개인적이며 윤리적인 성향이 강하지만, 건덕은 교회의 유익을 위한 신앙의 발로이다.

  기독교인의 생활원리는 사랑에 의한 건덕을 세워가는 것이지, 도덕적인 규범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윤리의 원천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며, 은혜를 깨닫는 만큼 사랑의 감동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부부가 생활의 규칙을 정해놓고 그것을 잣대로 해서 서로 판단하고 평가한다면 삭막할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가정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위해 수고하는 것이므로 억지나 부담감이 없을 것이다. 교회에서도 사랑의 힘보다 법과 규칙이 선행되면 누구에게나 부담과 거부감 그리고 위선이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사랑의 발로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지며 이해와 용납과 수고가 실행된다면 그것이 바로 천국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법과 규범의 심판 아래 있던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대가없이 선사(膳賜)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그 어떤 법적인 장치, 제도, 규범 등이 속박하거나 규제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외에는 어떤 조항이나 명분으로도 성도를 규제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

  기독교 윤리는 도덕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숙의 농도만큼 그리스도의 법 즉, 사랑의 법이 지켜지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믿음의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깨달은 성도들이 신(神)인식의 농도만큼 나타나는 행동이다. 아브라함의 예를 들면, 그는 믿음의 대명사격인 인물이다. 하지만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성숙된 행위가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후손의 번창과 가나안 땅을 약속받았을 초기만 하더라도, 아내를 누이라 속이기까지 하는 파렴치한 행동을 하였고, 사라의 몸을 통해서 자식을 주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생산하였다. 그러나 출산이 불가능한 아내 사라가 이십 오년 만에 이삭을 출생하면서부터 그의 신앙은 성숙된 면모를 보이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 주저 없이 바치려는 행동을 보였다(창22:10). 이러한 아브라함의 행위 저변에는 만사를 예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에 대한 확신이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은 약속대로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 즉, 없는 것도 있는 것같이 여기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전능자로 믿어졌기 때문이다(롬4:17).

  이와 같이 믿음의 행위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지 종교적인 규범과 제도적인 장치에 의해서 표출되는 것이 아니다. 혹자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는 말,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한다는 말, 사랑의 법을 실천한다는 말, 믿음의 행위란 말에 대해서 추상적이며 관념적인 의미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계율에 의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의무조항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도의 행위는 믿음과 행위가 이원론적으로 구분되어 실행되는 다른 차원의 범주가 아니라 신인식의 농도에 비례해서 깨달아 느끼며 결단하는 인격적이며 유기적인 작용이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만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만큼 근심하지 않는 믿음의 행위가 나타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아는 만큼 선한 일을 위해서 봉사하게 되는 믿음의 행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규범(規範)은 일정한 이상이나 목적 등을 이루기 위해 마땅히 따라야 할 법칙과 원리를 뜻한다. 따라서 규범은 의무와 책임이 부과되고 그에 따른 상벌이 부과된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법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물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듯이 이루어지는 법칙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계명의 용도는 도덕적인 규범이기 보다는 하나님을 알고 기억하게 하는 종교적인 의도가 분명하고, 계명의 기능은 상벌효과에 따른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한다는 단편적인 설명보다는 총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즉, 계명을 성도들의 단순한 행동원리로 적용하는 데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는 뜻이다. 덕행에 따른 상급이나 징벌의 두려움을 통해서 절대적인 복종을 유발한다는 것은 상선벌악(賞善罰惡)이나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발상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계명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규례와 연결해서 해석해야 한다. 이유인즉 계명은 정죄기능이며 규례는 사죄기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계명의 정죄기능만 강화시켜 절대순종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규례를 통한 사죄기능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동일하게 취급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정죄와 사죄 기능을 통한 하나님의 의도를 균형있게 이해할 수 있다.

