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굴레
영화 <차이나타운>
‘엄마’(김혜수)는 차이나타운을 지배하는 조직의 수장이다. 대부업과 장기밀매로 그 바닥에 악명이 자자하다. 그녀가 가장 총애하는 ‘일영’(김고은)은, 태어나자마자 지하철 보관함 10번에 버려진다. 그래서 일영이 이름이 된다. 일영은 ‘엄마’에게 인정받기 위해 아니, 버려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쓰고 그 결과 식구들 중 에이스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른다. 일 때문에 채무자의 아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일영은 차이나타운이 아닌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 세계로의 진입을 선망하지만, 이를 눈치챈 ‘엄마’가 그 둘을 제거하려 한다.
여성판 느와르라고는 하지만, 실은 일반적인 엄마와 딸의 관계를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한 게 아닌가 싶다. 굳이 조직의 수장이 아니라 하더라도, ‘엄마’라는 이름에 겹겹이 쌓인 피로를 우리는 안다. 사실 엄마는 태어날 때부터 엄마가 아니었기에 서툴 수 있다. 게다가 완벽하게 아이를 맞이할 준비가 된 엄마는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으리라 확신한다) 생의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다가, 사건이나 사고로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이끌리듯 살다가 그렇게 아이를 갖게 된다. 그리하여 그 아이를 소유처럼 여기는 우를 범하는데,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거나 아이의 욕구, 재능과는 상관없는 과업을 일방적으로 부여하기도 한다. 칭찬과 비난으로 아이를 조종한다거나 잘못된 가치를 주입할 수도 있다. 안타까운 건 그 모든 것이 엄마의 사랑 혹은 사랑이라고 믿는 지점에서 파생한다는 것이다.
완벽한 엄마는 없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완벽한 딸도 없다. 그러한 엄마 밑에서 나고 자란 딸들은 항상 결핍과 함께 성장하기 마련이다. 그 결핍 때문에 의지가 발동할 수 있고, 그 결핍 때문에 의욕을 잃을 수도 있다. 또한, 그 결핍으로 엄마가 그랬던 것과 비슷한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다. 자기가 원한다고 생각하고 해왔던 것이 엄마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상황과 사건에 부닥칠 때 대처하는 방식이, 내가 아닌 내면의 엄마의 목소리였을 수도 있다. 과연 건강한 의미에서의 ‘벗어나기’란 가능할까.
‘엄마’가 강가에서 향을 들고 약식으로 제를 지내는 장면이 있다. 일영이 누구를 향한 것이냐고 묻자, ‘엄마’는 자신의 엄마라고 대답한다. 그 엄마를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도 언급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를 증오했던 일영 역시 그 과정을 답습하게 된다. 울부짖음으로 ‘엄마’를 칼로 찔러 죽이지만, 결국, 그 ‘엄마’의 성을 따라 이름을 새로 짓고 그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조직의 수장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나 역시 일영 같은 딜레마에 빠진 것은 아닌지. 내 내면에 지층처럼 쌓인, 내 것이라고 믿었던 모든 감정과 생각과 사상과 기호가 실은 엄마의 것은 아니었는지. 그리하여 벗어나려고 했던 달음박질의 끝에 결국 또 엄마가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면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는, 주로 맹랑한 딸들이 내뱉는 이 대사는 실은 그리 불순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점에서, 엄마의 삶을 나에게 그대로 적용하지 않겠다는 점에서, 엄마와 분리되어 오로지 자신으로 충실하겠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동안 왜곡해서 이해했던 엄마의 모습을 좀 더 객관화시켜 볼 필요가 있다. 부모-자식의 관계하에 실타래처럼 엉겨있던 문제를 푸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지점에 있어 나는 성경 혹은 신앙이 만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앙이 있다는 사실에 안주하여 모든 것을 뭉뚱그려 해결하려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문제를 세밀하게 인식하는 게 먼저이고, 그에 따른 적확한 방안을 성경 혹은 말씀 안에서 찾는 게 다음이다. 몸이 아플 땐 병원을 찾으면서 마음의 문제는 개인적인 노력 없이 ‘하나님이 하신다’로 대충 일관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