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문화

 
작성일 : 14-04-06 15:5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나르시시즘의 심리학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추악한 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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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정립된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가 즐겨보는 영화나 책, 집 안의 인테리어, 주변 사람에게 두는 훈수, 그가 가진 종교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기준의 바로 뒤에는 ‘나는 옳아’라는 전제가 버티고 있다.
  나르시시즘. 자기애를 뜻하는 정신분석학의 용어다. 그리스 신화에서 호수에 비친 자기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그리워하다 결국 물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라는 미소년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이 나르시시즘을 조금 더 극단적인 형태로 가지고 있는 나르시시스트들이 있다.
<나르시시즘의 심리학>은 표면적으로는 그들을 다루는 듯 하면서도 나의 내면의 추하고 못된 꺼풀을 낱낱이 들추는 것마냥 신랄했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스스로를 자연 법칙에서 벗어난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내면의 공허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가 만든 환상 속에 빠져 산다. 여전히 나는 건재하며, 내 매력과 아름다움과 현명함은 유효하고, 아직도 사람들이 나를 추종하고 있을 거라는 환상 말이다. 환상 바깥에서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조소와 연민은 꿈에도 모르고.
  서두에서는 그들을 ‘타인의 영혼을 착취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나르시시스트들은 연인, 상사, 부모 등이 있는데 내가 그간 만났던 사람들 중 이해하기 힘들다 생각했던 그들의 면면이, 나르시시즘이라는 프레임을 갖다 대니 그제야 납득이 되었다.
  나르시시즘이 강한 J는 오만하고, 자신이 대단하다 여기며, 남들의 존경을 갈망하는 동시에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부족했다. ‘관계에서 좀 더 지배력을 가진 사람의 자아가 상대방의 자아를 가리거나 집어삼키는 현상’을 몸소 겪고 나니 회복하는 데 꽤 힘이 들었다. 그런 류의 사람들은 사랑의 대상을 정복 혹은 획득했다는 충족감으로 상대의 개체성을 부정하는 동시에 우리 둘은 하나라는 환상을 내세운다. 또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줄 상대, 자신의 수치심과 시기심을 떠맡아줄 상대를 원한다. 그러한 나르시시스트에게 파트너란,  ‘자신의 여러 부분을 화해시키고, 자기 자랑을 부풀리고, 결함을 떠넘기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일전에 일했던 곳의 상사도 나르시시스트였다. 권력은 수치심에 더없이 좋은 약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그 또한 당연하게 권력을 추구했다. 그에게는 자신만이 중요하며, 타인의 처지를 헤아리는 법이란 없고 오직 자신에게 자질이 따라주지 않는 것만이 (비극이자) 장애가 되었다. ‘이런 류의 인간은 시기심에 사로 잡혀 경쟁자를 늘 감시하고 자기 영역을 지키려 든다’고 한다.
  성경 속 인물들에게서도 다양한 나르시시즘을 목격할 수 있다. 특히 회심(回心)하기 전의 바울의 모습-열렬한 바리새파로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앞장 서 돌을 던지던-은 나르시시즘의 극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깨닫고 난 이후의 그는 과잉된 나르시시즘이 아닌 강건한 소명의식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문득,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결코 극단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진리에 매진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소명은 가슴으로 뜨겁게 품을지라도, 생업을 포기한 채 십자가만 들고 다니거나 식음을 전폐하고 말씀만 부르짖는 성도는 우리 주변에 없지 않은가.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믿음과 평화 가운데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지 저 나르시시스트들처럼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한다든가, 이용한다든가 혹은 시기하여 그의 마음이 상하기까지 버려두시지는 않을 거란 얘기다. 자연스럽게, 그리고 온건하게 당신의 뜻이 우리의 마음과 시기와 상황을 만들어가심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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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기억하라
주어진 것에 당연함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