  칼빈은 십계명의 두 돌판을 구분하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며, 둘째는 인간 사회에서 어떻게 우리 스스로 처신해야 할지를 가르치신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하는 것과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분류한다. 물론 예수께서도 율법의 대강령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표명하신바 있다(마22:37~40). 이 말은 하나님과 인간관계를 분류해서 구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이웃도 사랑하게 됨을 가리키는 것이다. 율법의 두 돌판에 기록된 내용들도 하나님을 기억하여 경외하게 위한 목적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과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피력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두 돌판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것과 인간의 사회생활을 위한 것으로 구별된 것이 아니라 둘 다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다만 방법상에 있어서 하나님과 직접 관련된 조항과 인간관계를 통한 간접적인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을 뿐이다. 계명의 기본정신은 하나님을 알고 경외케 하려는데 있지, 사회생활의 처신이나 성도생활의 규범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실 때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20:2)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율법의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수여하고 난 뒤에는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출31:13)는 안식일 규례를 규정하신다. 이것은 안식일을 통해서 율법의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기억하고,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확고히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열조와의 언약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심으로써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시려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사백년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것은 대대손손 잊어버릴 수 없는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잊을 수 없는 뼈저린 과거의 역사를 기억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하시려는데 근본적인 의도가 있다.

  출애굽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미 사백여년 전에 이스라엘의 열조 아브라함에게 역사적으로 언약하신 것이며, 약속하신 사백년의 때가 됨으로서 성취된 것이다. 따라서 계명을 주신 동기는 언약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섭리에 있고,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출애굽의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율법으로 이해해야만 도덕법이나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차원에서 탈피할 수 있다. 율법은 윤리도덕의 규준이나 사회질서의 안녕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적인 관계를 인식하게 하는 계시적 차원에서 통찰해야 한다.

  칼빈은 계명을 풀이할 때에 출20:2~3의 말씀을 머리말로 규정하여 제정 의도를 명확하게 밝힌다. 계명의 제정 의도를 확고히 한다는 것은 나머지 계명들을 해설하는데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신적권위의 신빙성을 돈독히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맥락에서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출20:3)라는 첫째 계명을 “이 세상의 삶의 모든 활동들의 유일한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사악한 미신을 경계하여, 우리의 생각이 참되신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서 온갖 잡신들을 좇아 이리저리 방황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라고 해석한다. 칼빈의 해설은 정확하지만 머리말과 연계시켜 역사적인 배경에서 이해하면 더욱 쉽게 납득이 갈 것이다.

  이에 대해 박용기 목사는 “그 당시의 백성에게는 이 첫째 계명을 지키며 행하기가 너무도 쉬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백성은 여호와께서 직접 애굽에서 자기들을 인도하여 내시는 것을 보고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설령, 누가 그들에게 다른 이방 신을 그들 앞에 있게 하라고 강요한다 할지라도 하고 싶지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만일 다른 이방 신을 그들 앞에 있게 한다면,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첫째 계명을 그들에게 명하신 것이다.”라고 정리한다. 이와 같이 계명에 대한 바른 해석은 출애굽이라는 역사적인 동기, 목적과 연관 지음이 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칼빈은 새긴 우상이나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명하신 둘째 계명을(출20:4~6)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태만을 각성시키는데 도움이 되게 하고, 남편의 의무를 다하면서 아내에게 사랑과 정조를 요구하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백성들의 배교를 경계하신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20:5)라는 구절은 “여호와의 의로우신 저주가 너무 위중하여 악인의 머리 뿐 아니라 그의 가문 전체에 임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5)라는 구절은 “이 말씀이 언제나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의인을 위로하고 죄인을 위협하는 데에는 이것이 결코 헛되거나 효력이 없는 경고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족한 것이다.”라고 밝힌다.

