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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작성일 : 26-03-10 10:0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19세기 독일 지성의 민낯: 퇴폐적 염세주의 숭배


니체는 모든 것을 역사로 귀결시키는 역사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에 영향을 받은 에두아르트 폰 하르트만(Eduard von Hartmann)의 ‘무의식의 철학’을 풍자로 비판한다. 현재의 삶을 부정하는 비관주의 역사철학을 전개하는 하르트만에게 세계는 고통과 불행이 지배한다. 이는 인류 발전이 가속화할수록 명확히 드러나며 자기 존재에 대한 필연적 혐오(구역질)에 도달한다. 그에게 인류 역사는 각자 자기 존재에 대한 전면 부정의 필연성이 지배한다. 니체는 이러한 하르트만의 염세주의에 한편 동의하면서 또 다른 한편 그의 비판이 삶을 병들게 하는 발상이라고 재비판한다. 니체는 이렇게 묘사한다.

장난꾸러기 중의 장난꾸러기, 너[하르트만-필자 주]는 현재 인류의 동경을 말하고 있구나. 너는 동시에 인류의 장년기가 끝날 즈음, 건실한 범용성을 목표로 한 지적 교육의 결과로 어떤 유형이 나올지도 잘 알고 있다—구역질. 눈에 드러나게 사태는 비참하지만, 앞으로 더욱 비참해질 것이다. ‘눈에 드러나게 적그리스도는 세력을 넓혀갈 것이다’ — 그러나 그런 상태여야 하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어쨌든 우리는 모든 존재자에 대한 구역질로 가는 — 최선의 길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하르트만은 인류가 집단으로 세계를 부정하고 있다고 비꼰다. 그는 인류가 스스로 존재하는 것보다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깨달을 것이며 세계 종말을 원하는 집단이 된다고 한다. 이에 대해 니체는 삶을 부정하고 세계 종말을 기다리라는 이러한 퇴폐적 발상이 당대 적어도 독일 지성에 엄습했다고 지적한다. 니체는 비관주의 시각에서 역사의 목적, 인류의 미래, 세계의 종말을 말하는 하르트만을 ‘장난꾸러기 중의 장난꾸러기’라고 칭한다. 생존을 위한 활력에 도움을 주는 철학이 아닌 장난 같은 예언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삶을 부정하는 하르트만의 병든 철학에서 니체는 분명히 서구 지성사 전체를 지배하는 ‘허무주의’의 도래(到來)를 보고 있다. 독일 지성을 병들게 하는 혐오와 부정의 질병을 극복하고 창조와 긍정의 의지를 복원하려는 니체는 실존 혐오의 비관주의 철학이 얼마나 위험하게 독일 학문에 팽배했는지 폭로한다. 그런데 그 모습은 마치 가치 창조의 가능성이 종말을 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니체는 이를 ‘적그리스도적 현상(Antichristliche Erscheinung)’(367)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신학적 의미에만 국한하지 않으며 하르트만이 더욱 병들게 하는 19세기 유럽 문화 전반에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하르트만은 인류가 계몽주의에 눈뜨는 만큼 세계 본질은 고통이며 이에 인류는 자신에 대해 ‘혐오(Ekel)’에 이르며 이는 세계 종말을 가속화한다. 이러한 흐름을 역사의 필연적 과정으로 보는 하르트만을 비판하면서 니체는 그를 적그리스도라고 풍자한다. 물론 서구 기독교의 몰락은 하르트만이나 니체 모두에게 필연적이고 필연적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니체가 하르트만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존재에 대한 구역질 혹은 적그리스도적 종말론으로 시대를 진단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종말의 극단을 거론하면서 이 세계를 더욱 나쁘게 만든다는 데 있다.
가령 도입에서 인용한, 니체가 하르트만의 비관주의 질병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한 말, ‘우리는 모든 존재자에 대한 구역질로 가는—최선의 길에 서 있다’고 할 때 니체는 하르트만의 풍자 논리를 비꼬고 있다. 왜냐하면 하르트만의 비관주의와 삶을 병들게 하는 퇴폐적 종말론도 필연적 산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르트만 같은 철학자가 분명 삶의 의지를 왜곡하고 병들게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마치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하는 것처럼 착각을 넘어 거만함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르트만 식대로 ‘모든 존재에 대한 구역질로 가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다’라는 결론은 삶을 긍정하거나 삶의 활력을 더하는 가치 창조의 근거는 될 수 없다.
그래서 니체는 이러한 하르트만의 태도에 대해 풍자로 응수한다. ‘그렇군! 구역질에 도달하는 길이 최선의 길이란 말이군!’ 삶을 긍정할 수 없는 삶의 패배자들이 세계 종말만 숭배하는 유럽의 지적 풍토를 보면서, 니체는 점점 다가와 유럽 전역을 ‘무가치함’으로 뒤덮고 있는 무서운 손님인 ‘허무주의’를 온몸으로 절감한다. 니체는 이 상황을 이렇게 절규한다. “시대적인 교양-쓰레기들이 맹목적으로 열광하고 너무 열광한 나머지 광기에 빠졌다.”(367) 맹목적 광기는 삶을 강화하고 창조하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혐오하고 세계의 무가치함을 찬양하는 병적인 열광이다. 니체는 바로 이 위기가 전 유럽에 확산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병적 광기가 집단적으로 분출할 것이라고 예고하면서 이를 주도하는 ‘무서운 손님’이 있는데 니체는 이를 ‘허무주의’라고 칭한다.
니체는 생존을 위한 가치 창조의 동력을 부정하는 집단 지성의 광기에 대해 괴테를 인용해 “부엉이의 찡그린 얼굴의 진지함”(369)이라고 경고한다. 헤겔 철학과 독일 교양에 대한 비판이며 풍자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법철학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되어야 날기 시작한다.” 즉 철학은 사건이 끝난 뒤에야 이해한다는 말이다. 부엉이는 철학적 지혜의 상징이다. 니체는 이 상징을 풍자적으로 뒤엎고자 한다. 니체는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당시 독일 교양의 산물을 근본에서 비판하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학문적 권위를 드높이고 철학적 장엄함으로 현실을 설명한다고 하지만, 니체가 볼 때 그 교양인들은 찡그린 얼굴 그것이 전부다. 지혜로운 척하는 학문의 심각함이 그 전부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하르트만 철학이 그러했으며 이에 동조하는 독일 교양인들이 그의 염세주의를 헤겔식 부엉이의 엄숙함으로 칭송했다. 니체가 볼 때 이는 소피아(지혜)의 구현이 아니라 학문적 허세이며 고약함이다. 철학적 권위는 찡그린 얼굴의 심각함으로 인해 오히려 더 큰 허구를 조장할 뿐이다.
<287호에서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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