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강대국 오스만 터키는 왜 무너졌을까?〈上〉
오스만 터키의 역사가는 제국의 쇠퇴 시점을 1566년 슐레이만의 사망으로 본다. 슐레이만은 위대한 정복자답게 헝가리 공략 중 진영 안에서 사망한다. 전투는 아직 ‘진행형’이었고, 승리는 장담할 수 없고 왕위계승권자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수상은 술탄의 사망을 비밀에 부치고 시신은 밀납 처리되어 후계자인 셀림 2세(1566-1574)가 등극할 때까지 3주동안 숨겨졌다.
새로운 술탄은 ‘주정뱅이 셀림’이란 별명처럼 늘 술에 취해 있던 무능력자였고, 이는 제국이 쇠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전조가 됐다. 셀림은 무병장수한 아버지의 장기집권으로 인해 42세의 늦은 나이에 술탄이 되었다. 그렇다고 황태자 시절이 길었던 것도 아니다. 장남이었고 게다가 유능하기까지 했던 이복형은 충실하게 황태자 수업을 받았다.
많은 나라에서 그렇듯이 셀림은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난 왕자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쾌락에만 탐닉하는 생활을 했다. 그것만이 정쟁에 휩싸이지 않고 천수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즉위를 2년 앞둔 형(바예지드)은 페르시아에서 반란을 일으키다 실각했고, 그 덕분에 셀림은 생각지도 않았던 술탄의 자리에 어부지리로 오르게 된 것이다.
부질없는 상상이겠지만 능력있는 바예지드가 ‘대왕’으로 칭송받는 슐레이만의 뒤를 이었다면 이후의 역사는 어떠했을까?
알코올에 절어 늘 음지에만 숨어 있다가 42살에서야 양지바른 곳에 나오게 된 최고권력자 셀림은 대왕으로 추앙받는 아버지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한가지 망상에만 사로잡혔다. 술탄으로서 그의 첫 직무는 베네치아가 차지하고 있던 키프러스 섬을 빼앗는 것이었다. 유럽 최고의 해군을 보유하고 영토확장에는 아무런 욕심이 없고 장사에만 집중하는 베네치아와 슐레이만은 늘 중립을 유지해 왔지만, 셀림은 그런 베네치아와 제대로 한판 붙어보고 싶었다.
물론 알코올 중독자인 셀림은 유럽 산 최고 품질의 포도주가 생산되는 키프러스 자체가 탐났던 것도 있다. 키프러스섬은 베네치아 영토가 된 뒤 100년 동안 효율적인 경영과 품질관리로 유럽 최고의 명품 포도주를 생산했다. 중요한 건 베네치아의 경영기법이지, 키프러스섬만 손에 넣는다고 해서 고급 포도주가 그대로 따라오는게 아님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술로 인해 늘 흐리멍텅했던 셀림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1570년 셀림은 원하던 키프러스섬을 얻었지만, 이는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유럽 연합함대와 오스만 터키 해군이 제대로 한 판 붙게 되는 ‘레판토 해전’을 초래한다. 1571년의 레판도 해전은 유럽연합함대의 대승으로 끝났고, 이것은 오스만 터키의 연승신화를 깨고 유럽에게 자신감을 안겨준 전쟁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3년후인 1574년에 셀림은 사망했다. 키프러스 산 최고급 포도주를 잔뜩마시고 술에 취해 욕실에서 미끄러져 타일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것이 사인(死因)이었다.
레판토 해전의 패배는 유럽에 대해 일방적 우세를 점하던 오스만 터키가 기울게 된 역사적 시발점이었다. ‘부자가 망해도 3대를 간다’는 말처럼 내부적인 쇠퇴가 오스만 군대의 멋진 외관 때문에 유럽 기독교도나 터키의 무슬림 모두의 시야에서 한참동안 가려져 있었을 뿐이다.
17세기는 유럽과 오스만 터키 간의 팽팽했던 균형 추가 점차 유럽으로 확실하게 기울면서 끝이 났다. 1606년 오스트리아-오스만 터키 간에 맺은 시트바토로크 평화 조약은 양 세력이 최초로 동등한 조건에서 협상 테이블에 앉아 조인한 것이다. 1699년 양국 간에 다시 맺은 카를로비츠 평화조약은 승리한 유럽 연합의 결정에 오스만 터키가 일방적으로 강요당해 조인한 굴욕적인 협정이었다. 이 조약으로 오스만 터키는 헝가리 지역을 포기하고 유럽에서 완전히 후퇴해야 했다.
이처럼 17세기는 동등권에 대한 마지못한 양보로 시작해 패배를 굴욕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마감된다. 17세기 이전에도 오스만 터키는 유럽과 몇 차례 조약을 맺었지만 진정한 의미의 협상이 아니었다. 승자인 오스만의 위세에 눌려 유럽이 억지도장을 찍은 것에 불과했다. 놀랍게도 불과 1세기 만에 양대 진영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첫째, 14-17세기의 3세기 동안 일방적으로 기독교 세계를 유린하면서 생긴 오스만 터키의 자만심이다. 이슬람 문명은 체계를 ‘문명세계’와 ‘전쟁세계’로 양분해서 이해하고, 이 세상에서 이슬람 세계를 확장하는 것을 유일한 소명으로 삼는다. 이 시기에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이슬람에 필적할 만한 종교가 없었고 세속권력으로도 칼리프 제와 견줄만한 게 없었다. 동쪽에 위치한 중국과 인도 역시 위대한 문명을 이룩했지만 이슬람 세계를 심각하게 도전한 적이 없다.
하지만 유럽에 위치한 서쪽 세계는 늘 상황이 다르게 전개됐다. 그곳에는 자신들과 유사한 사명감을 갖고 있는 또다른 세계종교인 기독교가 버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