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역사적 인간의 세 가지 불치병 III : 비판적 역사
인간은 살기 위해 과거를 파괴하거나 해체할 힘을 가져야만 하고 때에 따라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과거를 법정에 세우고 고통스럽게 심문하고 마침내 유죄를 선고해야 한다.
니체는 살기 위해 철학을 한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비축하기 위해 생각한다. 비축하는 방법은 힘을 모으는 것인지 마지막 힘마저 소진하는 것인지 그 경계가 모호하기도 하다. 니체에게 가장 중요한 힘은 과거를 파괴하고 해체할 수 있는 능력이다. 치밀하고 정교하게 해체하고자 과거의 가치들을 문초(問招)하듯 잔인하게 평가하고 법정으로 소환(召喚)하여 적대시하고 마침내 유죄를 선고하여 파멸의 이유를 만든다. 이러한 사유 과정 자체가 살기 위함이라고 본 니체는 역사적 인간의 운명을 세 가지로 분류하였으며, 우리는 앞서 기념품적 역사(261호)에 대해 그리고 골동품적 역사(263호)에 대해 살폈다. 이하에는 마지막으로 ‘비판적 역사’를 통해 니체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과연 살기 위한 사유가 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니체는 비판적 역사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위한 유익한 삶의 조건을 창조하고자 과거 역사를 이렇게 대하라고 한다. “과거에 대한 지식은 어느 때를 막론하고 현재를 약화시키고 생명력 있는 미래의 뿌리를 말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와 현재에 봉사하기 위해서 탐구되어야 한다.”(316) 미래와 현재에 대한 봉사는 과거를 반드시 희생양으로 삼아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과거에 대한 완벽한 부정과 파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를 극복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다시 현재와 미래를 더욱 과거에 고착화시켜 버리는 퇴폐적 삶을 야기할 뿐이다. (니체는 과거 극복의 가능성을 위해 인간 능력의 원천을 운동의 관점에서 정의한 ‘권력에의 의지’ 개념에 의존한다.) 이러한 니체의 사유에서 보듯이 과거에 대한 파멸 정도가 얼마나 완벽하게 진행했는지에 따라 현재와 미래가 삶에 봉사할 수 있다. 모순과 갈등, 대립과 투쟁의 현장을 현실로 규정하는 니체에게 과거는 완전히 소진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남아서 현실을 긴장으로 몰아간다. 편안하게 고정된 정적(靜寂)의 상태와는 거리가 먼 현실을 만든다. 니체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는 ‘비판적 역사’는 이렇게 극복을 시도해도 그 긴장이 사라지거나 해소해서는 안 될 상황이다.
니체는 이러한 현실이 모두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그 너머에 존재하는 ‘진리’를 언급하기도 한다. “삶은 사멸할지라도 진리는 널리 퍼지게 하라.(Fiat veritas pereat vita)” 이 말은 본래 철학자 크리스티안 토마지우스(Christian Thomasius, 1655–1728)에서 유래한다. 토마지우스는 계몽주의 초기 철학자로 이성주의적 학문과 종교적 관용을 강조한 인물이다. 그는 니체가 선호하는 사유 스타일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는 이성과 진리 추구가 인간의 생명과 실제 삶을 파괴할 수 있다는 비판적 예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당시 이성의 법정을 지배하고 있던 지적 엄격주의와 교조적 진리 추구 방향에 대해 예리하게 경고했다. 니체는 이 문구를 자신의 당대 학문과 종교, 철학과 예술 등 모든 지적 활동에 대한 비판을 위해 토마지우스의 논법을 사용한다. 삶에 봉사하기는커녕 생명력을 희생시키고 추상적이고 무미건조한 논리로 삶 전체를 왜곡하여 파탄으로 몰아가는 독일 문화 전반에 대한 비판에 토마지우스를 인용한다.
니체는 고정시켜 숭배 대상이 되는 기념품이나 골동품과 같은 지식이 아니라 삶을 긍정하고 생명을 고양하면서 인간 실존에 봉사하는 역사관을 제시하고자 한다. 니체는 삶의 역동성을 병들게 하는 당대 독일인의 내면세계를 이렇게 비판한다. “배고프지도 않은데, 욕망을 거슬러 과도하게 포식한 지식은 이제 더 이상 변혁적인, 바깥으로 몰고 가는 동기로 작용하지 못하며, 일종의 혼동의 내면세계 속에 감추어져 있다. (……) 현대인은 이것을 이상한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의 고유한 ‘내면성’이라고 부른다.”(318) 니체의 비판 맥락을 따라가면,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에는 자신의 과거 유산을 기념품과 골동품처럼 고정불변의 가치 체계로 남기려는 의도가 항상 도사리고 있다. 이런 점에서 소위 극복을 위한 비판은 ‘허구’이며, 비판도 단지 전통과 관습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뿐이다. 니체는 자기 극복에 게으른 모습을 “토끼 한 마리를 통째로 삼킨 다음 조용히 햇볕에 누워 가장 필요한 동작 외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뱀”(318)에 비유한다.
비판은 파괴 행위로서 기존의 자신을 극복하고 선과 악, 천박한 것과 고매한 것을 모두 통일하는 역동적인 생성으로서 ‘전체’를 만들기 위한 기획이라면, 역동성은 무한한 자기비판을 열어놓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전체를 만들기 위한 시도가 언제나 자기 부정과 자기 파괴를 항상 개방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면, 전체는 고사하고 자신에게 과연 무엇이 남겨질 것인지 나아가 최소한의 극복을 위한 미력(微力)이나마 남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니체는 무책임하다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비판 자체는 근본적으로 자기 정립을 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267호에서 계속>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예순넷: 교회 부패와 타락, 펠라기우스 자유의지론의 배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