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01일 (수) 

> 학술 > 철학 > 종교개혁 500주년 특집: 로고스의 운동력과 소피아의 대이동
기사공유 작성일 : 21-09-01 23:37  글자크기 크게글자크기 작게 기사 출력하기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서른일곱. 19세기 이후 유럽: 성경권위 추락과 무신론 확산
19세기 영국에서 가톨릭 회복 운동이 확산하고 있을 때 러시아는 터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오스만제국 하에 있던 모든 정교회를 황제(tsar)가 지배하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중세의 로마 가톨릭처럼 19세기 러시아는 기독교 왕조가 부활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은 러시아가 유럽을 비롯한 아시아를 정복하는 전쟁을 응원했다. 왜냐하면 그것을 정교회 확산을 이끄는 하나님의 섭리로 보았기 때문이다. 1820년대 피터 대제(Peter the Great)는 정교회 종교 예법에 따라 제국 통치하에 있던 무슬림들에게 장례 규정을 만들기도 하면서 정교회를 정치적으로 치밀하게 이용했다. 이렇게 19세기 러시아 황제에게 종교는 자신의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도구였다. 황제의 전제정치는 정교회와 민족주의가 떠받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1917년 러시아 혁명까지 이어졌다. 로마 가톨릭을 믿었던 서부 유럽인의 교회 출석률이 1%까지 급감하는 상황이었지만, 당시 러시아인들의 교회 출석률은 90%에 육박했다. 저속한 수도사들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국민의 존경 대상이었다. 그래서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 당시까지 수도사들은 2배로 증가(21,000명)했으며, 더욱 두드러진 것은 여성 수도사들은 (60여 년 동안 8,533명에서 70,453명으로) 8배 이상 증가했다.(189) 그러면서 알렉산더 2세는 1806년 프랑스대혁명 자유·평등·사상을 수용하여 모든 국민에게 교육의 권리 특히 고등교육의 자유를 부여한다. 그래서 다수의 성직자들이 배출된다. 하지만 신학교육을 받았다고 마음대로 정교회의 종교적 특권을 누릴 수는 없었다.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은 슬라브 민족주의(Slovophilism) 옹호자 노선을 걷거나 혁명적 허무주의(nihilism) 주창자가 되어 잔혹한 복수와 암살의 주동자가 되기도 했다. 그 유명한 인류 최초의 자살 폭탄 테러 사건이 1881년 알렉산더 2세를 살해한 러시아 무정부주의자의 소행이었다. 그리스 정교회가 아닌 ‘러시아정교회’는 슬라브주의라는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개념이 등장한 것도 이 당시였다.

19세기 이후 슬라브주의 중심의 러시아정교회는 가톨릭과 개신교에 대해 모두 비판적이었다. 러시아정교회 최초 평신도 신학자 중 하나인 알렉세이 호미야코프(Aleksei Khomiakov)는 가톨릭은 “자유 없는 연합”이, 개신교는 “연합 없는 자유”가 지배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러시아정교회 옹호자들은 서방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이로써 황제의 독재정치를 비판했다. 그리고 러시아혁명까지 이어지는 운동을 이끌었던 (게오르그 가폰 신부와 같은) 개혁세력들은 처음에는 비무장 시위를 벌였지만 1905년 정부군의 발포 이후 무장투쟁을 전개하게 된다.(191-192) 이러한 분위기는 주위 다른 나라 그리스나 세르비아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리스 민족주의는 1820년대 터키인에 대한 학살과 그리고 그 보복으로 오스만제국에게 수천 명의 그리스 성직자들이 살해되는 참극이라는 희생을 치르면서 독립 국가로 나아간다. 세르비아는 민족주의적 정교회를 수립했지만 인근 불가리아는 교회가 정치세력의 도구로 전락했다. 이러한 이유로 불가리아인들의 종교 참여율이 매우 저조했다. 이렇게 오스만제국의 약화로 민족주의 정서가 전면에 나서는 19세기 러시아와 그 인근 국가에서 정교회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진 통치자와 국민에 의해 본래적 종교적 중요성은 점차 약화하고 있었다.

프랑스대혁명과 계몽주의 그리고 민족주의가 혼합하면서 로마 가톨릭, 동방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는 점점 쇠퇴의 길을 가게 되었다. (이 무렵 조선 반도에 다양한 이름의 기독교가 전파된다. 이에 대해서는 한국 교회사를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기독교에 가해진 많은 잔인한 박해는 많은 신자들로 하여금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했다. 이러한 회의주의를 무신론으로 몰아가는 19세기 중엽 대사건이 바로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의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the Species)’ 출간이었다. 선교사역을 위해 떠난 여정은 갈라파고스 제도(諸島)에서 ‘자연선택설’ 이론을 정립하여 창조론을 전복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라 진화 과정의 산물임을 전파하는 무신론 ‘총대주교’가 된다. 물론 그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복음주의적 기독교 신앙과는 결별하였다. 그의 진화론에 나타난 주장은 매우 다양한 인종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선조’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로부터 인류가 진화했다.(202)

이러한 진화론은 인간은 진보하는 존재이며 역사 발전의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점을 사회 발전 논리의 근간으로 삼게 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권위에 대한 비판과 부정으로 이어졌다. 창조 사건은 다양한 신화 중 하나이며 성경 전체에 대해 계몽주의적 심판 즉 본문 비평이 신학의 일반적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예수는 유대인 랍비 중 한 명에 불과하며 신약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상징(symbol)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들은 유럽의 개신교 교인들을 교회를 떠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위기에 처하게 했다. 당시 독일 튀빙엔대학교 페르디난트 크리스티안 바우어(Ferdinand Christian Baur)는 신약성경을 유대주의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 그리고 바울 사이의 치열한 종교 갈등의 산물로 규정했다.(205) (이 와중에 우리에게는 조선 왕조는 막을 내리고 성경이 전해졌다. 그리고 성경의 권위는 혼란 근현대의 교회 역사 속에서 한국 교회를 통해 명확하게 수립되어 갔다. 이에 대해서도 한국교회사를 통해서 살펴볼 것이다.) 신학자이며 의료선교사,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유명한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종말을 앞당기고자 했으나 결국 실패한 비극의 인물로 규정했다.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중엽의 유럽 기독교는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대로 ‘신이 죽었다’는 말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214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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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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