  칼빈의 해설은 범죄자에게는 삼사 대에 이르러 형벌이 주어짐을 분명히 밝히고, 천대에 이르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가변적이지만 의인에 대한 위로와 죄인에 대한 공포를 주어 선(善)을 장려하고 악(惡)을 경계하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거나 장려하기 위해서는 당근과 채찍이 필요하다. 그러나 칼빈의 말처럼 아비로부터 자식에게까지 죄책이 전가되거나 하나님의 은혜가 가변적일 수는 없다고 본다. 만약 아비의 죄과가 삼사 대까지 미친다면 거의 종신형과 같은 형벌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킬 자가 없고 모두가 죄인인데, 그 죄과가 대대로 계승된다면 영원히 죄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시편에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출30:5)라는 말씀대로 삼사 대까지 죄를 갚는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할 때 잠깐의 징계를 가한다는 뜻이며,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은 계명을 지키는 언약백성들을 영원히 사랑하여 주신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조와 세우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며,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를 계시하기 위한 것이다.

  칼빈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20:7)라는 셋째 계명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이름의 위엄을 높이 받들기를 바라신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경솔히 사용하거나 남용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한다. 물론 칼빈의 생각은 타당하다.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해야 하며 신성한 이름에 모독이 자행되면 안된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이며 의미적인 해석이 첨가되었으면 한다. 유대인들은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나머지 성경을 낭독할 때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면 소리 내어 발음하지 않고 눈으로만 목도하는 전통이 있다. 이 관습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정확한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박용기 목사는 “망령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랏솨웨(א󰕵󰚋󰗛)’라는 말로서, 그 뜻은 ‘헛되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라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그 열조에게 세우신 언약대로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이심을 잊어버리고 입으로만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열조에게 3대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무거운 짐 밑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해 주신 것을 잊지 말고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백성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망령되이”, 곧 ‘헛되이’만 부르지 아니한다면, 그 백성이 하나님 여호와 외에 다른 신(神)들을 그들 앞에 있게 하지도 아니하고, 그 신들의 우상을 만들지도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직 하나님 여호와만을 경외하며 섬기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이와 같이 ‘여호와’는 언약대로 이루시는 분이라는 뜻으로써 이스라엘 열조와 맺은 3대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칭호이다. 셋째 계명은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이름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열조와의 언약에 근거하여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 사건을 통해서 여호와를 잊지 말고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취지에서 주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칼빈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20:8)라는 넷째 계명을 그리스도와 연관지어 실체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주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 계명의 의식적인 부분이 폐지되었다는 것이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이시므로, 그가 계심으로써 모든 예표들이 사라지는 것이며, 그가 실체(實體)이시므로, 그가 나타나심으로써 모든 그림자들이 뒤로 숨는 것이다. 단언하건데, 그리스도야 말로 참 안식의 성취이시다. (중략) 이러한 사실은 어느 하루 동안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하여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지기까지 우리의 삶의 전 과정을 다 포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날짜를 지키는 미신적인 행위를 철저하게 삼가야 마땅한 것이다”
 
  위의 말대로 안식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지극히 복음적이라 할 수 있다. 구약의 안식일은 모형과 그림자로서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히 성취된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바울도 다시 율법의 종노릇 하고자하는 어리석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4:10~11)라는 말로서 책망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병폐 중에 하나는 아직도 교회에서 주일을 안식일로 착각하여 교회 출석을 강요하거나, 구약 시대와 같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거나, 물건도 구입하지 못하게 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칼빈의 주장대로 구약적인 안식일 개념으로 주일예배에 임하는 미숙한 교회들은 그러한 미신적인 행위를 중단해야 할 것이다. 구약의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는 쉬는 날이 없었지만, 칠일 째에 휴식하게 함으로써 열조와의 언약대로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여 경외하게 하시려는데 있다.

