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0-12-16 09:4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신약성경 앞의 구약성경


위 제목으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성경공부를 할 때에 먼저 66권의 위치를 배우면서 지내왔던 오랜 추억들이 머리를 스쳤다. 간명(簡明)하신 성경교사의 좋은 지도로 고무되고 자극되었기 때문에, 필자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중국문학의 박사학위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간단히 밝히고 싶다. 주제로부터 문장의 구체적 서술(주어+목적어+술어)까지 글을 적으면 적을수록,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로 주어졌다. 이 151호를 적는 감회는 아주 새롭다. 만 10년을 지나서 11년째에 걸쳐서 성경의 언어 분야를 통하여, 성경개론의 중요성을 더 절감해 가기 때문이다. 
성경의 어떤 부분을 관찰하고 다루며 연구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성경신학적인 성경개론에 바탕을 두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이제 이 주제에 접근하여 충실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관련 사항을 접어두고, 구약성경이 신약성경의 앞에 위치하고 있다는 논지로 바로 들어간다.
성경 66권이 언급될 때에 “삼구이십칠(3×9=27)”은 많이 회자(膾炙)되고 있다. 이렇게 초등학생이라도 익히 아는 숫자이다. 66권의 명칭을 차례로 노래하고 암송하는 것과 그 진정한 위치의 의미를 아는 것은 현실 속에서는 서로 아주 멀어져 있다.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또 잘 암송하는 것처럼 그 순서나 위치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달아간다면, 성령의 감동을 결코 부정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점을 강조하여 본 글의 주제로 여기고 싶다. 바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각각의 권수를 들어 간략한 목차로 구성한다.


1) 17권과 5권과 17권

앞의 17권은 창세기부터 에스더서까지이다. 중간의 5권은 욥기부터 아가까지이다. 이 5권은 시가서인데, 마지막의 “아가(雅歌)”에만 그 명칭을 지니고 있다. 다섯 손가락이나 5장(藏)처럼 서로 간에도 아주 밀접하다. 뒤의 17권은 이사야서부터 말라기서까지이다. 이 17권의 수에는 예레미야애가도 한 권으로 차지하고 있다. 이 두루마리 책은 시간적이며 점진적으로 튼튼한 하나의 책으로 엮어졌다. 이 세 가지의 분량과 성격에서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균일과 평등 속에서도 그 근거나 그 기본은 앞의 17권(역사서)이다. 그것은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의 17권에서 창세기부터 신명기서까지는 모세5경으로 특별히 중시되고 있다. 이것은 세 가지의 구도와 배열 속에서 제일 앞에 위치하는 17권은 근거나 기본이 되는 것과도 밀접하다. 모세5경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민수기에서, 자손언약 성취섭리와 땅언약 성취섭리가 함께하고 있다(성경개론, 박용기). 이 증명은 66권의 위치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하다. 창세기 37장부터의 시작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구약성경이 신약성경 앞에 놓여야 하는 이유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언약을 하고 그대로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조금 뛰어넘어 12소선지서로 가서 이 단락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12소선지서 중에서 제일 뒤에는 학개서와 스가랴서와 말라기서가 있다. 이 세 권 안에 “만군의 여호와”가 대부분 집중되어 있다. 이 세 권에서의 언급이 구약성경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전체적인 정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여호와”는 구약성경 전체에 있어서 주제어이며 핵심어이다. 그중에서 “만군의 여호와”는 선지서 17권을 정리하는 구체적인 주제어이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하는 것과 아주 밀접하다. 이름은 영광과 아주 깊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성경의 마지막 권이며 마지막 장(章)인 4장에서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 치료하는 광선(光線)을 비추리니”로 선포되어 있다.


2) 4권과 23권

4권은 4복음서이며, 23권은 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이다. 4복음서에서도 순서나 위치 면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마태복음 1장 1절(아브라함과 다윗)과 요한복음 21장 25절(이 기록된 책)이 제 위치에 자리 잡지 않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장면도 참으로 중요하다. 이것은 논리적이며 체계적으로 요한계시록의 끝에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와 너무도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논설위원,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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