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에 대하여
가톨릭교회의 그레고리오 성가나 개혁교회의 루터나 칼빈의 시편가가 성경 원문을 그대로 사용한 것에 비하여, 찬송가는 일반적으로 성경 원문을 그대로 사용하지 아니하였다. 찬송가는 가사와 음악이 대중적이어서 쉽게 부를 수 있고 여러 절로 되어 있어, 같은 선율에 의하여 반복 노래로 불린다. 그리고 찬송가가 성도들이 부르는 찬송가로서 역할을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교리 및 교파의 선전 또는 선교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이런 이유로 각 교파가 연합하여 제작된 찬송가이지만 교파마다 선호하는 찬송가를 선별해 부르고 있다.
찬송가는 찬송시와 찬송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찬송시라 함은 작시자(作詩者)의 신학과 신앙을 시로 지은–찬송가의 가사에 해당하는 – 부분이며, 찬송곡은 작시자가 찬송시로 만든 것을 노래로 부를 수 있도록 작곡한 것이다.
교인들이 공적인 장소에서 부르는 찬송가로 채택되기 위해서는 작시자의 작시와 작곡자의 작곡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며, 출처가 불분명한 작시나 작곡은 회중이 부르는 찬송가로 사용할 수 없다. 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는 찬송가가 되기 위해서는 작시자와 작곡자의 신앙과 신학적인 사상 검증을 받아야 한다. 또한 찬송가가 가지고 있는 문학성과 음악성도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많은 교인이 즐겨 부를 수 있는 영적 노래이기 때문이다.
찬송가란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따라서 찬송가가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찬송을 받는 대상이다. 찬송을 받는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시어야만 하며,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나 천사가 될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계 22:9)
찬송가 가사 중 외국 찬송가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 중 하나는 ‘예수님’을 ‘예수’로, ‘예수께서’를 ‘예수가’ 등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우리의 신앙과 찬양의 대상이신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 보면서 마치 친구처럼 한국어의 정서와 맞지 않게 번역한 것이다. 또 이와 반대로 찬송의 대상이신 하나님보다 인간을 격상시킨 경우이다. 예를 들면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통일 186장), ‘나의 생명 드리니…’(통일 348장),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시고…’(통일 549장) 등의 가사 내용은 인간의 어떤 행동의 대가(代價)로 하나님께서 베푸신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러한 인간(나) 중심으로 된 가사들은 번역의 미숙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한 이유 등으로 ‘예수가 내게 계시니…’(합동 464장, 1962년)는 ‘예수가 함께 계시니…’(개편 359장, 1967년)로 바뀌었다고 생각된다.
찬송가에서 ‘아멘’ 사용에 대하여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 말의 뜻처럼 화답이라는 의미가 있다. 노래하는 자(찬양대)가 노래하면 백성들이 ‘아멘’으로 화답한 것을 볼 수 있다(대상 16:36; 시 41:13). 따라서 ‘아멘’은 독창자 또는 찬양대 등의 노래 후 듣는 청중들이 ‘진실로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믿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의미가 있다. 학자들에 의하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 찬송가이고 ‘아멘’이 가사 끝에 당연히 붙어야 하며, 사람끼리 서로 권면하고 믿음을 다짐하는 복음성가 등은 교훈과 위로 및 간증 등에 해당하므로 ‘아멘’을 붙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멘’ 사용에 따라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구별할 수 있는 신학적, 학문적 근거는 없다. 예를 들어 신앙고백적인 내용으로 성찬식 때 자주 불리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통일 405장)은 우리나라에서는 찬송가로 분류되어 ‘아멘’이 뒤에 붙지만, 미국 교회의 찬송가에는 복음성가로 분류되어 ‘아멘’이 없다. 찬송가 끝에 ‘아멘’의 사용은 19세기 말 이후 모든 찬송가에 ‘아멘’을 붙였으며, 가사나 대상에 따라 붙였다기보다는 하나의 관습으로 붙여졌다. 그러나 현대 찬송가의 시작인 16세기의 독일 찬송가 ‘코랄’에는 처음부터 ‘아멘’을 붙이지 않았다. 또한 칼빈의 개혁교회 시편 찬송에도 ‘아멘’을 붙이지 않았는데, 1930년대 미국 찬송가에서부터 ‘아멘’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아멘’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구별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아멘’은 신앙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찬송가는 선교 초기부터 외국곡을 번역·개사하여 부른 것이 대부분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에 맞지 않는 곡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찬양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은 시대와 민족을 막론하고 같아야겠지만 가사와 음악은 시대와 민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하나님은 시편 등 시가서에 국한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다윗이나 바흐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 민족의 정서와 문화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나오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가사 1음절에 선율 1음을 대입시켜야 부르기 쉽다. 예를 들면 ‘천사들의 노래가…’(통일 125장)와 같은 찬송가는 가사 중 ‘영광을’이란 가사의 ‘영’에 해당하는 음이 15개나 되며 ‘여어----영광을’처럼 부른다. 영어로 부르면 Gloria에서 ‘글로---리아’로 전혀 이상하지 않지만, 우리말 가사로 부르기에는 아주 적합하지 않은 찬송 중 하나이다. 또 음절과 음을 맞추다 보면 번역 과정에서 원어의 뜻이 변질된다. 따라서 번역으로 인해 가사와 음이나 박자가 일치하지 않는 부자연스럽게 번역된 외국 찬송가가 많다. 이러한 외국 찬송가보다 가사와 음이 일치된 한국인에 맞는 한국적인 찬송가가 더 우리에게는 어울릴 수 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도 일종의 음악이므로 시가 주는 의미를 잘 살려 선율 또한 아름다워야 한다. 적당한 선율은 음악을 아름답게 만들며, 여기에 아름다운 화음은 미적,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화음이 잘 어울리는 곡으로는 ‘신자 되기 원합니다…’(통일 518장), ‘거기 너 있었는가…’(통일 136장) 등의 흑인영가에서 온 찬송가들도 있다.
찬송가는 하나님을 시와 노래로 찬양하는 것이므로 가급적 밝고 명랑한 장조의 곡이 좋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자 구속주로 지금도 살아계셔서 유한세계인 천지 만물은 물론 영원세계까지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한 분이시다. 따라서 어둡고 답답한 느낌의 단조보다는 밝고 경쾌한 장조의 노래로 선곡함이 좋다. 지혜자 솔로몬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전 7:14)고 하였다. 그러므로 감명 깊은 가사와 아름답고 부르기 쉽게 만들어진 찬송가에 의한 찬양은 형통한 때에는 하나님께 대한 기쁨의 찬양이 되고, 곤고한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는 기도가 되어 우리의 삶이 성령과 동행하는 나날이 될 것이다.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 146:2)
참고문헌 : 오영걸 저,『찬송가학』, (엘맨출판사, 2004)