  칼빈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라는 다섯째 계명을 “주께서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굴복을 사용하셔서, 점차로 우리를 모든 정당한 굴복에서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모든 굴복이 동일한 원리를 지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경륜을 유지시켜나가기 위해서 인간세계에 차등을 두어 침범하지 못하게 하신다. 부모자식의 관계도 이러한 구도로 조성되었으며 자식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체득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순종도 자연스럽게 형성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사회에서의 질서와 역할은 존립해야 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습득된 바른 태도를 신앙적인 생활과 결부시키려는 칼빈의 의도는 존중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신 ‘부모공경’은 단순한 인륜적인 차원이 아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모의 역할은 자녀에게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을 가르치는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자녀간의 질서와 역할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고 본다. 부모가 자녀에게 실시하는 종교교육의 핵심은 계명의 서두에서 밝힌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 여호와를 알고 경외하게 하는 교육을 마땅히 담당해야하는 사명이 있다. 자녀는 부모에게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섭리하신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그 분을 경외하며 살아가게 된다. 부모공경의 성경적인 의의는 종교적인 계율이며, 그 목적은 하나님에 대한 교육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칼빈은 “살인하지 말지니라”(출20:13)라는 여섯째 계명을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혈육이라는 이중적인 근거에 의해서 “여호와께서는 인류를 일정한 통일성으로 함께 묶어두셨으므로 각 사람마다 모든 사람의 안전에 유념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적극적으로는 마음으로도 분하지 말며 이웃의 생명을 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살인을 옹호하거나 정당화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욱이 신자들은 이웃사랑이라는 대명제 앞에서 인류의 생명을 위하여 더욱 적극적인 행동을 취해야 된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역시 인륜적인 도덕률로 풀이하면 안된다.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열조와 세운 언약대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큰 민족을 이루어주시겠다는 약속에 기초해서 해석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 간에 살인이 자행되면 하나님의 언약은 성취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여호와로 존재하실 수 없게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해서 성취되는 섭리이기 때문에 모든 계명도 하나님의 언약과 결부시켜 해석되야 하는 원칙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기 때문에 특별히 그들의 생명은 생육번성을 위해 보존되고 번성되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홍해바다를 두고 애굽의 백성들은 몰사시키시고 언약백성 이스라엘의 생명은 전부 구원하신 바가 있다. 이와 같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범 인륜적인 규범이 아니라 언약백성들과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수단임을 재고해야 할 것이다.

  칼빈은 “간음하지 말지니라”(출20:14)라는 일곱째 계명을 “하나님께서 정숙(貞淑)함과 순결을 사랑하심으로 모든 부정함을 멀리해야 한다.”라고 언급한다. 즉, 성도들로 하여금 육적인 추악이나 정욕의 난무에 더렵혀지면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 역시 인륜적인 도덕률로 해석하기 보다는 종교적인 차원에서 근원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간음하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아내 외에 다른 사람과 간음을 하게 되면, 질투로 인해서 생명을 잃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간음으로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그 자손들의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에 차질이 생기고, 약속대로 성취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섭리에 일관성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간음하지 말지니라는 계명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와 세운 언약을 성취하시는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기 위한 종교적 계율임을 알 수 있다.

  칼빈은 “도적질하지 말지니라”(출20:15)라는 여덟째 계명을 “우리는 각 사람이 소유한 것이 그저 우연히 그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만유의 주께서 분배해 주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고, 정직하고도 합법적인 이익만을 얻는데 힘쓴다면, 이는 이 계명을 합당하게 복종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칼빈은 도적질 하지 말라는 계명을 하나님의 주권과 분배하심의 원칙에 충실하게 설명한다. 즉, 단순히 남의 소유에 대한 절도(竊盜) 자체를 금지함으로써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인륜적인 차원이 아니라 다분히 종교적인 계율의 관점에서 정리하고 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재물을 갖고 나오게 했으며, 가나안 땅에 가서도 온갖 재물과 성과 집과 토지를 정해주신 분복 따라 분배하셨기 때문에 도적질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이방의 소유를 빼앗아 주신 것을 잊어버리고 남의 물건을 훔친다는 것은 여호와를 망각하고 경외하지 않은 결과가 된다. 도적질 하지 말라는 계명은 언약백성들에게 언약대로 가나안 땅에서 풍요를 누리게 해주신 여호와의 주권과 분복을 망각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 주셨으며, 이 사실을 기억하여 여호와를 경외하게 위해서 세우신 계율이다. 더군다나 만사가 하나님의 분복대로 되어 진다는 사실을 안다면 도적질하기 이전에 욕심부터 사라지게 될 것이다.

