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게 작년 12월 19일, 할머니가 지난 달 19일에 돌아가셨으니 정확하게 4개월 만에 다시 상을 치르게 된 셈이다. 그 송연했던 기억이 증발할 즈음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 또 한 번의 죽음.
죽음 이후 장례 세리모니가 없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식으로 그것을 소화하고 받아들이게 될까. 개인적으로는 할머니의 장례를 지켜보면서 그 모든 절차의 노골성과 잔인함에 고개를 저었다. 우리에겐 단 한 분의 할머니이지만, 병원 측 모니터에 뜨는 영정은 그냥 익명의 여러 고인 중 하나일 뿐이다. 안다. 세상의 모든 사건은 누군가에겐 슬픔 혹은 기쁨이지만 저편의 누군가에겐 ‘일’이니 그럴 수 있다. 빈소를 터질 듯 메운 국화꽃 향기, 나로선 도무지 그 가치를 알 수 없는 화환들도 장례식에 필요한 것이라면 괜찮다. 입관하는 장면을 굳이 보여주는 것도, 고인 확인 차원 정도로 어떻게든 이해해볼 수 있다. 내가 기함했던 건, 화장터의 유리창 너머 놓인 할머니의 타다 남은 척추 뼈였다. ‘분쇄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 말에 아빠는 힘겹게 대답을 했고 나는 더이상 볼 수 없어 시선을 떨구어 버렸다. 여즉 내게 강렬하게 남아있는 건 생전의 할머니 모습이 아닌 입관할 때의 작고 딱딱한 시신, 분쇄 직전의 척추 뼈와 틀니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숨을 거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프고 괴로운데 왜 그 모든 적나라한 과정을 목도해야 하는 것인지 그것이 유족들에게 (도대체)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작별의 수순을 그런 식으로 밟지 않는다면 고인을 보내지 못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서른 넘은 나도 이런데 아직 어린 십 대 사촌 동생들은 어떨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할머니의 관이 땅속에 묻히는 모습은, 내면에 잠재한 무수히 많은 것들을 휘저어 주었다. 이질감이 느껴지던, 환한 햇살 속 할머니의 영정사진과 땅속으로 묻히던 유골함. ‘육체는 흙으로 빚어져 흙으로 돌아가지만 할머니의 영혼은 진짜 신령한 옷을 입고 부활했다’는 아빠의 나지막한 설교와 기도.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당시 어렴풋하게만 느꼈던 것들이 하나 둘씩 떠올랐다. 그 때의 마음, 기분, 다짐, 의지나 각오 같은 것들.
죽음을 깊게 이해할수록 삶은 가볍게 느껴졌다. 삶에 함몰되어 있다가 죽음을 경험하며 한 발짝 물러나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삶이란 반복뿐인 지난함 혹은 반복뿐인 고통에 불과하다. 그러나 죽음이란 단어가 개입하면 삶의 정의는 달라진다. 삶, 그것은 ‘순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무수한 ‘순간’들을 살아내는 것. 시들지 않으며 열과 성을 다해 빛나는 것. 육신의 명이 다할 때까지 지치지 않는 것. 불꽃 같은 믿음을 지키는 것. 이것들을 해내기에 이 땅 위에서의 삶은 너무나 짧다. 아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금방 허물어질지도 모르는 이 세계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일’. 영원에 비하면 이 피조세계는 한 점과 같기 때문에 더 아뜩하고 소중하기만 하다. 할머니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동생과 그런 약속도 했다. 앞으로 부모님과 함께 할 날도 그리 많지 않다고. 길어야 30년 그것도 아프시거나 사고가 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30년이니 정말 최선을 다해 잘하고, 자주 함께하자고.
또 하나 느꼈던 건, 신앙의 중요성이다. 신앙이 없는 가족들은 가히 ‘절망적으로’ 슬퍼하였다. 아마 장례가 끝난 후가 더 고통스럽고 힘들 것이다. 물론 신앙이 있어도 슬픈 건 매한가지다. 가족의 중심이란 이유로 외려 더 씩씩하게 굴던 아빠가 몰래 눈물을 훔칠 때의 마음은 누구에게도 비할 데 없이 아플 것을 안다. 그러나 그 끝엔 신앙을 통한 ‘위로’가 있다. 내가 사무치게 사랑했던 사람이 지금 영원 안에서 그리스도와 평안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 그게 정말이지 큰 위안을 가져다준다. 헤어짐은 슬펐지만, 그 이후가 슬프지 않아도 되는 까닭은, 할머니는 지금 행복하시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이 충만하게 믿어지는 탓이다. 대단하지 않나. 그가 행복하다는 보장만 있다면 나의 그리움 정도야 어떻게든, 얼마든 견뎌낼 수 있다. 유족의 간절함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비록 이 세상에서는 마르고 볼품없어 더 가슴을 찌르는 안타까운 모습으로 이별하였지만, 그것은 육신이란 ‘옷’이 변했던 것뿐이고 천국에선 영원히 병들지도 썩지도 않는 신령한 옷과 마음으로 무한한 기쁨을 누리고 계실 거란 사실.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신앙을 통한 궁극적인 위안이 가져다주는 평화란 비할 데 없이 고요하며 달콤함을 꼭 알려주고 싶다.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두 차례의 죽음. 이렇듯 하나님이 죽음에의 경험을 강렬히 하신 데에는 반드시 어떤 뜻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죽음을 기억해야겠다. 죽음이란 단어에 함의되어있는 모든 삶의 요소들을 낱낱이 끌어안고 살아가야겠다. 그 요소 중 가장 중앙에 있는 ‘하나님을 힘써 배우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애써야 하겠다. 피조세계란 언제든 바스러질 수 있는 것, 피조물이란 언제 호흡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임을 늘 새기고 있어야 하겠다. 시작과 끝을 잇는 하나의 선이 전부인 이생에 집착하거나 과도한 의미부여를 않아야겠다. 분산되어있던 에너지를 그러모아 팔 안의 사람들을 더욱 귀히 여기고, 좋아하는 일에 땀 흘려 매진하여야겠다. 이러한 마음을 주시고 내 삶을 끌어가는 분이자, 이 세계와 우주를 운행하며 주관하시는 이가 여호와 주이심에 감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