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6-02-11 08:5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일흔넷. 칼케돈 공의회(451년): 로마 가톨릭 제국의 시작 (1)


동고트의 왕 테오도릭(Theodericus, 454년경-526년)은 서로마제국의 멸망 후 로마 가톨릭이 권력을 확보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그의 신앙은 아리우스주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문장은 아리우스주의의 표어다. 아리우스주의의 이단적 특성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homoousios)이 아니라는 주장에 담겨있다. 다시 말해 성자는 창조되었으며 시작이 있고 아버지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결코 동등한 하나님일 수 없다. 이러한 사상을 견지하는 테오도릭은 동로마에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 로마 행정과 법 그리고 원로원 체제를 학습한다. 로마 기준으로 그는 야만족의 왕이었지만 로마 제국의 원칙대로 이탈리아를 통치하면서 동로마 비잔틴 제국과도 대등한 외교를 펼쳤다.

그는 비록 아리우스파였지만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 관용을 베풀었으며 서방 교회에 중요한 정치적 완충 역할을 했다. 그래서 테오도릭 왕은 이후 다른 야만족 왕들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느냐를 평가할 때 기준이 된다. 하지만 이후 테오도릭 왕만큼 정치적 세련됨이나 국제적 위상을 갖는 야만족 출신의 왕은 없었다. 5세기 중반의 교회 정치 상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비잔틴 제국의 황제권이 기독론 논쟁(특히 단성론 문제)에 깊이 개입하던 실정이다. 황제가 교회 회의 곧 공의회 운영과 교회의 주교 임명 등 인사권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는 동서 로마 교회의 자율성과 위신을 약화시켰다는 뜻이다. 서방 주교들 특히 로마 교황은 동방 황제 권력에 의해 주변화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 이탈리아반도와 이베리아반도에 자리 잡은 비로마 야만 왕국들(동고트·서고트·프랑크 등)은 지리적으로 동로마 황제의 직접 통제 밖에 있었다. 이 말은 동로마 황제의 명으로 포고된 신조들에 자유로운 면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들은 기독론에 대해 이단 사상을 유지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는 서로마 교황에 대해 자신들의 아리우스주의를 강요하지 않았다. 나아가 서로마 교회에 군사적·정치적 보호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 결과 테오도릭 왕만큼은 아니었지만 이후 야만 통치자들은 동로마 비잔틴 황제의 간섭에서 서방 교회를 지켜 줄 수 있는 후견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서로마 교황 체제의 기반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로마 가톨릭 체제의 기반을 견고히 하는 교황이 등장한다. 레오 1세(Leo the Great, 주후 400년경-461년, 재위: 440–461년)라는 인물이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 교회 모두가 성인(聖人)으로 숭배하는 사람이며 로마 가톨릭에서 최초로 ‘대왕(Great)’ 칭호를 받은 교황이다. 5세기 중반에는 서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비잔틴 제국) 사이에는 세 가지 중첩되는 큰 문제가 있었다. 먼저 기독론의 붕괴였다. 449년 에베소 회의에서 일어났다. 이 회의를 ‘강도(强盜, Latrocinium) 회의’라고 규정한다.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간섭이 회의 전반을 압도한 회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코루스가 이 회의를 주도했으며 무장한 수도사와 군중이 회의장에 난입했고 반대파 발언자들을 위협하고 폭행을 가했다. 교회 공의회가 합법의 외피를 쓰고 폭력으로 결과를 빼앗은 날치기 강도 회의였다.

회의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양성론은 무너지고 단성론이 공인된다. 이 과정에서 로마 교황의 신학 입장(양성론)이 처참히 무시당했다. 로마 교회는 ‘공의회 자체가 무너졌다’고 했다. 그런데 이 상황은 서로마가 교황체제를 수립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준다. 교황 권위가 실질적으로 배제당한 구체적 증거는 교황 레오 1세의 ‘신학 문서(Tome of Leo)’가 회의 절차상 공식적으로 채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보낸 서한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낸 레오의 서한(Epistola Leonis ad Flavianum)’이다. 서로마 교황 레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낸 서한이다. 이 서한이 공의회에서 채택되지 않은 것은 단지 회의 절차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서로마 교황의 정통성 즉 사도 베드로를 계승하는 교황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서로마 가톨릭이 동방 황제와 공의회 체제에서 완전히 고립될 위험 상황을 만들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 섭리는 이것을 서로마 가톨릭 체제가 세속 정치의 권력을 견고히 다지면서 지배권을 확보해 가는 ‘기회(?)’로 이끈다. (1세기 후 비록 동서 교회는 분열되지만) 그 사건이 바로 451년 ‘칼케돈 공의회’다. 교리적 차원에서 보면 기독론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한 위격, 두 본성론’을 공식적으로 채택한다. 다시 말해 레오의 교서가 공의회에서 승인되었으며 이는 로마 교황권의 권력 입지 ‘베드로가 레오를 통해 말했다’는 교황권 승인을 받아낸 셈이었다. 제도적 차원에서 보면 로마 교회의 신학이 공의회 정통으로 복권했다는 뜻을 갖는다. 이는 세속 황제의 권력이 교리를 일방적으로 규정하지 못한다는 선례를 형성하게 했다. 물론 이 회의는 동서 교회의 완전한 화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즉각적인 분열과 단절, 고립과 파국을 지연시켰을 뿐이다.

5세기 말은 이렇게 서로마 가톨릭의 교황 체제가 그리스도를 앞세워 세속의 최고 권력으로 부상하는 결정적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교황권의 신학적 정식화를 통해 교황은 사도 베드로를 계승한다는 날조가 공의회에서 진리처럼 견고하게 만든다. 거기에다 이 교황은 전략적으로 극도의 겸손한 신앙고백을 하면서 교권을 절대권력으로 만들어 갔다. 그는 자신을 “복된 베드로의 무가치한 후손(indignus haeres beati Petri)”*이라고 고백한다. 겸손을 권력 장악의 수단으로 활용한다. 연이어 452년 아틸라의 훈족의 로마 침공 저지, 455년 반달족 약탈의 최소화는 황제 자리에 오르는 발판이 된다. 교회와 국가의 두 왕관을 모두 쓰는 일이 벌어졌다. 이러한 교황 체제를 더욱 견고히 하도록 돕는 세속 왕국이 준비되고 있었다. 프랑스의 기원이기도 한 ‘메로빙거’(Merovingians)’ 왕조다.

*  Diamaid MacCulloch, A History of Christianity; The First Three Thousand Years, 박창훈 역, 『3천년 기독교 역사 I: 고대사』(서울: CLC, 2013년), 497쪽. 이하 쪽수는 괄호로 병기함.

<286호에서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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