  칼빈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출20:16)라는 아홉째 계명을 “진리이신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미워하시므로 우리가 서로 속임이 없이 진실을 행해야 된다.”라고 한다. 칼빈의 해석은 합당하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시고,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참 된 분이시다. 거짓증언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 여호와를 망각한 결과이고, 이웃에 대해 거짓을 일삼다보면 열조와의 언약대로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의 역사도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이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자기의 생각대로 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만사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뜻)대로 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되며 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칼빈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20:17)라는 열째 계명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 전체가 사랑으로 가득하기를 원하시므로 사랑과 반(反)하는 모든 욕망을 우리 마음에서 제거하여야 한다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칼빈의 말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롬13:10).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면 이웃도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 계명 역시 인륜적인 도덕률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음과 도적질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이다. 즉, 하나님께서 열조와의 언약대로 분배해 주신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주어진 것 이외에 타인의 아내나 재산을 탐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분복에 대한 이치를 깨달으면 이웃을 사랑하게 될 뿐만 아니라 분복의 주체가 되신 여호와를 잊지 않고 경외하게 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계명의 중요성에 대해서 “의를 실현시켜서 하나님의 순결하심을 본받아 그것에 합당하도록 인간의 삶을 형성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자신의 성품을 묘사해 놓으셨으므로, 누구든지 거기서 명령하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게 되면, 말하자면 자기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 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거기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직접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밝힌다.

  그의 논점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인간의 삶에 있으며, 이러한 삶의 양식이 곧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 되고,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장되어야 하며 그 사랑의 힘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게 된다는 것이다. 칼빈의 논리는 정연하며 하나님 중심적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강조하고 있다. 그의 사고는 그 시대의 교황중심체제와 인간본위의 공로주의 사상에 반(反)하는 신(神)중심의 사상으로 개혁의 표지로 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종교적인 계율을 부분적으로는 인륜적인 도덕률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계명의 원리와 실천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인간의 독자적인 순종이 강조되는 면이 있어 보인다.

  인간의 욕망을 조절한다는 것은 수련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지며, 하나님의 능력과 신(神)지식에 기초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명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뜻이 이런 것이니까 너희들은 알아서 지키라는 단순논리가 아니다. 백성들의 사고와 행동의 발단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정확하게 습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초두에서 밝힌 바 대로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주실 때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20:2)라는 자기 지식을 확고히 하셨다. 바로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이 지식이 욕망을 조절하고, 주어진 분복에 만족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동력(動力)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열조와 맺은 언약대로 애굽에서 생육하고 번성했으며 애굽의 권세에서 탈출했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성(城)과 토지와 재산을 분배받았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잊지 않고 하나님은 여호와시라는 확고한 사실을 인지해야만 계명을 준수할 수 있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계명의 해석원리와 실천동기가 된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십계명의 근본정신은 인륜적인 도덕률이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여 경외하게 하려는데 있다. 계명의 근본정신에 입각해서 해석해야만 하나의 목적에 열 개의 계명이 일관된 논리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에 대한 지식은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게 하고, 우상을 만들거나 절하기 않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헛되이 여기지 않을 것이며, 안식일을 기억하여 여호와를 경배할 것이고, 부모를 공경함으로써 하나님 여호와를 확실하게 배울 것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정해진 분복임을 확실히 믿음으로써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언, 탐욕을 부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십계명을 언약과 성취의 원리에서 해석해야만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며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제2권 제 9 장 율법과 복음의 관계
제2권 제7장 율법을 주신 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